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바튼 아카데미(2023)> : 그래, 클래식하다고 해두지 뭐!
모든 이미지 출처: 영화 <바튼 아카데미>
주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매운 맛의 시대죠. 떡볶이도 매운 맛, 마라탕도 매운 맛, 심지어 요새는 김치도 더 맵게 팔더라구요;; 아 물론 세상살이도 매운 맛입니다.
언젠가부터 대중매체 역시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한때 지나치게 자극적인 플롯을 비판할 때 쓰던 말인 '막장드라마'는 어느새 그 자체로 고유명사가 되어 장르의 하나로 자리잡았고, (개연성이 모자라거나 아예 뇌절해버리는 것이 아니라면) 막드가 샘솟게 하는 미친듯한 도파민에 우리는 이제 익숙해지고 길들여져, 더 이상 어지간한 막드는 막드라고 부르기도 뭐해 졌습니다.
고백해야겠습니다. 오늘의 영화, <바튼 아카데미>는 심심담백한 영화입니다. 졸리시다는 분들도 있을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끝까지 보고 났을 때 속 편한 건강식을 먹은 것마냥 기분이 좋아진답니다.
"생량한"? 아우 촌스러워. 그래, 클래식하다고 하지 뭐.
아직도 제게 생생하게 남아있는 곽재용 감독의 명작, <클래식>에서 손예진 배우가 한 대사입니다. 극중 자신에게 온 러브레터에 "생량한"이라는 표현이 나오자 위의 대사를 하는데요. 읽으면서 보니 아주 촌스럽기 짝이 없는 편지지만, 클래식하다고 퉁쳐줄만큼 은근한 호감이 생겼던 거죠. 오늘의 영화 <바튼 아카데미>도 마찬가집니다. 촌스럽다는 말보다 "클래식"하다고 해주고 싶어요.
영화는 아예 오프닝의 배급사 로고(유니버설)부터 "나는 클래식하다"를 공표하고 시작합니다. 영화의 배경은 70년대. 크리스마스 휴일의 기숙학교에 가족 없이 남겨진 교사, 조리사, 학생, 그리고 일꾼의 이야기입니다.
설마 주인공들이 투닥투닥하다가 서로 유사가족이 되는 건 아니겠죠? 서로 인종도 생김새도 성격도 다르지만 갈등 끝에 공통점을 발견하고 정이 드는 거 아니잖아요? 설마 마지막에 그렇게 싫어하던 상대방을 위해서 희생을 하는 건 아니겠죠?????? 네??????? 그렇게 뻔하다구요??????? 감독님!!!!!!!!!!!!!!!!
<바튼 아카데미>는 클리셰 덩어리입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플롯, 어디서 본 것 같은 캐릭터 구성, 어디서 본 것 같은 갈등, 어디서 본 것 같은 과거사. 이런... 토마토 지수가 썩다 못해 터지겠는데요????? 아마 그렇겠죠????
당연히 아닙니다. 그렇다면 <바튼 아카데미>의 감상 포인트는 어떻게 이 틀에박힌 이야기를 차별화했느냐가 되겠는데요. 의외로 아주 심플했습니다.
그냥 잘 만들었습니다.
거의 파묘당한 오니 저리가라 하는 수준으로 '폴 선생'이 빙의한 것 같은 찰떡 연기를 보여주는 주연 폴 지아마티를 비롯해 각자의 몫을 모두 깔끔하게 해내는 배우들.
결코 휘황찬란하지 않지만 조금도 거슬리지 않는 미술과 세트.
목표한 바를 오롯이 향해가는 성실한 플롯과 무엇보다 훌륭한 타율의 코미디.
<바튼 아카데미>는 좋은 재료를 듬뿍 넣고 끌인 정직한 백숙이자, 질 좋은 쌀을 찧어 막 쪄낸 따끈한 가래떡이고, 깊은 산골짜기 깨끗한 수원지에서 끌어올린 시원한 생수입니다.
앙트레 누,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방법.
그렇게 가족이 된다.
그렇다고 <바튼 아카데미>가 그저 기존 이야기 방식만을 따르는 영화는 아닙니다. 영화 안에서 자주 언급되는 표현이 있는데요. 바로 '앙트레 누(entre nous)'라는 프랑스어 표현입니다. '우리 사이에'라는 뜻이라고 하네요. 영화 맥락상으로는 '우리끼리의 비밀'내지는 '퉁치고 지나갈 것, 쌤쌤'이런 느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다들 삶의 큰 문제들을 하나, 두 개. 혹은 여러 개 가지고 계신 분들도 많을 테구요. 그 문제들을 어떻게 감당하시나요? 어떤 문제들은 해결이 어려운, 아니 애초에 해결할 수가 없는 것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버티죠. 그저 안고 갑니다. 더 좋은 일들로부터 에너지를 얻으며, 그 에너지가 내 문제들을 이겨내지는 못하더라도 끌어가며 내 삶을 살아나갈 수 있도록.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들도 서로 안 맞는 부분 투성이인데, 그저 학교에 휴일동안 남겨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들이 쉽게 가족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게다가 각자 슬픔과 아픔을 가득 품고 있는 존재들이라면 더욱이요.
이럴 때, 어떤 문제는 그저 퉁치고, 혹은 묻고 지나감으로써 대처할 수도 있겠죠. 남몰래 앓고 있는 우울증, 슬픈 가족사, 보여주기 싫었던 나의 치부 같은 것들 말이에요. '앙트레 누'는 그저 폴 선생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아닌, 가족이 되어가는 방법, 나아가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감독이 던지는 은유입니다. 우리 사이의 비밀로 하자. 우리끼리 힘을 내어 이기자. 퉁치고 지나가자. 좋은 날이 올 테니.
보스턴 여행을 마무리하는 후반부, 허넘 선생과 털리, 그리고 메리는 나름 괜찮은 레스토랑에서 여행의 마지막 식사를 합니다. 디저트로 '체리 쥬빌레'를 시키네요. 달콤한 체리케이크에 알코올을 뿌려 불쇼를 하는 근사한 요리입니다. 하지만 체리 쥬빌레엔 알코올이 들어가고, 털리는 아직 어른이 아니라 그걸 먹을 수 없습니다. 한참 점원과 실갱이를 하던 세 사람은 체리와 크림을 따로 주문합니다.
밖에 나와서 크림에 체리를 올리고, 위스키를 뿌린 다음 직접 불쇼를 시전하는 비범한 이들(...) 물론 망했죠. 하지만 세 사람은 웃습니다. 폭소로 디저트를 대신하죠. 근사한 정식 체리 쥬빌레 대신, 웃음과 야매 체리쥬빌레로 퉁친 웃음. 우리끼리의 이야기. 여행의 마지막 디저트는 앙트레 누 였습니다.
오늘 <바튼 아카데미>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북미지역에서 특히 평가가 좋은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아마 영화 곳곳에 녹아있는 미국문화에 대한 향수를 느낄 수 있기에 더욱 그럴테지요. 하지만 그뿐만 아니라 익숙한 소재와 이야기라도, '잘' 만든다면 여전히 그 이야기의 본질은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였습니다. 보고 나면 기분 좋아지는 영화, 영화관에 가서 보셔도 좋겠고, 혹은 고단한 한 주를 마무리하고 잠들기 전 따뜻한 담요에 우유 한 잔을 데워서 함께 보셔도 좋겠습니다.
블로그에 더 많은 리뷰가 있습니다. :)
https://m.blog.naver.com/bobby_is_hobbying/223366872031
바비그린
추천인 6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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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형 영화이면서 재밌는 영화
기생충 같은 영화였네요.
극심한 뻔함에 거부감이 몰려왔네요.
좋게보시는 분들의 마음도 이해합니다.
그래도.. 좀.. 그랬네요.
"You can do this~"인데...
그 장면에 그렇게 마음에 맺히는 영화였습니다
앙트레누가 무슨 뜻이지? 하고 찾아보려다가 까먹고 있었는데.. 알려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