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목의 한(恨) (1967) 우리나라 영화사 최고의 공포영화는 이것? 스포일러 있음.
유현목감독의 걸작호러영화 한은 여러모로 참 인상적인 작품이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우리 고유의 정서와 정신세계를 천착하려는 것이다.
당시 유행했던 호러영화의 형식인,
독립된 에피소드 삼부작 형식으로 되어 있다.
둥장인물들은 모두 자연 속에 파묻혀 사는 사람들이다. 자연과 일체가 되어 그 속에서 한과 기쁨 그리고 행복과
절망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유현목감독은 한민족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신세계를 이 호러영화 속에 예술적인 방식으로 그려내는 데
단단히 성공하고 있다.
첫번째 에피소드는 아주 섬뜩하다. 시집 가기 전의 처녀 문희는 밤중에 혼자 칼을 입에 물고 산으로 간다.
이렇게 하고 대야 속 물을 보면 미래의 남편이 보인다는 미신을 따른 것이다.
그런데, 물 속에 진짜 이순재의 얼굴이 떠오른다. 문희는 놀라서 입에 문 칼을 떨어뜨리는데, 이순재의 얼굴에
칼이 박힌다. 그리고 대야 속 물에 피가 번져나가기 시작한다. 둘의 결혼에는 이미 암울한 저주가 서린다.
문희는 나중에 결혼하고 보니, 진짜 이순재가 남편이다. 과거에 급제한 엘리트에다가 미남이고 인격까지 아주 훌륭해서
문희는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녀는 곧 중병에 걸려 시달린다. 이순재와의 삶을 끝내기 싫어서 발버둥치며
살아나려고 하지만, 수명은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문희는 죽어가면서, 이순재더러, 자기만 생각하고 재혼하자 말아달란 부탁한다. 이순재는 그러겠다고 했지만, 이순재 집안에서 난리다. 대를 이으려면 재혼을 해야 한다고 성화인 것이다.
이순재가 집안 성화에 못이겨 재혼을 하자, 그의 집안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굉장히 인상적인 장면이 에피소드 마지막에 나오는데, 이순재는 알 수 없는 힘에 끌려
문희가 묻힌 무덤으로 간다. 문희의 무덤은 활짝 파헤쳐져 있고, 관짝이 열려 있다. 그 안에 머리카락이 길게
자란 문희의 시체가 누워 있다. 아무 분장 없이 보랏빛 강렬한 광선을 관 안에 쏟아붓는다. 관 안에 보라색이니
진짜 썩은 시체가 누워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대가같으면, 잔인한 장면이나 끔찍한 장면을 안 보여주고서도, 소름끼치는 분위기를 창출해낼 수 있다.
이순재는 관 안으로 들어간다. 문희의 시체가 누워있는 곳이다.
그러자, 관의 문이 저절로 닫히면서 이야기가 끝난다.
색채의 표현적 사용은, 이 분야의 대가이자 창시자 마리오 바바에 필적할 정도다. 보랏빛 색채 안에 머리를 길게 기르고 누워있는 문희의 시체는 정말 섬뜩하면서도 공포스럽다.
이순재가 문희의 시체 위로 겹쳐지는 장면은, 행복한 사랑의 성취라기보다
한 여인의 집착이 이순재의 생명을 삼켜 암흑의 나락으로 떨어뜨려버리는 공포다. 스티븐 킹의 미져리보다 더 철저한 여인의 집착과 그 공포다.
둘째 에피소드가 좀 약한데, 사실 가장 보기 괴롭다고 해도 좋다. 바로 계모가 전처의 어린 아들을 학대해서 죽음으로 내모는 이야기다. 유현목감독은 좀 순화해서 표현하고 그런 거 없다. 어린 아들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찾다가 어느 벼랑에서 몸을 던져 자살한다.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그렇게 학대당해도, "어허, 거 참"하면서 적극적으로 뭐를 하려 하지 않는다. 상세하게 계모와 어린 아들의 심리를 그려낸다. 이야기 중심이라기보다, 심리 묘사 중심이다. 아들과 전처의 귀신이 몰려와 계모와 아버지를 죽이는 장면도 뭔가 통쾌하기보다 보기 괴롭다. 행복하게 어머니 밑에서 살았어야 할 어린이가 귀신이 되어 복수한다고 해서 통쾌할 것이 있나? 무척 찝찝하다.
이 영화의 백미는, 세번째 에피소드다. 바로 "내 다리 내 놔" 에피소드다. 가장 긴 에피소드다.
이 에피소드는 대배우 조미령의 대표작이다.
계곡따라 물따라 걸어가던 스님 한 분이 어느 대저택에 멈추어선다.
엄청난 대저택인데, 이상하게 사람 한 명 없고, 담이니 집은 낡아 있다. 무슨 사연인가?
목탁을 두드리니, 기품 있는 귀부인이 쌀을 한 바가지 들고 와 시주하고 들어가려한다.
스님은 귀부인을 멈추어세우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는다. 부인은 근심 어린 얼굴로 사연을 이야기한다.
남편이 중병에 걸려 고생하는데, 무슨 약을 써도 효과가 없다. 남편의 약값에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하인들마저 떠난 폐허가 된 것이다. 남편은 세상에 희망을 잃고 방에 틀어박혀 절망과 고통의 비명만 지른다.
스님은 "내가 이야기를 하여서는 안되는 내용인데, 부인을 보니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소.
남편의 병을 고치려면, 한밤중에 깊은 숲속에 있는 공동묘지를 찾아가 그 중 하나의 다리를 자르시오.
그리고, 그 다리를 가져와 푹 고아서 그 물을 남편에게 먹이시오, 그러면 남편의 병은 나을 것이오.
명심하시오. 절대 무슨일이 있어도 다리를 꼭 가져와야 하오."
그리고 스님은 가 버린다.
사실 아는 사람은 아는 전설이다.
하지만, 이 전설이 거장 유현목감독과 대배우 조미령의 손을 거치자,
우리나라 호러영화의 걸작으로 재탄생한다.
이 영화는 조미령의 원우먼쇼이다. 조미령은 스님의 이상한 말을 듣고 한밤중까지 고민한다.
길 하나 제대로 없는 깊은 숲으로 한밤중에 혼자 들어가 공동묘지에 가서 시체의 다리를 잘라야 하다니.
그리고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조미령이 혼자 고민하는데 어디서 목탁소리가 들려온다.
조미령이 보니, 물방울이 장독뚜껑에서 떨어지는 소리다. 물방울이 장독뚜껑에서 떨어지는 장면을 클로즈업으로
조미령이 갈등하는 표정을 클로즈업으로 교차편집해 보여준다. 이 장면이 굉장히 세련되게 연출되어서,
오늘날 만들어진 장면이라고 해도 세련되게 느껴질 정도다. 떨어지는 물방울의 클로즈업과 조미령의 내적 갈등은
무슨 관계인가? 둘 간 관계가 있음을 영화의 교차편집은 암시한다. 아주 신비하게 느껴지는 장면이다.
조미령은 그 물방울을 보고 산으로 가기로 결심한다.
숲으로 가 보니, 무덤 사이사이에 미처 묻히지 못한 시체들이 버려져 있다. 조미령은 그 중 하나를 골라 다리를 자른다.
시체의 다리를 자르는 장면을 실제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유현목과 조미령은 그런 유치한 것 안 한다.
조미령의 얼굴만 보여준다. 그러면 조미령은 진짜 지금 시체의 다리를 자르고 있다는 듯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뭔가 탁탁하고 내리치는 시늉을 한다. 차마 못보겠다는 듯이 얼굴을 돌리기도 하고, 역겨워하는 표정을 짓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관객들은 조미령 표정만 보고서도 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지금 끔찍하게 썩은 시체의 다리를 자르고 있구나. 너무 잔혹하고 징그러워서 차마 보지 못하고 얼굴을 돌리고
다리를 식칼로 탁탁 치고 있구나. 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대배우의 대연기다.
소품 하나 사용하지 않고서도, 연기력 하나만으로 공포를 생생히 전달한다.
한밤중 숲 속 공동묘지에 찾아와 시체의 다리를 탁탁 하고 식칼로 잘라내는 그 공포 말이다.
그런데, 조미령이 품안에 시체의 다리 한짝을 안고 돌아서려는 순간, 시체가 강시처럼 벌떡 일어선다.
"내 다리 내 놔"하고 소리치면서 말이다.
고이고이 자란 귀부인 조미령은 시체의 다리 한짝을 안고 도망친다. 이 장면에서 당시 관객들이 얼마나 공포에 질렸을 지 쉽게 짐작이 간다. 그 전설을 이미 알고 있던 나조차도 놀랐을 정도이니까. 유현목과 조미령의 대가급 연출과 연기 덕이다.
시체는 한 다리로 깡총깡총 뛰면서 어디까지든 쫓아온다. 한밤중 숲속에서 조미령과 시체 간의 추격전이 벌어진다. 유현목감독의 연출능력은 대단해서, 공포와 스릴이 아주 대단하다.
조미령이 동굴 안에 숨자, 스님이 동굴로 들어온다. "고생 많으셨소. 이제 다 끝났으니 나오시오." 하면서.
조미령이 안심하고 나가려 하자, 스님은 다리 한짝 시체가 되어 달려든다. 이 장면에서 당시 관객들은 비명을 지르며 기절초풍하였을 것이다.
조미령은 그렇게 하룻밤을 시체와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이다가, 간신히 집에 돌아와 끓는 물 안에다가 다리 한짝을 집어넣고 기절한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 보니, 남편은 이미,
시체의 다리 고은 물을 마시고 병이 다 나았다. 조미령과 남편은 시체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껴서
잘 제사를 지내준다. 그러자, 시체는 모습을 바꾸는데, 그것은 사람 크기만한 산삼이었다.
느슨하거나 없어도 되는 부분 없이, 아주 완벽하게 잘 짜여진 한 편의 걸작이다. 조미령이 장독뚜껑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며 산으로 갈 결심을 하는 장면은, 프랑스 누벨바그영화를 연상시킬 만큼 세련되고 아름답다.
한번 시작되자, 이 영화는 롤러코스터처럼 엄청난 스피드와 긴장 공포를 가지고 질주하기 시작한다.
유현목감독은 이 영화에서 아주 유니크한 성취를 이루어낸다.
이 영화에서 다루는 것은,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우리만의 정체성에 대한 것이다. 중국의 것도, 일본의 것도, 미국의 것도 들어있지 않다. 우리만의 정체성, 우리 고유의 것이다. 한국인의 원형에 대한 탐구다.
순도 100퍼센트의 한국의 것에 대한 탐구이다.
물론 이것은 유현목감독만의 공이 아니다. 유현목감독이 소재로 삼은, 우리 민담과 전설 속에 들어있는 정신세계도 큰 몫을 차지한다. 그리고, 유현목감독의 대가급 연출도 훌륭하다. 대배우 조미령의 연기는 쉽게 볼 수 없는 놀라운 연기다.
그리고 한번 시작하자 끝을 볼 때까지 질주하는 그 긴장과 공포를 이렇게 능수능란하게 잘 연출해낸 것은
그저 감탄할 뿐이다.
그리고 영화의 밀도가 아주 높다.
어디에선가 공포영화 순위를 뽑으면서, 장화 홍련이나 기담이나 심지어는 곤지암을 뽑으면서,
유현목감독의 걸작 한을 빼놓은 것은 아주 안타까운 일이다. 거장의 작품으로서 예술적으로나 대중적으로나 단단히 성공한 케이스다. 가령 유현목감독의 김약국집 딸들같은 영화보다도 더 성공한 영화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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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한번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