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짐머, <인터스텔라> 음악은 "영상 없이" 작곡

영화와 음악의 관계는 때때로 예상 밖이다. 촬영된 영상을 바탕으로 음악이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음악이 먼저 완성되는 경우도 있다.
<다크 나이트> 3부작을 포함해 총 7편의 작품에서 함께 작업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과의 관계를 두고, 음악가 한스 짐머는 최근 Deadline과의 인터뷰에서 “생과 사의 문제 같았다”며 “우리 사이엔 늘 그런 긴장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처음 함께한 작품은 <배트맨 비긴즈>(2005)였다. 슈퍼히어로 영화 음악은 하고 싶지 않다며 여러 번 거절했던 짐머에게, 놀란 감독은 “고담시를 내려다보는 마천루 위에 선 배트맨 장면에 음악을 붙여달라”고 요청했다. 짐머가 “영상을 보여달라”고 하자, 놀란은 “불가능하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인터스텔라>(2014)에는 우주로 떠난 주인공 쿠퍼에게 지구에 남은 자녀들이 영상 편지를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매튜 맥커너히의 연기와 짐머의 음악이 더해져, 영화의 대표적인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이 장면조차도 짐머는 영상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작곡했다. 짐머는 “이렇게는 곡을 쓸 수 없다, 난 자유롭게 만드는 스타일이 아니고 영상이 필요하다고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놀란은 “우린 타이밍 감각이 같다고 생각하니 일단 해봐 달라. 만약 안 맞으면 그때 영상을 주겠다”고 설득했다.
놀란의 예상은 정확했다. 짐머의 곡은 놀랍도록 장면과 잘 맞아떨어졌고, 이는 놀란이 짐머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됐다.
<인터스텔라>의 메인 테마가 만들어진 과정도 인상적이다. 어느 날 파티 자리에서 영화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던 중, 놀란은 짐머에게 짧은 이야기 하나를 써주겠다며 어떤 음악이든 자유롭게 붙여달라고 부탁했다. 곧 도착한 편지는 두꺼운 종이에 타자기로 쳐진 글이었고, 내용은 아버지가 아이를 처음 가졌을 때 느끼는 감정에 관한 우화였다. 짐머는 “그 편지를 읽고, 아… 놀란이 나와 내 아들의 관계를 정말 잘 이해하고 있구나 느꼈다. 편지에는 자식을 처음 갖게 된 부모가 겪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없고, 늘 아이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보게 된다’는 내용이었다”라고 회상했다.
작곡을 마친 짐머는 놀란의 아내이자 프로듀서인 엠마 토머스에게 전화를 걸어 곡을 보낸다고 알렸다. 그러자 토머스는 “놀란이 왠지 불안해 보인다”며 곧바로 짐머의 집으로 향하게 했다. 짐머는 “그 자리에서 아들에게 보내는 덧없고 애틋한 러브레터 같은 곡을 연주했고, 놀란은 ‘지금 당장 이걸로 영화를 찍어야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당시 놀란은 아직 <인터스텔라>의 각본을 완성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짐머의 음악을 듣고 영화의 중심을 이해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게 탄생한 이 곡은 <인터스텔라>의 메인 테마가 되었고, 짐머 커리어를 대표하는 음악 중 하나로 남았다.
<배트맨 비긴즈> 당시에도, 놀란은 짐머에게 영상 없이 배트맨의 메인샷을 위한 곡을 작곡해 달라고 요청했다. 짐머는 이를 “감독이 음악에서 영감을 얻고자 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즉, 놀란은 항상 자신이 원하는 음악의 방향성과 목적을 명확히 갖고 있었던 셈이다.
이후 짐머는 <테넷>(2020)을 고사하고 <듄>(2021)을 선택하면서, 놀란과의 협업은 잠시 중단되었다. 하지만 현재도 두 사람은 “좋은 친구 사이”이며, 언제든 다시 함께 작업할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