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각장애인용 '가치봄' 영화] VOD로 <나는 보리> 본 후기

가치봄 영화란?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한글자막 영화 해설 서비스로, 영화에서 대사 없이 진행되는 상황과 각종 시각적 정보를 음성으로 해설하는 화면해설을 삽입하고 대사와 효과음 등을 자막으로 표기해 시·청각장애인들도 불편 없이 영화를 감상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서비스이다.
혹시 익무 회원님들, '가치봄 영화'라고 아시나요? 익무에 한 번 '가치봄'을 검색해보니까 나오는 정보가 거의 없더라구요. 그래서 가치봄 홍보 서포터즈로서 영화를 좋아하시는 많은 익무 회원님들께 '가치봄' 사업을 소개해드리고자 '시청각장애인용 가치봄 영화'를 통해 본 <나는 보리> 후기글을 올려봅니다. 아쉽게도 코로나19 사태의 영향으로 이번 7월 가치봄 상영회는 취소되어서 아쉽지만 극장에서의 관람은 못 하고, 대신에 네이버 시리즈ON에서 VOD로 다운 받아 <나는 보리>를 관람했습니다. 관람 방법은 캡쳐 이미지처럼 네이버 시리즈ON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특별관 코너의 '가치봄 영화관' 카테고리를 통해 관람하시면 됩니다.
한글자막 해설영화, '가치봄' 영화 후기
극장에서 상영했을 때, 보고 싶었는데 시기를 놓쳐버린 영화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가치봄' 영화라는 좋은 기회로 집에서나마 볼 수 있어 다행입니다. <나는 보리>에서 주연 인물들의 대화는 대개 수화로 이루어집니다. 물론 일반 상영에도 자막이 있어 영화를 이해하는 데는 무리 없지만, 시청각장애인용인 '가치봄' 영화를 통해서 보니까 자칫하면 놓칠 수 있는 인물들의 사소한 행동까지 모두 세세하게 설명해주어 확 몰입하여 볼 수 있었습니다. 일반 상영으로 봤으면 오디오가 비는 곳이 많아 지루하게 볼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가치봄' 영화로 보니까 오디오 비는 곳 없이 꼼꼼하고 자세하게 설명해주니 집중이 더욱 잘 되더라구요. 특히나 해설이 어찌나 세심하던지 마치 소설책을 읽는 듯한 수준 높은 묘사가 감탄을 자아내었습니다. 시청각장애인용 영화이지만, 작문 묘사 수준이 뛰어나 시나리오 공부를 하고 계신 분들이라면 글쓰기에 많은 도움 될 것 같아 추천드립니다.
예를 들어서 <나는 보리>의 첫 장면입니다.
자막: 부드럽고 서정적인 음악, 쏴아 파도치는 소리
해설: 구름 한 점 없이, 그야말로 티 없이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11살 소녀 보리의 모습이 화면 안에 들어온다. 까맣고 긴 생머리, 작은 얼굴, 분홍색 꽃무늬가 뿌려진 원피스 차림의 양쪽 어깨엔 분홍색 가방끈이 걸려있다. 보리는 양팔을 조금 벌리고 평균대 위를 걷는 것처럼 밑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걸음을 뗀다. 보리는 왼쪽 손목에 노란색 캐릭터 손목시계를 찼고, 가방에 매단 인형이 옆구리에서 달랑달랑 흔들리고 있다.
이렇게 청각 장애인들을 위해서 음악, 파도 소리와 같은 음향은 자막으로 "부드럽고 서정적인 음악", "쏴아~ 파도치는 소리"로 나타냅니다. 시각 장애인들을 위해서는 배경, 보리의 외모, 옷차림, 행동까지 하나하나 세심하게 묘사하여 해설로 표현합니다. 첫 장면부터 해설을 듣고 감탄했습니다.. 해설자의 목소리도 나긋나긋하고 또박또박하여 어느 하나 단어나 문장이 안 들리는 부분도 없었고, 무엇보다 영화에 집중이 방해가 되지 않아서 좋더라구요.
이 밖에도 인상 깊었던 장면 몇 개를 더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자막: 들려오는 확성기 속 마늘 파는 소리
해설: 아빠는 짬뽕 국물부터 후루룩 들이켜고 보리와 정우는 탕수육에 젓가락이 간다.
이 장면을 뽑은 이유가 프레임 밖에서까지 나는 소리를 자막으로 설명해주어 재밌다는 생각이 들어서 바로 캡쳐했습니다. 만약 자막이 없었다면 '확성기 속 마늘 파는 소리'가 삽입되었는지도 모른 채 무심하게 지나쳤을 것 같습니다. 물론 모르고 지나쳤어도 지장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요. 해설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리네 식구가 한 식탁에서 짜장면을 먹는 모습을 묘사하는데, 큰 의미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보리네 식구가 음식을 어떻게 먹는지까지 인물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다 설명해주니 문뜩 새롭고 재밌게 와닿더라구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세심한 연출력을 파악할 수 있는 계기였다고 할까요. 영화에는 한 장면, 모든 인물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얼마나 세심한 노력을 기울이고, 얼마나 다양한 의미가 담겨있는지 그동안 무심코 생각했던 자신을 반성하며 다시금 영화는 1분 1초라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다음 장면입니다. 보리와 정우가 아빠의 팔베개를 베고 잠들어있다가 보리가 잠에서 깬 장면 입니다.
해설: 햇살이 반쯤 차 있는 마루에서 보리와 정우가 아빠의 양쪽 팔베개를 베고 잠들어 있다. 보리의 머리가 조금씩 기울어지다 아빠의 팔꿈치 부분에서 툭 떨어진다. 그 바람에 환한 빛이 보리의 얼굴에 닿는다. 보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유리창 쪽을 보다가 졸음에 겨운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는다.
잠들어있던 보리의 머리가 기울어져 아빠의 팔베개에서 떨어지고, 그 바람에 환한 빛이 보리의 얼굴에 닿아 깬 보리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환한 빛이 보리의 얼굴에 닿아 깬 섬세한 영상 연출과 저 해설의 표현이 사랑스러워서 캡쳐했습니다.
다음 장면은 풍경에 대한 묘사입니다.
자막: 차분하고 평온한 음악
해설: 서서히 날이 저물어 가며 논에 고인 수면 위로 큰 은행나무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수면이 잔잔한 논과 주변에 녹지, 거리에 따라 녹색과 회색으로 첩첩이 둘러싼 산들. 그 고즈넉한 풍경 한가운데 서 있는 은행나무. 보리와 은정이 그 넓은 풍경 속에서 한 점이 되어있다.
무슨 한 편의 수필, 소설을 보는 것마냥 표현이 아름다워서 영화가 더욱 감성적으로 다가옵니다. 마지막 한 줄에서 "보리와 은정이 그 넓은 풍경 속에서 한 점이 되어있다."라니.. 문학소녀는 엉엉 웁니다.
시청각장애인의 입장에서 관람한 '가치봄'
해설을 듣다 보니까.. 시각 장애인의 입장에서 본 가치봄 영화와 청각 장애인의 입장에서 본 가치봄 영화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눈을 감고 시청해봤고, 한 번은 소리를 끄고 시청해봤습니다. 먼저 눈을 감고 시청했을 때 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표현이 섬세해서 영화의 배경, 인물들의 생김새, 행동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그려지더라구요. 상상만으로 영화를 그려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근데 제 상상이 실제의 장면과 얼마나 일치한지 궁금해서 눈을 한 번 떠봤는데 상상과 비슷한 장면도 있었지만, 예상과 다른 장면도 꽤 많았습니다. 역시 해설이 갖추어진 가치봄 영화여도 시각장애인들에게 영화 관람은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음은 청각장애인의 입장에서 소리를 꺼보고 시청해봤습니다. 청각장애인에게는 자막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어 음악 소리나 배경음 같은 경우엔 "잔잔하고 부드러운 음악", "짹짹~ 지저귀는 새소리"로 표현되는데, 이런 것은 상상으로는 한계가 있고 직접 들어야 와닿기 때문에 통 느낌을 알 수가 없어 눈을 감고 해설만 들었을 때보다 더 답답했던 거 같습니다. 지문 같은 경우에도 섬세한 해설에 비해서는 많이 부실하다고 느껴졌습니다. 자막으로는 대부분 인물들 간의 대화만 표현되고 인물의 감정, 행동은 거의 표현되지 않습니다. 사실 인물의 감정, 행동 같은 경우엔 시각으로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지만, 감탄을 자아냈던 해설에 비해 지문은 조금 아쉬웠습니다. 아무래도 인간의 감각이 청각보다는 시각에 더 많이 의존하는 게 사실이다보니 자막보다 화면해설의 완성도가 더 높을 수밖에 없다지만요.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자막도 좀 더 발전하기를 바래봅니다.
<나는 보리> 영화 후기 (스포, 결말O)
드디어 영화 후기입니다. 이번 포스팅은 '가치봄 영화'가 주제기 때문에 영화 후기는 짧게 하겠습니다. <나는 보리>는 가족 구성원 중 유일하게 비장애인인 보리가 자신만 '다름'에 가족 안에서 소외감을 느끼며 "소리를 잃고 싶다"는 소원을 갖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보리의 고민을 통해 영화는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허물고 '다름'에 주목합니다.
가족 구성원 중 자기만 다름에 소외감을 느낀 보리는 매일 등굣길에 소원을 빌며, 소리를 잃기 바랍니다. 그러다 보리는 우연히 TV 방송을 통해 물에 오래 있으면 귀가 잘 안 들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큰맘 먹고 바다에 뛰어듭니다. 보리의 소원은 바람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보리는 가족들에게 귀가 안 들린다는 거짓말 연기를 합니다. 그 후 보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척 연기를 하며 세상과 마주하면서, 현실에서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직접 겪게 됩니다. 배제와 배척을 당하기 일쑤인 낯선 세상에 '보리'는 그만 엉엉 울음을 터뜨리며 가족들에게 귀가 안 들린다는 것은 거짓말이었음을 고백합니다. 보리는 세상이 무너질 듯 아이처럼 펑펑 울지만, 보리와 가족들은 변함없이 오늘도 내일도 평범하고 일상적인 하루를 보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보리가 "세상의 모든 시기와 질투를 막아주는 능력이 있는 나자르본주 부적"을 바닷가에 던진 것처럼 '다름'에 대한 고민을 더 이상 갖지 않게 된 보리는 앞으로도 평범하고 행복한 하루를 보낼 것입니다.
"나 안 들리는 거 슬프지 않아?"라는 보리의 질문에 "네가 귀가 안 들리든 들리든 우리는 똑같다"는 보리 아빠의 말씀처럼, 우리 모두는 장애인, 비장애인 구분 없이 똑같은 존재죠. 비장애인과 장애인은 그저 '다름'일뿐이란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 사랑스러운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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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첫 GV가 이 영화였는데(수어 통역사분도 참석하셨는데 실제로 청각장애인 가족분들이 오셨더라고요), 감독님이 극 중 보리와 같이 가족들 중 혼자만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실제로도 소리를 잃고 싶다는 고민을 하셨다며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말씀하시던 게 기억이 남네요. 그래서인지 영화에서 청각장애인을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 느껴졌어요.
보통 영화에서 장애인을 개그 포인트로 소비하고 넘기는 경우가 많은 반면 이 영화는 그러지 않고 장애인의 삶도 우리와 별반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리려는 느낌이 들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