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스포]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간단 리뷰
1. 리들리 스콧이 50여년간 쌓아온 필모그라피는 크게 시대극과 현대물, SF로 분류된다. "대부분 영화감독의 필모가 그렇게 분류되지 않냐"라고 반문할 수 있는데 여러 시간대를 아우르면서 자기 색을 분명히 하는 감독은 대단히 드물다. 더군다나 리들리 스콧의 영화는 어느 시대에 머무르냐에 따라 이야기의 큰 주제가 완전히 달라진다. 장르의 클리셰에 충실하며 사이버펑크와 코스믹 호러의 신기원을 이룩한 SF물, 인간의 탐욕을 파헤치고 때로는 그것을 국가에 적용시키는 현대물, 그리고 환영받지 못한 영웅의 서사를 다룬 시대극. 리들리 스콧의 시대극('글래디에이터', '킹덤 오브 헤븐', '로빈후드'.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은 앞선 세 영화와 다소 거리가 있다)에는 영웅이 등장한다. 그는 자신에게 처한 환경을 극복하고 사람들을 구하지만 온전히 영웅의 환호를 듣지 못한다. 막시무스(러셀 크로우)는 죽어서 가족들 곁으로 돌아갔고 발리앙(올란도 블룸)은 다시 대장간으로 돌아왔다. 로빈후드(러셀 크로우)는 산 속으로 숨어버렸다. 리들리 스콧의 시대극에서는 사람들을 구한 어떤 영웅도 온전히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그리고 '라스트 듀얼'은 그의 또 다른 시대극이다.
2.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 마르그리트(조디 코머)의 '미투'를 담은 이야기다. 영화가 굳이 쟝(맷 데이먼)과 자크(아담 드라이버)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보여주고 시작하는 것은 온전히 마르그리트의 사정을 더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이해할 수 있다(예를 들어, 정말로 싫다고 거절하면서 내지르는 비명이 욕정에 눈 먼 남자에게 어떻게 보이고 들릴 수 있는지). 그러나 그렇게 이해하기에 이 영화는 러닝타임이 길다. 그리고 쟝과 자크의 대립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설명한다. 쟝과 자크의 대립은 '결투 재판'으로 향하려는 빌드업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결투재판'은 피고와 원고가 목숨걸고 싸워서 살아남은 쪽이 신의 선택을 받았으니 그의 말이 맞다고 판결하는 방식이다. ...당연히 말도 안되는 재판방식이다. 쟝과 자크의 대립은 꽤 명분이 있다. 그런데 이걸 그저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건 말도 안된다. 게다가 결투재판에서 승리하고 살아남은 쟝은 "신의 선택을 받았다"며 사람들의 환호를 받지만, 이후 자막에 따르면 그는 무려 십자군 전쟁에서 사망했다. 이처럼 영화 내내 보여지는 것은 종교의 부조리다. 종교는 누군가에게는 명분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통치수단이 된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숨통을 옥죄는 족쇠가 된다. '라스트 듀얼'의 온갖 야만적인 행태는 과학에 대한 무지와 종교에 대한 부조리한 맹신에서 비롯되고 있다. 이는 '킹덤 오브 헤븐'이나 '로빈후드'의 기조와 일치한다.
3. 이 영화에서 영웅을 묘사하는 방식은 리들리 스콧의 이전 시대극과 일치한다. 앞서 언급했지만 그의 시대극에서 영웅은 온전히 자신의 영광을 누리지 못한다. '라스트 듀얼'은 쟝과 자크의 결투재판에서 시작된 이야기지만, 영화에서 진짜 목숨 걸고 싸우는 사람은 마르그리트다. 그녀는 낮은 지위에 놓인 여성으로서 처음 목소리를 냈다. 이는 쟝의 어머니(해리엇 월터), 혹은 친구 마리(탈룰라 헤이든) 등 고개 숙인 동시대의 여성과 다른 태도다. 결투에서 승리하고 살아남은 마르그리트를 보면서 환호하는 여성 중에서는 그녀에게 적잖은 자극을 받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아이가 온전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지켰으며 후대의 여성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그러나 이후 여성이 목소리를 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르그리트는 조용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위치에서 영웅이 됐다. 그러나 환호를 받는 사람은 앞서가는 쟝이다. 그녀의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는 걸 보여준다. 마르그리트는 발리앙이나 막시무스, 로빈후드에 비하면 사건 이후 30여년간 성의 안주인으로 살면서 번영을 누렸다. 당연히 재혼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는 그런 후일담을 보여주지 않는다. 마르그리트는 그저 들판에서 뛰어노는 어린 아들을 바라보며 미소 지을 뿐이다.
4. 마르그리트의 투쟁은 리플리(시고니 위버)와 제노모프의 사투나 델마(지나 데이비스)와 루이스(수잔 서랜든)의 도약, 조던 오닐(데미 무어)의 끈기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리들리 스콧은 자신의 시대극 속 여성의 위치가 아쉬웠던 모양이다. 실제로 중세나 그 이전의 유럽이라면 여성을 전면에 내세운 이야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라스트 듀얼'은 그런 그가 매력을 느끼기 정말 좋은 이야기다. '라스트 듀얼'을 통해 리들리 스콧은 모든 시대에 특별한 여성을 심어두게 됐다. 다만 이 이야기는 한 가지 함정을 남겨둔다. 이는 '역사'라는 말의 정의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만든다. 영화가 실제 사건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이 사건을 기록으로 남겼다는 의미다. 이는 재판에 참여한 역사관이 남겼거나 아니면 살아남은 인물의 증언으로 만들어진 기록일 수 있다. 영화만 놓고 본다면 마르그리트의 진실이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마르그리트는 살아남았다는 의미다. 마르그리트는 쟝과 자크에 대해 가장 세밀하게 증언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이야기의 세 번째 장인 '마르그리트의 진실'(영화는 이것이 진실이라고 강조한다)은 '마르그리트의 증언'에 불과한 게 된다. 게다가 마르그리트의 진실이 입증되는 과정은 그 말도 안되는 '결투재판'이 유일하지 않았던가. '결투재판'에서 쟝이 패배했다면 역사는 마르그리트의 증언조차 거짓으로 기록할 것이다. 이는 이 영화가 가진 유일한 함정이다.
5. 이런 함정은 쟝과 자크의 마지막 대결에서 나온다. 쟝은 자크에게 칼을 겨누고 "자백해"라고 소리친다. 그러자 자크는 "하나님께 맹세코 강간은 없었어"라고 외친다. 자크의 말은 두 가지 해석의 여지를 낳는다. "합의 하에 이뤄진 관계였다"와 "실제로 강간은 없었다". 당연히 영화가 마르그리트의 진실에 대해 다시 한 번 '진실'이라고 못 박은 만큼, 영화가 '미투'를 전면에 내세우고 만들어진 만큼 전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라는 말의 정의때문에 이는 후자에 대한 여지도 남겨둔다. 국어사전에서 '역사'는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또는 그 기록'이라고 정의돼있다. 모든 '기록'에는 '기록한 사람'이 존재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실록을 기록한 사관이 존재하고 이순신 장군의 전쟁 역사는 직접 쓰신 '난중일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인류의 모든 역사는 기록한 사람에 의해 정의내려진 과거다. 다만 기록한 사람에 대한 신뢰가 명확하고 기록을 증명할 자료가 존재하기 때문에 역사는 신빙성을 얻는다. 만약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 역사라면 그것을 날조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는 역사 연구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와 같다. '카르주-르그리 결투재판'은 14세기 프랑스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이는 '결투재판'과 그것을 증명할 성폭행에 대한 자료가 2021년에 명확하지 않다는 의미다. (영화에 기반해서 말하자면) 만약 '당시의 기록'이 유일한 증거라고 해도 이는 증언에 의한 것이고 그 증언의 입증은 '결투재판'을 통해 비롯된 것이므로 '사실'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하다. 단지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려는 바가 명확한 만큼 마르그리트의 증언이 '진실'이 됐을 뿐이다.
6. 결론: 거장의 무게감은 단순히 그가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보여주는지에 기인하지 않는다(리들리 스콧은 CF감독 출신이다). 그는 인간에 대한 탐욕을 보여주는가 하면 그것을 국가에게도 적용시켰다. 장르영화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미지를 구현하며 여전히 에너제틱함을 과시했다. '라스트 듀얼'에서는 '에이리언', '델마와 루이스', '지. 아이. 제인'에 이어 다시 한 번 여성의 이야기에 주목했다. 이것은 (각본을 맡은 맷 데이먼과 벤 애플렉의 각본대로) '라쇼몽'과 비슷한 전개로 향하면서 진실을 대하는 태도에 긴장감을 늦추지 않도록 했다. 두 눈으로 직접 보거나 경험하지 않는 이상 온전한 진실은 세상에 없다. 다만 작가(기록자)의 의도가 개입하면서 임의의 진실이 생긴다. 그렇게 생겨난 진실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이롭게 한다면 그 가공된 진실을 따를 필요도 있다. '라스트 듀얼'에서 쫓아야 할 것은 남자와 제도의 야만적 부조리에 저항해 진실을 쫓는 한 여인의 투쟁이다. ...그거면 됐다. 어차피 이것은 영화 아니던가.
추신1) 언젠가 '리들리 스콧과 십자군 전쟁'이라는 주제로 글을 써보고 싶다. ...그럴려면 우선 '킹덤 오브 헤븐 감독판'부터 봐야 할 것 같은데...어디서 봐야 하지...
추신2) 아무리 봐도 한글제목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는 '전설의 레전드', '최후의 라스트', '사랑의 러브', '순백의 화이트' 등등...뭐 이렇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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