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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토마스 앤더슨 <팬텀 스레드>.2017 - 영화가 끝난 뒤에 차려질 식탁에서

스탕달증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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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량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한 식탁에 둘러 앉는 (최소) 두 사람 간의 관계는 둘 중 하나다. 그들은 상대 본연의 모습을 이미 알거나 이제부터 알아갈 관계다. 긴밀하게 알고 지내는 절친, 연인이라면 굳이 내 시선을 같은 식탁에 앉은 상대에게 주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핸드폰을 할 수 있고, 다른 식탁을 쳐다볼 수 있고, 먼 산을 보며 멍을 때릴 수 있다. 속까지 알고 지내는 연인과의 식사 자리에서 나의 눈은 보다 개방적일 수 있다.    

   반면에 이런 개방성이 초면인 관계에서는 무례함이 된다. 처음 만난 상대와의 식사 자리에서 요구되는 건 시선의 일방향성이다. 이때 시선을 두어야 할 곳은 오로지 같은 식탁에 앉은 상대방의 눈이다. 같은 식탁에 마주앉는 행위는 아직 베일에 싸인 서로를 알아가기 위한 통과의례이다. 

  여기 마음을 열고 싶지 않아 시선을 회피하는 남자와, 그의 마음을 어떻게든 열고자 치명적인 수단을 동원한 여자가 있다. 함께 있을 때마다 늘 순탄치 못한 식사 시간. 여자는 과연 남자와 행복한 식사를 할 수 있을까? 

아침식사를 하는 우드콕과 알마 (사진1)

 

<팬텀 스레드>에서 (최소) 두 인물이 식탁에 앉아 대화하는 씬은 열일곱 차례 나온다. 우드콕과 알마가 처음 만나는 장소도 그녀가 일하는 식당이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팬텀 스레드>에서 그들이 함께 앉는 식탁이란 곳과 무언가를 먹는 일에 집중한다.

  앞에서 말한대로라면 우드콕은 (어떤 면에서 봐도) 폐쇄성이 짙은 인물이다. 그는 알마에게 자신의 폐쇄성이 불가침의 영역인 듯 말하며 알마를 지치게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신은 인지하지 못하는 와중에) 개방적이다. 꽁꽁 닫아놓은지 하도 오래된 탓에 그 빈틈으로는 존재 자체로서의 유약함이 질질 흘러나온다. 알마는 그의 정체를 유일하게 파악하고 거기에 도전한 (우드콕에게는) 첫 인물이다. 영화 초반 '적어도 내 앞에서는 강한 척 하지 말라'고 한 그녀에 대해 우드콕은 그녀를 새로 만들 드레스의 모델로 세움으로써 답변을 대신한다. 이러한 답변은 동네 식당 출신 웨이트리스의 말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가히 외유내강 엘리트다운 대답이다. 그러나 목표물을 포착한 알마는 그의 신경전에 말려들지 않고 도리어 맞대응한다. 그런 용기 충만한 그녀의 도발은 성공적이었다. 

알마와 대판 싸우는 우드콕

 

끌어당기고픈 알마의 인력과 밀어내고픈 우드콕의 척력이 주로 교집합을 일으키는 곳은 식탁이다. 영화 초반에 우드콕은 이빨을 드러낸 짐승처럼 (1)'당신을 보고 있으면 너무 배가 고프다'며 본인 스스로를 보다 야생적이고 남성적인 인물로 둔갑한다. 다음 식사 장면에선 그의 친구들과 저녁을 먹던 알마가 우드콕을 향해 야릇한 눈빛을 보낸다. 그녀가 능청스레 (2)'많이 먹었어요?' (3)'목 마르신 거 같네'라고 말하자 우드콕은 그녀를 차에 태워 집으로 간 뒤 자기 방으로 데려간다. (그 다음은 나오지 않지만 모두가 예상하듯 섹스로 이어졌을 것이다.)

  (1)에서 우드콕의 연출된 굶주림은 그 허기가 진심인지 아닌지 시험해 보려는 알마의 대사 (2)와 (3)으로 넘어간다. 대사 (2)와 (3)을 내뱉기 전의 프레임에는 우드콕의 입과 그 입을 보는 알마가 들어있다. 그 안에서 우드콕은 음식을 우물거리며 씹는다(영화에서 그가 음식을 먹는 몇 안 되는 쇼트다). 그의 입을 보며 그녀는 대사(2)를 말한다. 그리고 이내 우드콕을 시험에 들게 하는 대사(3)을 말한다. 그의, 그리고 그녀의 갈증은 해갈됐을까? 섹스(로 추정되는 것) 이후 아침식사 씬(사진 1)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우드콕의 연출된 남성성은 침대 위에서 금방 무력해졌을 것이다. 알마 또한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드콕은 그녀가 밥을 먹을 때 내는 작은 소리도 시끄럽다며 빵을 한 입 베어물고 나간다. 나가기 전에 한 입 먹은 빵은 그의 얼마 안 남은 자존심이었다(이후 알마 앞에서 그가 먹은 음식은 아스파라거스와 독버섯이 전부다) . 그러나 이러한 발악은 무색해진다. 시릴은 아침 식사가 우드콕의 하루를 좌지우지한다고 그녀를 타이르지만, (전날 밤 섹스에서 그의 유약함을 확인한) 알마는 그런 루틴이 우드콕의 개인적 비즈니스 말고는 어디에서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다. 알마는 처음으로 그의 친누나 시릴에게 반항한다. 이렇게 그녀는 우드콕 가(家)의 눈엣가시를 자처한다. 

 

우드콕과 알마

 

  알마는 우드콕을 낳고 기르는 엄마처럼 그의 나약함은 물론, 어떻게 그의 자존심을 살리는지 알고 있다. 우드콕이 싫어하는 귀족 부인의 재혼식 때, 그가 지어준 드레스를 입은 부인을 상대로 알마는 그녀의 드레스를 벗겨낸다. 이에 우드콕은 처음으로 그녀에게 먼저 입술을 내민다(이는 영화에서 나오는 두 번의 키스 중 첫 번째 키스다). 진짜 사랑이 시작된 건가? 대담해진 알마는 그에게 드레스 주문을 한 공주에게 '난 여기 살아요'라 말하며 그녀를 견제한다. 이후 시릴에게 깜짝 저녁 이벤트를 위해 우드콕과 집에 단둘이 있겠다는 요청을 한다. '걘 깜짝쇼 안 좋아해' 시릴이 말려보지만 어떻게든 우드콕과 저녁을 먹기 위해 그녀는 계획을 밀어붙인다. 

  우드콕은 평소와 다른 집안 분위기에 심통이 난다. 알마가 차려준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결국엔 화를 낸다. 보통의 커플처럼 오붓한 저녁을 보낼 줄 알았지만, 우드콕은 여전히 자신의 강한 면모를 연출하며 알마의 화를 돋군다. 이날은 결국 알마가 독기를 품고 독버섯을 따게 만든 분기점이 된다. 

 

독버섯을 먹고 쓰러진 우드콕을 보는 알마

  

  독버섯을 먹고 완전히 기력을 잃은 우드콕은 그녀에게 전적으로 의지한다. 이때 우드콕은 엄마의 환영을 보고, 엄마의 자리를 대체할 사람으로 알마를 택한 뒤 그녀에게 청혼한다. 두 사람은 드디어 오붓하게 밥을 먹을 수 있을까? 결혼식 이후 둘은 한적한 식당에서 밥을 먹지만 우드콕은 여전히 불편한 기색을 내비친다(역시 그가 밥 먹는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여전히 엘리트 인사들 앞에서 체면치레하고, 전날에 만난 의사 앞에서 안 해도 될 얘기를 하고(꺼지란 말도 하지 않았나? Did i tell you do fuck off?), 한 부인 입에선 알마의 뒷담화까지 나오게 만든다. 비극적인 부분은 여기 있다. 저녁 이벤트도 준비했고, 그의 자존심도 살려줬고, 결혼까지 했지만 그의 근본적인 결핍은 조금도 치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결국 우드콕은 시릴에게 이제 알마를 보내줘야 한다고 은밀하게 말하지만 알마에게 들키고 만다. 둘은 똑같이 절망한다. 어떤 짓을 해도 결핍이 낫지 않는 우드콕과, 어떤 짓을 해도 그와 완전체가 될 수 없다는 냉혹한 운명에 절망한 시릴. 결국 그녀는 우드콕이 보는 앞에서 독버섯을 필수 재료로 한 요리를 만든다. 우드콕은 보란 듯이 독버섯을 씹고, 알마와 키스한다. 

  알마는 그와의 백년해로를 상상한다. 미래를 상상하는 그녀의 나레이션이 끝나면 우드콕이 영화의 마지막 대사를 한다. '나 지금 배고파'(I'm getting hungry). 필자는 궁금해진다. 영화가 끝난 뒤에 그들은 마침내 오붓한 식사를 하게 될까. 식사 시간엔 조금의 틈도 주지 않던 그가 과연 알마에게 온전히 마음을 열 수 있을까. 필자는 궁금하지만 알마는 궁금하지 않겠다. 자기를 통해 우드콕은 다시 태어났으니, 마음은 이제부터라도 열면 되는 것 아니겠냐고. 알마는 그렇게 생각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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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리뷰 감사드립니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의 반대편 극단에 서서 사랑을 조명하는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사랑을 묘사하는 방식은 생각보다 비슷한 느낌이 드네요. 팬텀 스레드도 두 배우 연기가 작살나죠...
21:42
22.07.14.
음악감독지망생
누가 다니엘 데이 루이스 은퇴 번복 좀 시켜주세요ㅋㅋㅋ
21:44
22.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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