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예정 <에니멀 킹덤> : 자연으로 돌아가라 [스포]
며칠 전에 하이라이트 초청으로 『애니멀 킹덤』을 시사회로 관람하고 왔다. 1월 22일 개봉 예정이다. 이 영화도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싶다. 이 영화는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프랑스 영화다. 제목을 직역하자면 '동물의 왕국'쯤이 될 것이고,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가 아니라는 점에서 여러 선입관을 가지기 십상이다. 어쩌면 나만의 선입견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말해도 상관없지만, 아무튼 이러한 나의 예상은 틀렸고, 또 좋은 방식으로 틀렸다.
이야기는 갑자기 인간이 동물로 변화하는 소위 '수인화'라는 현상[혹은 편협한 의미에서 질병]이 발생하는 가운데에서 시작한다. 주인공 에밀이라는 소년으로 그의 어머니 또한 수인화를 겪어 격리되었다. 이 이야기는 어머니가 격리되어 갇혀 있는 보호소가 있는 시골 마을에 아버지와 함께 떠나며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이러한 갈등은 인간과 수인화를 겪는 인간 사이의 대립, 혹은 그 격리를 찬성하는 집단과 그 격리를 반대하는 집단 사이의 대립이 있을 거라 기대하기 쉽다. 그러나 그러한 빈약한 상상력이 쉽게 그릴 수 있는 요소들을 슬기롭게 피해 간다. 편안하다고만은 할 수 없지만 필요 이상의 불편함보다는 보다 인간적인 차원의 감수성에 더 많이 집중하는 듯하다. 이 점이 좋았다.
영화는 프랑스 하면 떠오르는 예술 영화라기에는 대중적일 뿐만 아니라 풍부하다. 지루함 없이 이어지는 전개에, 가족 간의 사랑과, 인물 간에 펼쳐지는 드라마들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그러면서도 한국식의 신파라든가 할리우드에서 기대하는 전형적인 서사를 따르지도 않는다. '인간의 수인화'라는 소재를 다룸에 있어, 기괴하기도 하고 매력적인 분장들이 눈에 띈다. 특정한 주제의식으로 관객을 유도한다는 인상을 받을 수는 없지만, 그 안에서 여러 가지 교훈들을 끄집어낼 수도 있다. 이를테면 생태주의적인 메시지라든가, 로맨스, 한 인간의 성장과 가족 드라마들이 두루 녹아 있다. 그 안에서 '애니멀 킹덤'이라는 타이틀은, 이 영화를 관람하자면 더없이 적절하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지만, 애니멀 킹덤이 마치 디즈니 월드에 있는 어떤 어트렉션을 떠올리는 뉘앙스라면, 그런 것은 결코 아니라고 강조하고 싶다. 시각적으로는 강렬하고, 서사적으로는 감동적이며, 긴장감 가운데 유쾌함도 함께 있다. 인물들도 매력적이었다.
이하로는 작품의 분석보다는 주관적인 감상평이 포함되어 있다.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
1. 질병, 혹은 진화, 아니면 성장
이 영화는 상당히 균형이 잡혀 있기 때문에, 그저 즐기기에도 좋은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볼거리가 있고 감동이 있다. 많이 생각하지 않아도 따라갈 수 있고, 대사들도 영리하며, 부당한 사건이 아니었더라면 세상은 평화롭게 흘러갔으리라 짐작해 볼 수도 있다. 사악한 인간들이 세상을 망치거나 권력을 가진 악당들이 세상을 좌우하는 무대로 있지 않다. 다만, 잔잔한 세계에 수인화라는 겪어보지 않은 일이 펼쳐졌을 뿐이다. 그 점이 오히려 사람들이 동물로 변하는 사건을 더욱 슬프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안에서 여러 사람들은 동물로 변한 인간을 잡아넣는 현상들을 다각도로 독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소수자들을 배제하는 사회적 문제로 이해할 수도 있고, 동물들의 서식지를 파괴하여 격리하는 현상을 통해 생태주의적인 메시지를 끄집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그 어느 것에 있어서도 노골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오로지 인간 자체와 그를 에워싼 관계들에 더 많이 주목한다면, 조금 다른 것에 초점을 맞춰볼 수도 있다. 이를테면 주인공 에밀이 세상을 바라보며 성장하는 그런 방식 말이다. 그렇게 보자면 이 영화는 교육학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고, 한 인간의 성장 서사로도 이해할 수 있다. 나를 기억하지도 못하는 어머니가 있다. 내 얼굴에 상처를 낸 동물이 되어버린 어머니가 있다. 그를 두고 어떻게 그 사태를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소년이 있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소년의 마음 앞에서, 아버지는 변한 엄마를 여전히 사랑하고, 그녀와 함께 사는 삶을 꿈꾼다. 어떤 점에서 그런 흔들리지 않는 인물이야말로 비현실적이라 말할 법 하지만, 그런 사람의 존재는 어쨌건 앞으로 밀어 닥칠 에밀의 비극 앞에서도 뚜렷한 역할을 한다.
에밀은 어머니가 수용될 예정인 격리소가 있는 시골마을로 떠난다. 두 달이라는 단서조항을 붙이고서야 마지못해 떠나온 곳이지만, 아이의 아버지는 계속해서 소중한 것이 결여된 그 가정에 지속적으로 활기를 불어 넣는다. 수인들의 격리 보호소가 들어왔기에 조금은 불안정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기는 하지만, 또한 아름다운 곳이기도 한 그곳에서 에밀은 빠르게 친구를 사귄다. 호감이 가는 여자아이도 만난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조차 모를 엄마의 변화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정하지 못하는 에밀은 어떤 점에서는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애 앞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애송이에 불과하다.
그러니 어쩌면, 이 모든 오해와 갈팡질팡은 당연하다. 어른들도 알지 못하는 것을 에밀이 어찌 안다는 말인가? 아버지는 자신의 마음을 정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고 행위 하지만, 그 또한 마음 한구석에서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두고 갈등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아내에 대한 기억을 품어 여전히 그녀를 사랑한다 말하지만, 그런 사랑이 어떠한 형태여야 하는지 모른다. 나아가, 혼란을 겪는 아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어떻게 설득해야 하는지, 설득하기는 해야 하는지조차 모를 것이다. 그러한 차원에서 시작하자면, 마찬가지로 이 사회 전체는 갑작스레 발생한 수인화라는 현상에 대해서 준비되지 못했음에 틀림없다. 그들이 수인을 격리하는 이유는, 수인과 인간들 사이에 낯섦과 무지로 발생하는 갈등 사이에서 그들이 자신의 마을 사람들과 가족에게 상처를 입히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어쨌든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격리조치로부터 우리는 사회적인 메시지와 정치적 시사점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반대로, 어린 에밀의 갈팡질팡에서 보자면 그러한 혼란 안에서 한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가를 고민해보게 된다. 그 두드러진 메시지는 에밀 그 자신 또한 어머니와 같이 수인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드러난다. 어느 날 에밀은 자신의 손톱 밑에서 들짐승의 손톱과 같은 것이 돋아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2. 장 자크 루소의 『에밀』 : 자연으로 돌아가라
이러한 가운데에서 우리는 주인공의 이름이 '에밀'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이름으로부터 루소의 유명한 교육학적 저서 『에밀』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루소의 『에밀』은 아버지이자 스승을 자처하는 화자[루소]가 가공의 소년인 에밀을 교육하고 성장시키는 일화로 이루어진다. 어머니의 부재로 그녀를 찾으면서도, 아버지와 에밀 사이에서 벌어지는 관계 구도로 놓고 보자면, 주인공의 이름을 '에밀'로 설정한 것은 분명히 루소의 이 저작을 염두에 두었음에 틀림없다. 나아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자연주의 교육학의 유명한 메시지는, 수인화 과정 안에서 끝끝내 아버지의 손을 떠나 숲속으로 떠나는 그 마지막 모습과도 겹쳐진다.
『에밀』에서 드러나는 루소의 일관된 메시지는, 인간의 자연적 본성을 왜곡함 없이 보존하며 그것의 건전한 성숙을 꾀하는 것이다 :
"'자연'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막연하게 추정한다. 그러니 여기서 그 의미를 정확히 해 둘 필요가 있다. / 흔히 사람들은 자연을 습성이나 습관 같은 성향과 관련지어 생각하곤 한다. 예를 들어 나무는 수직으로 상승하고자 하는 욕구를 갖고 있다. 이것은 식물의 본성이어서 억압에 의하지 않는 한 그 자세를 잃지 않는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나무를 구부러뜨려 놓으면, 그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더라도 그 구부림의 흔적이 남는다. 하지만 이 흔적은 일시적일 뿐이다. 식물이 성장을 지속하는 한 그 본성은 다시 나무를 수직으로 자라게 한다. /인간의 성향 또한 비슷하다. (...) 인간은 그 어떤 존재보다 감수성이 풍부한 동물이므로 주변 사물들로부터 다양한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다. 감각을 통해 유불쾌를 분별하는가 하면 이성의 힘에 기초해 사리를 판단하기도 한다. 이러한 감각과 판단은 지식이 쌓이면서 더 확대되고 강화된다. 이러한 성향은 습관이라는 괴물에 의해 굳어지는가 하면 편견에 의해 변질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변질이 일어나기 전의 성향, 그것을 나는 우리 안에 있는 자연이라고 부른다." [에밀_13-14]
이러한 루소의 사상은, 인간을 정말로 동물로 키우라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모글리와 같은 소년처럼 키워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여전히 그는 부모이자 선생의 역할과 자식 사이의 관계, 그리고 훈육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 인간의 지성과 이성의 역할 또한 자연의 것으로 포섭한다.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본성, 혹은 그것을 분별하는 이성 또한 자연적이다. 다만 그러한 판단과 느낌에 동물적 정념이 방해가 되기도 하는 법이다. 양육자는 그것이 조화되도록 하여 자연적 본성을 바로잡도록 돕는 것이다. 그때 무엇이 자연적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아는 것이 어렵다는 문제가 남지만, 보다 분명한 사례들은 충분히 존재한다. 특히 영화를 보자면 루소의 메시지에 부합하는 두드러진 사례들은 충분히 등장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는 수인화의 상황을 뜸 들이지 않고 분명하게 보여주는데, 그것은 에밀과 그의 아버지가 엄마가 있는 병원으로 가는 길에 벌어진다. 앰뷸런스 안에서 반쯤 새의 모습을 한 사내가 탈출한다. 그의 팔 한 쪽은 날개로 변해 있었고, 얼굴은 이상한 붕대로 둘러싸여 있다. 후에 에밀은 그를 자신이 이사 간 마을의 숲에서 재회하게 되고, 그의 이름이 픽스라는 것을 알게 된다. 픽스의 얼굴이 붕대로 둘러싸여 있었던 것은, 그의 얼굴에서 돋아난 부리를 적출하여 원래 인간의 모습으로 만들려고 한 강제적인 판단 때문이었다. 그 결과 그의 얼굴은 흉측하게 난도질 되었다. 그 안에서 픽스는 가까스로 탈출해 비행 연습을 하고 있었다. 에밀은 픽스의 비행 연습을 돕는다. 수인화가 진행되던 에밀은 그 사실을 아버지에게도 숨기며 혼란을 겪지만, 픽스의 모습을 보면서 점차 자신을 받아들이게 된다. 변화하는 것은 막을 수 없는 것이고, 막으려 하니 오히려 그에게 해가 된다. 그에게는 이미 날개가 돋아났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비행하는 것이다. 후에 픽스는 수인 사냥에서 도망치는 에밀을 구하는 과정에서 총에 맞아 죽지만, 적어도 그는 그 자신으로 죽을 수 있었다.
그 안에서 잃는 것들이 있다. '온전한 시민이자 온전한 인간'으로의 성장을 도모하는 루소적 상상력으로는 도달하지 못하는 영역이다. 픽스는 나는 대신에 말하는 방법을 모르게 된다. 마찬가지로 이 모든 것이 지속되자면 에밀 또한 아버지와 더는 살지 못하게 될 것이며, 심지어는 아버지의 존재도 잊게 될 것이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었던 여자친구와 다시는 재회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두려워 아버지는 자신의 아이에게서 돋아나는 털을 밀고, 손톱을 자르려 시도한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성장을 방해하는 소극적인 노력을 압도하는 더 많은 감각들이 있다. 에밀의 귀는 밝아지고 후각은 예민해진다. 수 킬로미터 밖에서 자신을 향해 소리치는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어두운 밤 안에서 인간이었을 적에는 듣지 못했던 것을 들을 수 있게 된다. 결코 잃어서는 안 될 것을 잃어가며, 또한 자신의 방식으로 변화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알 수 없었던 것을 알게 된다. 풀벌레 울음소리와, 물이 흐르는 소리, 예민해진 감각을 가지고서는 어둔 밤이 무섭기는커녕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만 같은 감각과 같은 것들.
"살아간다는 것은 단지 목숨을 부지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신체 감관을 총동원해 자아를 느끼고, 가진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가장 오래 산 사람은 가장 나이 들어 죽은 사람이 아니라 인생을 잘 느끼다 죽은 사람이다." [에밀_20]
3. 그런 너를 네 존재방식으로 사랑하고, 그래서 나는 슬플 거야
"오, 에밀, 나의 아들이며 벗인 에밀이여, 너를 잃는다면 나에게 무엇이 남겠는가? 하지만 나 역시 언젠가는 너를 잃겠지." [에밀_349]
그러나 그 자연스러운 성장의 끝에서는 종종 무엇이 있는가? 가끔은 작별이 있다. 모든 것을 다 느끼기 위한 삶은, 그의 모든 능력을 바로 성장하도록 하는 데에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아이들은 결코 자연 앞에 있는 그대로 방치되어서는 안 되었다. 에밀이 끝끝내 숲으로 돌아가야만 했던 '원인'은 그가 요행이도 사랑받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랑으로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나를 할퀴어서 격리된 것 때문에 내가 미워?"라는 에밀의 물음에, "나는 네가 문법을 틀려서 미워."라고 아버지는 말한다. 가장 결정적인 어떤 것으로는 결코 자식을 미워하지 않고, 오직 사사로운 것으로만 미워한다는 그 대답은, 언제까지나 사랑하겠다는 간접적인 대답이다. 에밀의 변화가 시작되었을 때 그런 부모는 달아나려는 자식을 몸을 던져 붙잡고서는 끌어안았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여자애는 "나는 이미 알고 있었어"라고 말하며 두 손으로 등에 돋아난 털을 끌어안고서는 쓰다듬었다.
그러한 인정과 사랑이 있었겠기에 자신을 미워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준다. 그렇기에 삶의 손길은 또한 인위로의 억압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의 성장을 위한 발판이 된다. 슬프게도 그러한 방식을 통해 한 사람의 자연적 본성은 온전하게 자랄 뿐만 아니라, 극단적으로 자란다. 일찍이 에밀이 그런 사랑을 받기는커녕 억압되었더라면 진즉에 배제되고 격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에밀을 에워싼 이들은 에밀에게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 결과 이별을 향해 한 발짝 나아간다.
그런 부모조차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털을 밀어 손톱 깎기를 강제하는 이유는, 변화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작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작별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 자신으로서 살아갈 수 없는 미래일 것이다. 아버지는 경찰을 따돌리고, 에밀과 함께 차를 몰아 숲으로 이어지는 길의 끝으로 달린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살게 하고, 따라서 나 또한 사랑하는 사람을 살게 하고 싶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함께 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러나 사랑하겠기에 그가 살 수 있는 곳으로 방생한다. 그 대가로 사람들은 슬프다.
4. 더 먼 곳의 상상력
우리 자연적 본성에 따른 삶과, 그 삶의 끝에 놓여 있던 이별의 소이연을 이해한 뒤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자연적 본성으로 산 뒤에도 작별하지 않을 가능성이다. 그들에게는 '숲'아니면 '수용소'가 있었을 따름이다. '숲'아니면 '사살'이 있었을 따름이다. 그 선택지를 넘어선 공존의 가능성에 대한 상상력은 자연적 본성에 대한 이해와,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보살핌에 대한 이해를 넘어선 세상의 문제이다. 우리는 종종 사랑하겠기에 떠나보낸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종종 지쳐서 그렇게 한다. 어쩌면 그저 현실적인 이유로 그렇게 한다. 그러나 그 이유를 넘어선 어떤 공존 가능성이 있지는 않았는가? 달리 될 수 있을 가능성이 있지는 않았는가? 사회가 바뀌어야 하는가? 우리가 더 슬기로워야 했는가? 더 끈질기게 붙들어야 했을까? 이 물음들은 그저 여남은 미련과 버려지지 않은 욕심일 뿐일까? 이에 대해서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은 한 사람의 자연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과 별도로 이어져야 할 물음이고, 대답할 가치가 있는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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