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있는리뷰] 헌트 - 알고 보면 찐악당은 따로 있는 이야기
헌트는 제 개인적인 예상을 깨나 벗어난 영화였습니다.
일단 텐트폴 영화라 불리지만 감독으로선 신인인 이정재의 장편데뷔인데다 실재 역사를 배경으로 한 첩보물이니만큼 작품의 스케일이나 액션에 있어서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영화 전반에 걸쳐 상당한 분량의 액션이 규모있게 삽입되어 흥미를 돋웁니다.
더불어 첩보영화로서 미덕도 상당해서 역사에 걸친 있을 법한 가상의 사건들이 매우 복잡하고 치밀하게 구성되어 한 시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각 잡고 보지 않으면 중요한 정보를 놓쳐서 이야기를 제대로 쫒아가지 못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거든요.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중후반에 밝혀지는 ‘동림’의 실체와 그에 관련된 두 주인공의 진실이었습니다.
이야기의 굵은 중심은 첩보 조직 안에 스파이가 있고 그를 밝혀야 하는 두 세력의 갈등이라는 상당히 진부한 소재인데 이런 경우 관객은 영화가 던져주는 단서를 토대로 누가 스파이일지 추리하는 데에 집중하게 됩니다. 때문에 영화는 주요한 용의자들을 몇 던져주고 어느 쪽이든 진짜 스파이일 수 있는 설정을 짜야하는데 그러다 보면 왕왕 무리수를 던지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진범을 감추느라 다른 이에게도 의심할 법한 장면을 넣다보니 나중에 돌이켜보면 ‘그런데 A가 범인이면 B는 그때 왜 그렇게 행동한 거야?’라는 허점이 생기는 거죠.
하지만 ‘헌트’는 이 지점에서 아주 깔끔하면서 당시 시대상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법한 장치를 넣어요.
안기부 내에 진짜 북한 스파이 ‘동림’이 있고, 한편에선 쿠테타로 정권을 잡으며 국민을 학살한 독재자에 항거하는 군부세력이 따로 활동을 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몰랐던 상황을 만듭니다.
그렇다보니 용의자 A, B 모두 의심스런 행동을 각자의 이유로 저질렀던 것이고 나중에 진상을 알고서 돌이켜보면 그들의 행동이나 대사 하나하나가 다른 의미로 다가오며 핍진성을 갖추게 되는 것이죠.
이 과정에서 어떤 상황이 진상에 따라 새로이 읽히는 재미들이 곳곳에 숨어있어 재관람시 더욱 흥미로운 요소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개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고윤정이 연기한 조유정이 포장마차에서 술을 자작하며 이정재와 나누던 대사였는데요. 술에 살짝 취한 조유정이 박평호(이정재)를 손가락질 하며 이런 대사를 날립니다.
“독재자보다 나쁜 건, 독재자의 하수인이래요. (박평호를 손가락질 하며) 독재자의 하수인”
이게 진상을 모르고 처음 볼 때와 나중에 둘의 정체를 알고 다시 볼 적에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동시에 어느 쪽으로도 말이 되는 대사이기도 하고요 (기실 포장마차 장면의 대화 전체가 그렇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의 집권세력이 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독재세력이었다는 점을 다시금 환기시키는 장면이기도 하니 영화 전체 주제에도 착 들어맞기도 합니다.
처음 워싱턴의 암살 시도에서 그리고 이후 일본에서 망명 작전에서 두 인물의 행동도 실체를 알고서 다시 보면 새롭게 해석되는 대사와 행동들이 곳곳에 박혀있습니다.
그리고 인물들의 비밀이 모두 드러나고 펼쳐지는 마지막 태국에서의 클라이맥스에선 요란하게 이어지는 액션 가운데에서도 오롯이 두 인물의 행동과 심경 변화에 집중하게 되는데요. 남한의 군인은 대통령을 암살하려 하고 북한의 간첩은 그런 군인을 막아서며 암살대상을 보호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설득력 있고 긴박감 넘치게 풀어내는 방식이 매력적이었습니다.
더불어 혼자만의 해석이긴 했지만 둘의 행동 목적과 마지막 선택의 이유가 각자의 이름에 대입되는 느낌이었는데요. 이정재의 ‘박평호’는 평화와 비슷한 느낌이고 혹은 평화수호라는 한자를 줄인 느낌이기도 합니다. 남파간첩임에도 남북한 무고한 희생을 피할 평화로운 수단을 강변하는 그의 일갈을 떠올리게 하고요.
정우성의 ‘김정도’는 정도(正道), 즉 올바른길 이란 의미로 스스로 생각하는 옳은 길을 위하여 동료는 물론 자신의 목숨도 내던지는 인물을 설명하는 이름처럼 다가왔습니다.
복잡한 설정과 이야기를 힘을 잃지 않고 설득력있게 막판까지 밀어붙였다곤 했지만 곱씹어보고 재관람을 하게 되면서 같은 이유로 곳곳에 헛점들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영화에선 대충 수습되는 것으로 진행되지만 두 인물이 저지른 상황들이 워낙 버라이어티해서 그렇게 쉽사리 마무리될 수가 없어 보이거든요.
'동림'을 엉뚱한 인물로 지목한 이후에 벌어졌을 상황도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허성태가 연기한 정철성이 연인도 가족도 없이 홀로 사는 사람이었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사돈에 팔촌까지 싸그리 끌려가 억울한 누명을 덤터기 썻을테니까요.
(에필로그에 나오는 정우성 와이프의 장면... 그렇게 아름답게 끝났을 리가 있겠습니까)
또 전혜진의 방주경 캐릭터의 죽음은 또 어떻게 해명을 했었을까요?
이런 부분들을 깊이 생각하다보면 턱턱 걸린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영화 보는 동안에는 크게 걸리지 않게 밀고나가는 연출 자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잔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한국 현대사라는 배경을 십분 활용함과 동시에 인물의 서사를 제대로 막판까지 끌고가는 훌륭한 첩보물이었습니다.
실재 역사에 크게 기대어 만들어진 첩보물(남산의 부장들)이나 아예 상상력에만 의존한 현대극(강철비)은 있었어도
이렇게 아슬아슬한 균형을 맞춘 대체역사물로 진중한 호소력까지 갖춘 작품이라니 기존에 없던 기획이라 할 만 합니다.
더불어 액션의 비중이나 연출에서도 수준급인 작품이니 추천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입니다.
+
카메오, 우정출연, 특별출연.. 뭐가 되었든 대한민국 스타급 주조연이 대거 등장합니다.
심지어 개봉 전까지는 대부분 공개되지 않은 라인업이라 보는 사이사이 관객들이 놀라는 반응이 재밌었습니다. 특히 일본 망명작전에서 주지훈과 조우진, 전투기 망명의 황정민, 이정재 회상씬의 이성민 등에서 가장 크게 반응을 보였고요. 그와 별개로 후반부에 처음 나와 에필로그까지 등장하는 무명의 북한 공작원은 최근 드라마 때문인지 동급의 반응들을 보여주더군요
(쑥덕쑥덕, 저 사람... 그거 아니야? 우영우에... 수군수군)
++
여타 한국영화처럼 이 작품도 대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얘기들이 나오는데, 개인적으론 2회차 때엔 한국어 대사는 9할 이상 들렸던 것 같습니다. 다만 CIA아시아 지부장의 대사는 정말 주위를 기울여야 온전히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라서 해당인물 대사라도 자막을 넣어줬으면 어땠을까 싶더군요. 하지만 해당 장면의 설정상 영어로 대화를 나눴어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임에도 한국어로 대화하는 연출 자체는 좋았습니다. 한국어로 편안하게 의사소통 되는 정도의 인물이어야 그 자리에서 제 몫을 할 수 있었을 테니.
+++
당시 한국의 시대상황을 아예 모르는 사람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이 곳곳에 있는 터라 장벽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칸에서 공개된 이후 평가가 박했던 것에는 이런 부분도 한 몫 했을 것 같은데요.
예컨데 '10.26 사건1과 이후 '광주민주화운동'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알지 못한다면
박평호와 김정도의 관계, 그리고 김정도의 실체와 관련된 그의 선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만큼 인물의 행동에 공감하기 힘들 수 있겠구나 싶더군요.
추천인 40
댓글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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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하긴 전 재관람 하면서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으니까요.
인물들의 생각과 감정만 따라가도 벅찰 지경의 작품이죠.
끄덕끄덕 ^^b
그렇게 지지 않고 버티면 전기로 지지지~ / 이 분 입니다. ㅎ
아... 그런 부분이 아니라요. 예컨데 김정도 집에 초대받아 갔다가 예전 사연을 털어놓는 장면 같은 거요. 우리야 '아, 박통을 죽인 게 중정부장 김재규였으니 그 라인들 모조리 조사 받았을 것이고 거기에 박평호가 있었겠구나. 김정도가 보안사 출신이니 취조를 맡았을 테고.'가 별다른 설명 없이 딱 박히잖아요. 어떤 입장일지 분위기였을지. 김정도가 결심을 굳혔을 광주 장면도 우리는 화면에 보여주거나 나중에 그의 입을 빌어 설명한 것 이상으로 당시의 참상을 알기에 인물의 감정을 미뤄 짐작할 수 있지만 그걸 모르는 외국인은 막연하게 '독재자가 시민을 쐈는데 도구로 이용당했구나'라는 표상적인 느낌만 알테니까요.
조유정의 대사는 올려주신 글을 안봤다면 2차 관람을 해도 그 이중적인 의미를 눈치 채지 못했을거 같네요 ㄷㄷ
좋은 글 잘 봤습니다. 꼭 다 죽어야 했냐? 라는 의견도 있는데....
거기에 대한 답을 적어주셨네요. 주인공들은 살아남기에는 너무나 많은 죄를 저질렀죠.
죄 없는 사람들 죽이고, 고문하고, 누명 씌우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