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약국의 딸들 (1964) 유현목 감독의 걸작. 스포일러 있음.
김약국의 딸들은 원래 박경리 원작 소설인 것을 유현목 감독이 1963년 연출한 작품이다.
김약국이라는 통영의 지역 유지 집안이 어떻게 몰락해가는가를 그 집의 네 딸들의 삶을 통해 보여준 것이다.
굉장히 짙은 운명론적 비관주의를 풍기고 있다. 하지만 유현목 감독은 이 영화 안에 자기만의 철학적 성찰을 집어넣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영화사의 한 절경이다. 우리나라 영화사에서 자기의 철학적 성찰을 영화 안에 수준 높게 집어넣은
이가 유현목이다. 한국의 잉마르 베리만이라고 불리워야 한다.
영화 처음 시작은 박경리 원작과 다르지 않게 운명론으로 시작한다.
김약국 즉 딸들의 아버지 김성수는 저주를 타고 난 인물이다. 그 어머니가 간통 의심을 받고 자기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비상을 먹고 자살을 한다. 비상 먹고 죽은 사람은 귀신이 되어 집안에 달라붙어 저주를 내린다고 한다. 가족들은
자살한 김성수의 어머니를 무서워하고 미워한다. 김성수는 아무리 그래도 어머니인지라 그리워하고 슬퍼한다.
김성수는 큰아버지 재산을 물려받고 지역 유지가 되어 결혼까지 한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폐허가 되었던 자기 집으로
돌아온다. 그 폐허를 일으켜세워 김약국과 딸들이 사는 저택을 만든다. 그리고 통영의 유지가 되어 명문가를 만든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운명론은 여기서 다다. 각기 개성이 강한 딸들이 어떻게 삶을 선택하느냐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느냐가
이 영화의 주제다. 즉, 이 가문에 닥치는 불행은 운명 때문이 아니라 각 딸들의 삶의 방식의 선택 때문이다.
첫째 딸 용숙은 과부에다가 욕심이 많고 성욕도 강하다. 둘째딸 용빈이 자기는 받지 못한 고등교육을 받는 것을
시기한다. 길 가던 사람들이 돌아다볼 정도로 미인에다가 당시 일제시대 사람들이 생각도 못했을 비단으로 몸을 휘어감고 다니는
화려한 사람이다. 하지만 보수적인 사회분위기 속에서 재혼은 꿈도 못꾸고, 그러다 보니까 성욕 해결을 위해 불륜을 저지른다.
불륜이 들통난 다음에도 비난하는 마을사람들에게 대들 정도로 드세다. 그녀의 이런 성욕과 욕심은, 고리대금업에 뛰어듦으로써
해소된다. 누구보다 악착같은 성질머리와 독기로 고리대금업에서 성공한다. 일제시대 무너져가는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고등교육을 받아서 생각이 진보적이기에 이러는 것이 아니다. 무식하기에 사회가 변화하여가는 것을 민감하게 포착하고
거기 대응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고리대금업으로 성공한 이후 자길 억압했던 친정을 미워하고 등 돌린다.
둘째 딸 용빈은 전형적인 인텔리다. 당시로서는 생각도 못 할 고등교육을 받아서 통영의 탑 지식인들 사이에 낀다.
사실 용빈은 이 영화의 주제를 상징한다. 그녀는 자기 집안의 몰락을 바라보며 괴로워한다. 그녀가 지식인이라고 해도
당시 전통적인 수동적 여성 지위에 묶인 탓에, 바라보며 발만 동동 두를 뿐 뭐 하나 하지 못한다. 하지만
용빈은 영화 마지막 모든것을 잃고 몰락한 집안을 바라보며 "철학적 극복"을 한다. 첫째 용숙처럼 물질적 극복을 하는 것이 아니다.
집안의 몰락과 주변 가족들의 몰락은 괴로워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겪는 삶의 보편적 상황이다.
인간은 이것을 견디고 이겨내는 과정에서 행복을 가질 수 있다. 마지막에 용빈은 세간살이마저 다 날릴 정도로 망한 집안을 떠나
서울로 가려고 한다. 그러다가 이런 깨달음을 얻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그녀는 운명에 도전하며 집으로 돌아간다는 선택을 하면서 참다운 행복을 느낀다.
셋째 용란은 당시 사회는 물론 지금 사회에서도 비난 받을 쾌락주의자다. 1960년대로서는 충격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
아마 당시 김약국 딸들 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고 논쟁젹인 인물이었을 듯하다. 배우 최지희가 80대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소개글이 김약국 셋째딸이었을 정도니까. 최지희는 당시로서는 드문 요녀 이미지로 이름을 날린 배우다.
요염하고 쾌락주의적이고 상대방을 쏘아보는 강렬하고 의지적인 인물에다가 서구적인 섹시미를 갖춘 여배우다 (실제 인물이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용란은 쾌락주의자이고 당시 사회에 반하게 적극적으로 도덕따위는 버리고 성적 쾌락을 추구한다.
그녀의 비극은, 무식한 탓에 사회규범에 도전할 생각은 못한다. 사회 규범의 억압을 받아들이면서도 규범에 반하는 섹X를 적극 추구했으니 비극은 여기서 잉태한 셈이다. 결혼해서도 마찬가지다. 수동적인 현모양처라는 자기 지위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동시에 성적으로
쾌락을 추구해서, 자길 만족시키지 못하는 남편을 병신 취급해서 무시하고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지른다. 이것도 대놓고
남들 신경 안 쓰고 저지른다. 그러다가 남편은 급기야 살인을 저지르고 용란은 미치고 만다. 사실 다 용란의 자업자득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용란의 자의식을 억압한 사회구조가 원인이다. 용란은 적극적으로 이것을 극복하려고 시도하지 않은 죄다.
용란이 무식하지 않았다면, 아마 이런 결혼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했다손 치더라도 이혼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자기 비극도 남편 비극도 다 피했을 것이다.
넷째 용옥은 수동적인 현모양처 스타일이고 적극적 자의식도 없다. 그냥 남편에게 수동적으로 순종하는 스타일이다. 그러자 사회의 여성에 대한 억압이 한 몸에 닥쳐온다. 남편은 구박하고, 남편이 없는 사이 시아버지의 성추행도 받는다. 용옥은 그 어느것에도 대항할 생각을 못하고 그저 참으며 눈물만 훔친다. 원래 성실했던 남편이 제 정신을 차리자 수동적으로 여인의 행복을 얻는다.
보다시피 김약국 몰락은 운명 때문이 아니다 딸들 개인의 선택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선택은 사회구조와 상호작용을 한다.
영화 마지막에 딸들은 흩어지고 남는 것은 용빈의 철학적인 운명의 극복 그리고 김약국 집안에는 행복이 깃들 것이라는
긍정적인 암시다. 철학적인 작품을 만들었던 유현목 감독다운 결말이다. 물질적 극복을 했던 용숙은 사라진다. 셋째 용란은 남편의 비극 이후 미쳐 버려서 방황하다가 사고로 죽는다. 유현목 감독은 당시로서는 진보적 시각을 가졌던 듯하다.
사회규범에 반하다가 죽은 용란의 비극을 장엄한 영웅적 죽음 혹은 장엄한 희생으로 표현한다. 용란 캐릭터도 가장 화려한 캐릭터고
최지희도 자기 스타일을 화려하게 과시하여 일생일대의 연기를 해냈다.
하지만 용빈이 무슨 적극적인 인물로 표현되지는 않은 한계가 있다. 자기는 적극적인 철학적 운명 극복을 해냈지만
그 극복은 누군가 가르쳐준 것이다. 바로 독립운동이라는 당시로서는 굉장히 고통 받는 길을 택한 젊은이다.
그는 용빈은 닿지도 못할 정도로 아득히 높은 철학적 의지적 인물이다. 용빈은 적극적이라기보다 소극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독립운동가를 만나기 전에는 운명 극복의 실마리를 잡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가장 비중이 높은 인물이 딸들의 어머니 황정순이다. 용빈은 그냥 괴로워나 하지,
황정순은 딸들을 찾아다니면서 그 불행이 닥쳐오는 것을 막으려 한다. 하지만 전통적인 여성상에다가 무식한 황정순이
막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녀는 성황당에다가 기도하고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철학적 극복이나 적극적인 운명에의
대항같은 것을 꿈도 못꾼다. 사회억압을 받는 여성이 겪는 수난을 한 몸으로 받는, 왜곡적인 사회구조의 모순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나중에는, 셋째 용란의 남편이 자기 아내 불륜을 알고 낫으로 죽이려는 것을,
대신 가로막고 죽임을 당한다. 죽음까지 자기 죽음을 맞지 못하고 남의 죽음을 대신 죽은 것이다.
가부장 김약국은 굉장히 우유부단한 인물이다. 당시 사회분위기같으면 가족들의 불행을 묵묵히 짊어지고 모든 괴로움을 떠안으면서도
묵묵하게 가정의 기둥이 되어주는 인물을 그렸어야 했다. 하지만 우유부단하고 가문의 몰락에서 도피하려고만 하는
수동적이고 비관적인 인물이 김약국이다. 이 모든 비극은 가부장이 자기 지위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가부장으로서의 책임에서
도피하여 수수방관했던 김약국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변화하여 가는 가부장의 지위를 상징하는 것일까?
이렇게 페미니즘, 운명론, 실존주의를 다 집어넣어 장대한 가족드라마를 만든 것이 이 영화다. 그러면서도
추상적이거나 개념적인 영화가 아니라 인물 각각의 개성이 살아숨쉬는 생생한 영화를 만들어냈으니 놀라울 뿐이다.
난 성공한 영화에는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물 각각의 개성이 살아숨쉬고,
이 개성에 따라 사건이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것 말이다.
당시로서는 충격적이었을 최지희의 쾌락주의적이고 섹X에 탐닉하는 일탈적인 여성의 비극,
당시로서는 수준 높은 철학적 해결, 당시 만연했을 운명론을 적극적으로 철학적으로 극복하는 결말 (이는 당시 추진동력을 얻고 있던
근대화의 바람을 반영하거나, 이 근대화에 사상적 기반을 주는 것일 수 있다)
당시로서는 민감한 문제였을, 질곡적인 사회구조가 어떻게 여성의 자연스러운 욕구를 막고 파멸로 이르는지 하는 날카로운 지적.
이것을 "추상적인 개념의 드라마화"가 아니라 "생생한 인물들의 자연스러운 사건 전개에 따른, 관객들이 수긍하고 감정이입할 수 있는
비극"으로 승화시킨 것이 이 영화다.
P.S. 내가 본 우리나라 영화 가장 심오한 대사가 나온다. 바로 철학적인 용빈의 대사인데, 자기 동생 용란에 대한 이야기다.
"용란은 내가 알아요. 걔는 순수한 욕망의 덩어리죠. 자기 욕망 외에 다른 것은 신경 안써요.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걔는
괴로움을 느끼지 않아요. 하지만 가족들은 걔의 욕망의 결과 때문에 괴로워하죠. 왜 욕망의 덩어리는 괴로움을 안 느끼고 자기 반성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은 괴로움을 느껴야 하죠?" 뭐 이런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영화 마지막에서
용빈은 깨닫는다. 이런 질문을 영화를 통해서 심각하면서도 예술적으로 추구할 수 있었던 감독이 몇이나 될까?
유현목감독이 우리 영화사에서 유니크한 감독인 이유다.
추천인 7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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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는 있었는데, 우리나라에는 없었죠. 이 영화는 충분히 세계에 내놓을 만한 작품입니다. 지금 영화에는 없는,1960년대 영화 특유의 묵직함과 본질을 찌르는 무거움이 있습니다.
이 영화에도 검열이 나옵니다. 남녀가 애정표현을 하려고 하면 갑자기 뚝 끊기고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그래도 당시 수준으로는 충격적이었을 장면들이 남아 있는 것도 신기합니다. 최지희가 밤에 몰래 남자를 만나러 나갈 때 팬티를 벗고 간다든지 남자와 둘이서 산 속에서 뒤엉켜 있는 장면 등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이었을 것 같습니다.
암시만 하고 뚝 끊기고 넘어갑니다. 하지만 용빈은 적극적인 인물이라 이를 당당하게 거부하지요. 남자도 사과하고 그냥
그만둡니다. 첫째딸 과부가 된 용숙이 자기 아들 병을 고치러 온 의사와 불륜을 저지르던 장면도
암시만 하고 (흐트러진 이불) 넘어갑니다. 넷째 용옥은 시아버지에게 강간당할 뻔한 장면도 나옵니다.
이거 요즘 보아도 수위가 세지요. 그걸 1963년에 만들었으니.
볼 기회는 적지만, 이렇게 글로 '볼수 '있어서 좋네요.
어머니역의 황정순님 영화는 제법 봤었는데.. 이영화에서도 좋은 연기를 했을거라 짐작합니다.
좋은 영화 소개해줘서 감사해요~
덕분에 잘 볼께요~^^
유튜브에 복원된 영상이 있네요.
제목만 들어봤는데, 꼭 챙겨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