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2003) 스포일러 있음.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라는 영화는 그 제목에서 특이함을 준다.
비슷한 주제의 이 영화보다 걸작 a patch of blue를 생각해 보면
이 영화를 잘 이해할 수 있다. A patch of blue 에서는 장님이라는 장애를 가진 백인소녀를
흑인이라는 사회적 장애를 가진 청년이 사랑하는 이야기였다. 둘은 자기들이 가진 장애를 극복해야만
사랑에 도달할 수 있는 절박한 상황에 처했고 (1960년대 영화다), 둘이 가진 순수한 사랑으로 이를 극복한다.
이 영화에서는 쿠미코가 다리를 못 쓴다. 쿠미코와 츠네오는 쿠미코의 장애가 주는 고난을 극복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츠네오는 장애인 쿠미코를 돌보다가 어느순간 지쳐서 나가떨어질 것을 안다.
'나 좀 봐 주라. 나도 언젠가는 늙어." 츠네오는 농담처럼 쿠미코에게 말한다. 하지만 농담 중에는 진심이 있다. 그는
언젠가 떠날 생각이다.
쿠미코는 이것을 안다. 자기는 빛도 없고 물이 주는 압력이 몸을 으스러뜨릴 정도인 심해에서 눈도 없이 사는 심해어라고 한다.
감각을 느낄 능력도 감정을 느낄 능력도 없는 물고기다. 육지로 나오면 뻥하고 터져 버린다. 하지만 츠네오와 세상에서 가장 야한
섹X를 하여 잠깐 세상에 나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잠시만 있다가 심해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그것으로 좋아"하고 행복을 느낀다.
쿠미코의 장애가 주는 고난을 극복하려 시도하기는 커녕 멀찍이서 쭈뼛거리다가 그냥 헤어지는 것이다.
뜨거운 사랑이라기보다 평범한 사람의 연약한 사랑이다. 츠네오는 몇년이 흐른 다음에도 자기가 떠나온 쿠미코를 그리워한다.
하지만 그 그리움 안에는, 장애인 쿠미코를 떠나온 안도감 또한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워하는 대신
다시 돌아갔을 테니까. 심해에 잠들어 있는 쿠미코를 깨워 불러오는 일은 어렵지 않을 테니까.
사실 이 영화를 츠네오의 입장에서 본다면, 별 할 말 없다.
미화할 것 없이 흔히 발생하는 일이다.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해 봤는데,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으니 그냥 도망친 것이다.
아마 장애인과 정상인이 사랑하는 대부분의 케이스가 이럴 것이다.
츠네오는 이 영화의 관찰인이다. 쿠미코라는 심해어가 뭍으로 나왔다가 다시 심해로 돌아가는 것을 관찰하는 사람이다.
쿠미코는 츠네오를 진심으로 사랑했을까? 이 사랑은 잠깐 지속되다가 곧 사라지겠지 하고 생각하는 그 정도 사랑이다.
널 영원히 기억하겠어 같은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이 심해어에게는 뭍으로 잠시 소풍 온 정도 사건이다.
나는 이 영화가 "심해어가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비록 멜로드라마 형식을 띠고는 있지만,
진짜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이 영화에 존재할까?
츠네오와 동거하며 서로 섹X를 매일 했을 때에도, 쿠미코는 자기에게 허락된 심해어의 생존방식을 그냥 살고 있었을 지 모른다.
심해에서 빛도 소리도 없이 살다가 잠시 뭍에 올라와 세상에서 가장 야한 섹X를 하는 것 - 그것이 심해어의 생존방식이다.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 - 그것이 심해어의 생존방식이다.
쿠미코와 츠네오의 관계가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그 사랑이 이루어지고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 - 그것은 정상인이
쿠미코에게 덧붙이고 싶어하는 환타지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영화는 감동적이다. 마음껏 뛰노는 한없이 자유로운 조제 - 이것은 심해어가 가지는 판타지다. 사실 속으로
심해어는 이런 생각을 가지지 않는다. 심해어는 그런 자유를 누리려 하다가는 뻥하고 몸이 터져버리는 신체구조를 갖고 있다.
자기도 그것을 안다.
사납게 자신을 구속하는 호랑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생존의 방식이 심해어와 정상인은 다를 뿐이다.
심해어는 죽지 않는다. 심해어는 암흑과 고독, 정적과 무거운 물의 수압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줄어들다가 마침내 완전히 스러져 버릴 것이다. 아직 자기에게 빛이 남아 있을 때 지상에의 소풍을 조금이라도 누리고 싶어하는 그 간절함, 애틋함이 이 영화가 주는
감동의 본질이다.
그런데 모든 장애인이 심해어일까? A patch of blue 에서 장님 여주인공은, 쿠미코 못지 않은 역경 속에 있었는데,
뜨거운 사랑 하나만으로 자기의 개인적 장애, 애인의 사회적 장애를 모두 극복한다.
심해어인 것은 쿠미코가 장애인이기 때문이 아닐 지도 모른다. 쿠미코는 심해어이길 선택한 것이다.
이것은 현재 일본사회를 상징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쿠미코가 심해어이길 선택했다면, 장애인이 아니면서 심해어이길 선택한 사람들도 많을 지 모른다. 별 행동반경이 넓지도 않고
아마 중소기업 판매직원으로 평생을 단조롭게 살아갈 츠네오는 심해어가 아닐까? 뭍에서 빛을 즐기다가 자기
심해로 돌아간 것은 쿠미코만이 아니다.
이런 이야기에 동화적이고 아름다운 화면을 부여하는 것은 어쩌면 감독이 만들어내는 역설일 지도 모른다.
이 동화적인 화면은, 빛도 소리도 없는 심해에서 살다가 뻐끔하고 수면 바깥을 내다보는 심해어에게 비친,
금방 지나가는 황홀이리라. 나는 쿠미코와 츠네오의 사랑이야기에 감동 받은 것은 아니지만,
이런 역설이 참 마음에 와 닿았다.
추천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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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츠네오가 울때 저또한 꺼억꺼억
좋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