묵동기담 (the strange tale of Oyuki, 1992). 창녀촌의 산보자 나가이 가후의 전기영화. 스포일러 있음.
나가이 가후라는 작가를 이 영화에서 처음 알았다. 1920년대부터 나가이 가후가 사망한 1940년대 말까지 이야기다. 나가이 가후는,
명문대가 부잣집에서 태어나 당시로서는 어려웠을 유학까지 다녀온 사람이다. 프랑스에 가서도 돈을 펑펑 뿌렸던지
거기에서도 창녀촌을 드나든 모양이다. 거기에다가 글도 창녀, 게이샤에 대한 글만 써서 이것도 문학이냐는 비아냥을 듣는다.
우산을 들고 완벽하게 차려입은 양복을 입고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다니는 세련된 신사. 창녀촌을 드나들 때도
세련되고 우아한 태도를 잃지 않아서 창녀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그는 완벽하게 지어진 대저택에서 산다.
일기를 꼬박꼬박 쓰는데, 이것이 그의 본질이다. 관찰자. 산보하는 사람. 사람과 사회와 현상을 스쳐지나가면서 그 본질을 통찰하지만
멈추거나 거기 참여하거나 거기 감정이입하지는 않는 사람이다.
그가 창녀촌을 드나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지속되는 사랑을 하지 않는다.
언제 사라질 지 모르는 사랑. 지금 이순간에도 멀리 흘러가 버리고 있는 짧은 순간의 사랑. 영원히 쏟아지는 햇볕이 아닌,
정원 위에 잠깐 머물다가 떠나가 버리는 그런 사랑이 바로 그가 원하는 사랑이다.
이 영화도 그의 이런 본질에 맞춰 형식이 이루어져 있다. 기승전결이 아니라 이 여자를 만나고 저 여자를 만나고 하는 식으로
병렬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가이 가후는 모든 여자들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 바닥에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흘러가 버리고 있는 시간에 대한 냉철한 인식과 허무다. 그는 많은 창녀들을 만나지만 (그중 어느 창녀는 그에게
진심을 바치지만), 그 어느 누구와도 겹치는 법 없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나가이 가후의 첫번째 여인은 21살짜리 게이샤다. 당시로서도 놀랍도록 구시대적 여필종부 사고방식을 갖고 있어서
돈을 주지 않아도 불평하지 않고 성심성의껏 나가이 가후를 섬긴다. 나가이 가후는 그 여자가 자기에게 과분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그녀가 갑갑하다고 느낀다. 그녀는 나가이 가후를 결국 떠난다. 나가이 가후는 그 게이샤에게 돈을 주어서 미래를 축복하면서 보내고
곧 잊는다. 새로운 여자를 또 찾아나선다.
두번째 여인은 그가 드나들던 바의 웨이트레스다. 나가이 가후가 바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집으로 따라온다.
오는 여자 마다 않는 나가이 가후는 그 여자와 섹X를 한다. 하지만 그 웨이트레스는 꽃뱀이었고, 나가이 가후는 그녀를 떨쳐내 버리는 데 곤란을 겪는다. 나가이 가후는 그 와중에 섹X의 대천재인 여자를 만난다. 어느 야쿠자 두목의 애인이라는데, 그렇다고 나가이 가후가 망설일 리 없다. 영화는 한동안 나가이 가후가 그 수수께끼의 여인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그린다. 나가이 가후는 그 여자를 찾아나섰다가 창녀촌에 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산을 씌워달라고 달려든 여인 오유키를 만난다. 창녀지만 어딘지 생활인 느낌이 나는 여자다.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다. 이 영화는 나가이 가후와 오유키 간 관계를 그린다. 나가이 가후는 자기가 애타게 찾아다니던 여자를 싹 잊는다.
그 여자는 나가이 가후에게 그 정도 의미밖에 없었다. 오유키와 나가이 가후 간 애정행각이 이 영화 내용이다. 나가이 가후는 인생 최초로
흘러 지나가 버리는 사랑이 아닌 오래 함께 머무르는 사랑을 하고 싶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오유키는 나가이 가후가
문화훈장을 받고 부와 명성을 누리는 작가인 줄은 모른다. 그저 땡전 한푼 없이 사회의 음지에 사는 포르노사진가인 줄 안다.
그래도 오유키는 그런 나가이 가후에게 평생을 바칠 생각을 한다. 나가이 가후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창녀촌과 창녀들만 계속해서 나오는, 사건 별로 없고 매력 없는 남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다. 그는 여자들을 그냥 스쳐지나가는 데에서
의미를 찾는다. 쾌락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고 무엇때문에 여자들을 그렇게 쫓아다니는지 모르겠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여자들이라기보다, 그녀를 스쳐지나가는 산보자같은 자기 자신을 그려내는 일이다. 그가 자기 자신에 가까이 갈수록, 그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어진다. 좋든 싫든, 이것이 나가이 가후 예술의 본질이다. 늙은 나가이 가후가,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어져서 철저한 고독 속에서 혼자 죽어가는 장면은 그의 예술의 정점이다. 확실히 예술의 예리한 한 측면을 포착한 수작영화다.
추천인 3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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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년 영화면 아주 고전은 아닌데.. 흥미가 생깁니다.
그리고 혹시 제목이 괴담이 아니라 기담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