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선언] 간략후기
익무의 은혜에 힘입어 한재림 감독의 신작 영화 <비상선언>을 최초 일반 시사회로 개봉 전 미리 보았습니다.
각자 단독 주연을 너끈히 맡고도 남을 배우들이 한 자리에 모인 초호화 캐스팅으로도 제작 단계부터
화제를 모은 영화였지만, 한편으로 장르에 비해 유독 호화로운 캐스팅이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했었습니다.
비행기 재난 영화가 아주 신선한 시도인 것도 아닌데 이 명배우들이 어째서 한 데 모였을까 하는 궁금증에서 말이죠.
하지만 영화를 본 결과 <비상선언>은 쟁쟁한 배우들이 능히 모여들 만한 위력을 지닌 영화였습니다.
재난 장르물을 넘어 재난에 관한 영화로서, 나아가 재난 위에 선 인간에 관한 영화로서 그 힘은 기대보다 더 강했습니다.
하와이 호놀룰루로 향하는 비행기 KI501편이 승객과 승무원 등 150명의 인원을 태우고 인천공항을 출발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비행기에 탄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겠다는 의도를 품은 테러리스트도 여기에 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랜 경력의 형사 팀장 인호(송강호)는 누군가 자신이 비행기에서 테러를 벌일 것이라 예고하는 영상에 대한 제보를 받고
영상 속 인물의 흔적을 쫓던 중, 그가 이 호놀룰루행 KI501편 비행기에 탑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한편 이 비행기에는 딸의 아토피를 치료하기 위해 비행 공포증을 무릅쓰고 비행기에 몸을 실은 재혁(이병헌)도 있는데요,
그는 공항에서부터 심기에 거슬리는 말을 하던 진석(임시완)이 같은 비행기에 탔음을 알고는 계속 신경이 쓰입니다.
그렇게 출발한 비행기에서 갑작스럽게 원인불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테러리스트의 계략대로
비행기는 순식간에 하늘을 나는 시한폭탄이 되어 승객들이 공포에 떠는 현장으로 뒤바뀝니다.
공중에 고립된 비행기 안 사람들이 분투하는 가운데, 국토부 장관 숙희(전도연)를 필두로 한 땅 위의 사람들도
더 큰 테러로 번지기 전에 비행기를 착륙시키고자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나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합니다.
<비상선언>을 보면서 가장 먼저 인상에 남았던 것은 이야기가 철저히 재난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점이었습니다.
타임라인은 의도적인 재배치 없이 재난 전-재난 중-재난 후가 정직하게 분배되어 구성되어 있고,
그 안에서 재난에 휩싸인 사람들, 재난을 저지른 사람, 재난에 맞서는 사람들, 재난의 진실을 밝히는 사람들 등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함에도 그들의 서사는 당장에 펼쳐진 재난을 통해 설명될 뿐 흔한 플래시백 하나 등장하지 않습니다.
비행기 기내 테러라는 설정으로 스펙터클에 대한 욕심을 낼 법도 하건만, 영화는 장쾌한 볼거리를 보여주겠다는 야심보다
재난이 어떻게 작동하고 거기에 휘말린 사람들이 어떤 선택에 직면하며 어떤 선택을 결행하는지 낱낱이 보여주겠다는 야심을 펼칩니다.
재난의 모든 인과관계를 이렇게 세세하게 다룬 재난영화는 한국에선 물론 할리우드에서도 좀처럼 본 적 없는 듯 합니다.
장편 데뷔작 <연애의 목적>부터 최근작 <더 킹>까지 한재림 감독의 영화에는 유머의 함량이 일정 부분 차지해 왔습니다만,
이번 <비상선언>에서는 유머를 최소화한 채 그의 작품들 중 가장 짧은 시간동안 일어나는 이야기를 가장 세세하게 들여다 보며
연애나 정치, 권력 등 다양한 주제에 투영해 온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이번에는 재난이라는 주제를 통해 풀어냅니다.
하나의 재난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위치와 상황에 놓인 인물들이 얽혀 있습니다.
재난의 진상을 밝혀내야 하지만 마냥 제삼자의 입장에 설 수만은 없는 입장에 처한 베테랑 형사,
딸을 지키기 위해 재난에 맞서야 하지만 그 전에 내면의 두려움부터 극복해야 하는 아버지,
국민의 생명을 구해야 하지만 그보다 대의를 생각하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음을 깨닫게 되는 정부 관료,
직업적 소명과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두려움 사이에서 갈등하는 파일럿과 승무원들까지,
영화가 그 명분과 입장을 굳이 이해하려 들지 않는 유일한 인물은 재난을 일으킨 테러리스트 뿐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자연재해도 아닌데, 철저히 인간의 의지에 따라 불시에 불가항력적으로 들이닥친 재난 앞에서
이처럼 각기 다른 위치에 있는 이들이 마주하는 인간으로서의 윤리와 도덕, 책임과 욕망, 이타심과 이기심의 문제가 교차합니다.
그 이슈들의 스펙트럼이 넓다 보니 2시간 20분의 만만치 않은 러닝타임 속에서 템포가 꽤 변화무쌍하게 바뀌기도 합니다.
재난 상황의 긴장감과 눈물을 자아낼 만한 갈등이 교차하고,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가나' 싶게 전개에 다소의 비약이 작용하기도 하죠.
그러나 재난과 인간의 A부터 Z까지를 보여주려는 영화의 의도를 염두에 두니 어느 정도 참작할 만 했습니다.
극한의 재난 상황 앞에서도 인간의 사명과 도리, 욕망과 이해는 충돌하게 마련이고 그로 인해 매 순간 쉬운 때는 없을 것임을,
때문에 한정된 시간 안에서 비약으로 다가올지라도 그 모든 어려운 순간들을 지켜보는 게 의미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죠.
영화는 누군가를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과장된 위기를 부여하지도, 사회적 공분을 일으키기 위해 앞장서 흥분하지도 않은 채
직면할 만한 상황, 일어날 만한 갈등, 품을 만한 고민을 거쳐 그럼에도 인간이자 직업인으로서의 선택을 결행하는
이들의 모습에 도달하며 재난 앞에 나약하면서 동시에 강인한 인간을 발견케 하는 감동을 자아냅니다.
이쯤 되니 아주 특출나게 신선하진 않은 재난영화 같았던 이 영화에 왜 이렇게 쟁쟁한 배우들이 모여들었는지 짐작이 됩니다.
모두가 각기 다른 위치에서 자기의 역할을 수행하는 보통의 사회 구성원들이지만 저마다 분명한 신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죠.
베테랑 형사 팀장 인호 역의 송강호 배우는 힘을 뺀 예의 생활 연기 속에서도 경찰이자 가장으로서의 투철한 의지를
거창한 다짐이나 선언이 아니라도 당연한 도리인 듯 피력하는 그의 모습은 보통의 인간애를 지닌 소시민으로서 신뢰감을 줍니다.
딸을 둔 아버지 재혁 역의 이병헌 배우 역시 명불허전의 생활 연기를 보여주는데, 딸 앞에서는 든든한 아버지이고 싶으나
내면의 두려움 앞에 쩔쩔 매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소심함이 심적 성장 이후 비장함으로 변화하는 과정에 설득력을 부여합니다.
아주 눈에 띄거나 하지 않아도 자기 자리에서 주어진 사명에 침착히 최선을 다하는 이들의 모습을 믿음직하게 보여주는,
국토부 장관 숙희 역의 전도연 배우와 부기장 파일럿 현수 역의 김남길 배우 또한 영화에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더불어 테러리스트 진석을 연기한 임시완 배우의 '돌아 있는' 연기는 첫 등장부터 신경을 곤두세우게 할 만큼 대단했는데요,
영화의 극적 전개를 위해 과장되게 그려진 빌런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누군가 이처럼 뱀같이 스며들어 누비고 있을 것만 같은,
이해할 수 없는 증오와 반항심으로 똘똘 뭉친 자의 얼굴과 말과 행동을 실감나게 구현했습니다.
한재림 감독은 이 이야기의 구상을 예전부터 해왔다고 하지만, <비상선언>을 보면서 대부분의 관객들은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이미 현실에서 최근 몇년 간 지나 온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거대한 재난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오락영화로서의 즐거움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야기와 볼거리를 압축하거나 재구성하지 않고 과정 하나하나 다 짚어가는
영화의 태도 때문에 더 그러할텐데, 때문에 그저 팝콘 무비로 즐기기만 하면 그만인 영화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재난을 일으키는 존재이자 동시에 극복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한계와 희망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재난 앞 인간에 관한 백서와 같은 영화로서 <비상선언>은 여름 텐트폴 영화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작품입니다.
익무 덕에 좋은 영화 잘 보았습니다.
아래는 무대인사 사진입니다.
추천인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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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러고보니 플래시백이 없었던 것 같아요.
정말 거의 실시간으로 재난에만 집중한 영화였습니다.
완벽한타인 무대인사 예매성공했을때 너무 기뻤는데
딱 그 기분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