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열대왕사> 익무시사회 후 쓰는 리뷰
<열대왕사>는 열대야로 인해 사람들의 짜증이 극도로 치솟은 여름이 배경이에요.
정신없는 대사에 슬로우 모션까지 걸어놓으니 지옥을 연상케 하기도 해요.
재미있는 점은 에어컨 수리기사를 주인공으로 설정했다는 점이에요.
열기를 삭이는 것이 그의 직업이고 본분이지만,
본능 혹은 욕심 따위에 휩쓸려 오히려 멀쩡하던 에어컨을 고장내면서
영화의 상황이 꼬이기 시작하고, 만들어지면 안 되는 관계가 만들어지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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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과거와 현재,
관객 입장에선 현재와 미래를 수시로 번갈아가며 보여줘요.
서사를 일자로 쭉 풀어보면 "이런 연속적인 우연의 결과로 경찰에 잡힌다"가 끝인데,
감옥에서 출소를 앞둔 장면을 영화 시작부터 내보낼 정도로
스토리를 통해 충격을 줄 의도가 전혀 없어 보였어요.
메멘토처럼 거대한 반전 한 방을 때리는 영화도 아니었고,
지구 최후의 밤처럼 의도적인 불친절함을 통한 2차효과를 추구하는 영화도 아니었어요.
열대왕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서사 구조를 꼬는 과정을 통해
주인공이 처한 현실의 변화를 관객에게 아주 친절하게 상기시키며,
그의 심리적 변화에 주목하게 만드는 영화였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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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씬이 굉장히 좋았어요.
후이팡(여주)이 왕쉐밍(남주)의 기억을 되짚는 씬 바로 뒤에 왕쉐밍의 출소 씬을 붙여 놓고는,
후이팡과 비슷한 착장의 엑스트라를 뒷모습으로만 비춰줌으로써
'후이팡이 왕쉐밍의 출소를 기다렸나' 하는 착각을 (관객에게만) 일으켜요.
허나 왕쉐밍은 후이팡이 자신의 출소를 기다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도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듯, 주춤거리거나 울먹이는 장면 하나 없어요.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왕쉐밍은 후이팡 남편의 사망에 일조한 사람이자
나이 차이도 있고, 다른 여자친구까지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에요.
하지만 이내 미소를 띈 왕쉐밍이 뜀박질을 시작하면서 영화는 끝나요.
추가적인 설명 하나 없지만, 이성적인 사고와도 벗어나 있지만
'후이팡한테 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게 돼요.
중간에 한 TV쇼에서, "프로이트가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가 아님을 밝혀냈듯
인류는 거짓말로 꾸며 낸 자존심에 상처를 받으며 진화한다"라는
구구절절한 말을 하는 장면과도 일맥상통한 엔딩이었어요.
글로 적으면 그 TV쇼처럼 되게 복잡해지고 길어질 감정 나열을
말 없이 달리는 장면 하나로 표현했다는 점이 꽤나 영리하게 느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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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미에 상당한 공을 들인 티가 났어요.
마케팅에서 왕가위니 차이밍량이니 온갖 미사여구를 붙인 이유를 알겠어요.
개인적으로 의외였던 점은 장르영화적인 재미 역시 뛰어났단 거예요.
액션/스릴러가 이 영화의 초점은 아니어 보였지만,
최근 본 액션/스릴러 영화들 중에서 생각해도 꽤 만족스러운 영화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