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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머니' - 21세기 정지영

수위아저씨
1204 2 2

movie_image (20).jpg

 

영화는 거대 자본을 필요로 하는 창작활동이다. 때문에 영화에는 자본의 힘이 중요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전세계 영화시장에서 통용되는 원리지만 한국의 영화시장에는 유독 크게 작용한다. 영화판에서 자본의 힘이 유난히 커진 원인은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으로 이어진다. 1999년 강제규 감독의 '쉬리'를 기점으로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가능성이 제기됐다. 2002년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과도기를 거쳤지만 2003년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시기가 찾아오고 봉준호, 박찬욱, 김지운 등 아카데미 출신 감독들이 메인으로 자리잡게 된다. 2003년은 '르네상스'라는 뜻에 걸맞게 새로운 세대들이 등장해 시장의 주류를 이룬 시기다. 그와 동시에 20세기 영화감독들의 퇴장을 알린 시기기도 했다. 

 

정지영 감독은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기에 퇴장한 20세기 영화감독이다. 이명세, 배창호, 강우석, 김유진, 장길수, 김홍준, 박종원, 장선우, 박광수 등 20세기 영화감독들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했으나 1998년 '까' 이후 그는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르네상스 시기를 거친 20세기 감독들은 정지영 감독처럼 완전한 퇴장을 하진 않았다. 그들은 대체로 2010년 이전까지 영화를 만들어왔다. 다만 변해버린 관객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해 그들 대부분은 지금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졌다. 정지영 감독은 그런 과도기를 거치지 않고 완벽하게 사라진 셈이다. 그렇다고 그가 두문불출한 것은 아니다. 학교로 돌아가 젊은 영화감독들을 양성하는 활동을 했고 변방에서 영화 만드는 후배들을 위한 '어른'의 역할을 했다. 

 

정지영 감독이 2011년 만든 영화 '부러진 화살'은 무려 12년만에 나온 그의 신작이다. 2007년 김명호 교수의 석궁테러 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 영화는 튼튼한 이야기를 우직하게 담아내며 메시지를 명확하게 한다. 이후 그가 만든 '남영동 1985'나 '블랙머니' 모두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영화적 재미를 놓치지 않는 잘 만든 영화다. 이것은 "세련됐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잘 만든 영화인 것은 명확했다. 기호와 상징으로 관객을 혼란에 빠뜨리거나 적극적인 해석을 유도하진 않지만 필요한 말만 건네는 간결한 전개는 젊은 영화감독들의 '겉멋'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정지영 감독이 20세기에 만들던 영화들도 그랬다. ('까'는 조금 이채로운 작품이었지만) 그의 대표작인 '남부군', '하얀 전쟁',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극영화의 가장 기초적인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여전히 '까'를 만들던 그의 심정이 궁금하긴 하다). '20세기의 정지영'은 이야기꾼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 진중하고 무거운 이야기를 성실하게 전달하는 사람이었으며 그것을 통해 역사와 그 속의 인간을 섬세하게 담아냈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도 있었지만 그의 20세기 영화들은 한 편의 문학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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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1세기의 정지영'은 분명 다르다. 그가 만든 세 작품은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며 부조리한 거대 권력을 향해 문제를 제기한다. '부러진 화살'은 부조리한 법 권력을 향한 문제제기였으며 '남영동 1985'는 '부조리의 최고봉'이었던 남영동 대공분실과 그것을 조종한 군사독재정권을 향한 문제 제기다. 그리고 '블랙머니'는 국가와 국민의 재산을 좌지우지하는 엘리트 금융권력을 향한 문제제기다. 여전히 그는 '성실한 이야기꾼'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분명 태도는 달라졌다. 그의 영화는 더 날카로워졌고 뜨거워졌다. 이쯤 되면 "대체 지난 10여년새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라는 의심을 하게 된다. 

 

정지영 감독이 갑자기 '늙은 투사'가 된 데 대해 나는 그의 세 영화 속 주인공을 주목하기로 했다. '부러진 화살'의 실제 주인공인 김명호 교수는 1957년생으로 1946년생인 정지영 감독과 동시대를 산 사람이다(1990년대 그와 함께 한국영화의 중심이 됐던 감독들은 대부분 1950년대생이다). '남영동 1985'의 실제 모델이었던 김근태 전 장관은 1947년생이다. 거의 동년배나 다름이 없다. '부러진 화살'과 '남영동 1985', '블랙머니'의 포스터에는 비장한 표정의 사내가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감독은 영화 속 김경호 교수(안성기)나 김종태(박원상)의 시선으로 아주 깊게 파고든다. 그 시대들 모두 자신이 관통한 시대이며 자신을 영화에 투영한 것이다. 이것은 흡사 "라떼는 말이야"류의 발언이 될 수 있지만 그 "라떼는 말이야"가 쉽게 넘길 수 없는 중요하고 묵직한 이야기다. 

 

'블랙머니'는 사실 앞선 두 영화와 맥락이 다르다. 이 영화는 종결된 이야기가 아니며 현재진행 중인 이야기다. 김명호 교수는 2011년 형량을 모두 채우고 출소했다. 김근태 전 상임고문도 2011년 숨을 거뒀다. 그러나 '블랙머니'는 론스타가 제기한 투자자-국가간 소송(ISD)이 아직 진행 중이다. 그리고 '블랙머니'는 론스타 사건이라는 모티브를 제외한다면 모두 픽션이다. 감독은 처음으로 사건을 겪은 인물이 아닌 사건 그 자체에 집중한 셈이다. 당연히 양민혁 검사(조진웅)도 그와 동시대의 사람이 아니다. 여기서 특이할 점은 2011~2012년으로 이어지는 시기다. 한 사람은 2011년에 출소했고 한 사람은 2011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정지영 감독은 2011년에 영화를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블랙머니'의 배경은 2011년이다. 무엇보다 '블랙머니'는 2012년 '남영동 1985'가 개봉한 후 7년만에 나온 장편영화다. 그에게 2011년(혹은 그로부터 1~2년전)은 아주 특별한 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때 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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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이후 등장한 정지영 감독의 영화 세 편의 공통된 키워드는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분노'다. '부러진 화살'은 부조리에 분노해 석궁을 든 교수의 이야기였고 '남영동 1985'는 영화를 보는 관객이 분노하도록 지나칠 정도로 생생하게 남영동 대공분실과 고문현장을 묘사했다. 그리고 '블랙머니'의 양민혁 검사는 대단히 화가 많다. 그의 화는 고스란히 영화를 보는 관객의 화로 이어진다.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정지영 감독은 지난 정권 때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그가 최근 다시 가졌던 7년의 공백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다만 그가 다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2011년은 '지난 정권 이전'의 일이다. 공식화 된 문화계 블랙리스트와는 무관했다. '前 前 정권'에 정지영 감독은 문화다양성포럼 공동대표이자 고려대 언론대학원 미디어학부 전문교수였다. 2011년은 '전 전 정권'의 절반이 지난 '말기'의 시점이다. 분명 그는 어떤 계기로 국가와 정부에 분노했을 것이다(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지 기술하진 않겠다. 이것은 어차피 '뇌피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다시 영화를 찍기로 했고 부조리와 억압을 담은 이야기를 스크린에 옮겼다. 그 결과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됐고 다시 영화판을 떠났을 것이다.

 

그가 다시 영화를 만들기로 했을 때 정권은 바뀌어 있었다. 이제는 그가 원하는 새로운 세상이 온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청산되지 않은 숙제(예를 들어 론스타 사건)가 많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청산돼야 할 부조리가 여전히 많다. 그래서 지금 다시 꺼낸 이야기는 '현재진행형'의 사건인 것이다. 이 결론에 이르렀을 때 정지영 감독을 두고 "지나치게 정치색이 강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남영동 1985'만 봐도 그의 정치색은 명확하다. 게다가 직접 연출자로 나서진 않았지만 그는 '국정교과서 516일'이나 '천안함 프로젝트'의 제작자로 참여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자 '블랙머니', '부러진 화살', '남영동 1985'의 제작자인 정상민 아우라픽쳐스 대표는 '다이빙벨'의 프로듀서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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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는 조금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정치색이 명확하다"는 점은 창작자에게 독이 될 수 없다. 켄 로치나 코스타 가브라스 등 세계 영화계를 흔들던 거장들은 모두 명확한 정치적 노선을 가지고 있다. 더 이전에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 거장들도 마찬가지였으며 중국과 프랑스, 미국 등 세계 각국의 영화와 그것을 포함한 문화는 어떤 경우에 정치적 저항을 해왔다. 정지영 감독의 영화는 한국영화 중 가장 뚜렷한 정치적 저항이다. 이것은 격변의 시대 속에서 영화(와 그것을 만드는 사람)가 해야 할 역할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창작은 시대를 반영해야 한다. '기생충'이나 '벌새', '엑시트', '82년생 김지영', '생일', '우리집' 등. 좋은 영화는 시대의 단면을 반영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한다. 현대의 영화는 정지영 감독이 한창 때였던 1990년대보다 더 힘이 세다. 상영관은 더 많아졌고 인터넷과 SNS의 발달로 영화의 파급력은 더 넓어졌다. 어쩌면 영화는 과거보다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그런 시대에서 영화는 어떻게 자신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다 해야 할 것인가. 정지영 감독은 바로 그 지점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이것은 현재 한국영화계에서 가장 나이 든 현역감독이 후배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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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image 1등

마지막 문단;;;

첫 문장이 와닿습니다...

 

항상 '임팩트' 있는 리뷰...

 

감사합니다...^^#

 

 

 

 

04:01
1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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