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도 나오고 있는 봉준호 감독의 미담
봉준호 감독 밑에서 조감독으로 일한 바 있는 일본인 카타야마 신조 감독의 인터뷰 기사가 있어서 옮겨봤습니다.
일본 잡지 '문예춘추'에 봉준호 감독 특집 기사로 실렸는데.. 무료로 읽을 수 있는 부분까지만 입니다.
(유료 부분은 돈을 지불하는 것도 까다롭네요..)
그리고 살짝 다르게 편집한 글도 있어서 하나로 합쳤습니다.
https://bungeishunju.com/n/n5a0418f8fcaa
https://bunshun.jp/articles/-/36875?page=2
봉준호 영화의 진수는 스토리보드에 있다!
천재 봉준호 감독의 조감독으로 일하면서 배운 것과 <기생충> 아카데미상 4관왕을 보고 느낀 좌절감
<기생충>이 전 세계 관객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칸 국제 영화제에서 한국영화로서는 처음으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 그리고 제92회 아카데미상에서 최다 4개 부문(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 그중에서도 작품상 수상은 비영어권 영화로선 첫 쾌거다.
카타야마 신조 씨(39)는 작년 봄, 영화 <시블링스 오브 더 케이프>(岬の兄妹)로 감독 데뷔. 자폐증 여동생과 오빠의 가난과 성(性)을 대담하게 그려, “2019년 최대의 충격작”이란 화제를 불러 모았다. 봉준호 감독의 <도쿄! ‘흔들리는 도쿄’>(2008), <마더>(2009), 두 작품에선 조감독으로 활동한 바 있다.
봉준호 감독의 작품에는 있고 일본영화에는 없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카타야마 씨가 이야기했다.
언어를 몰라도 전해져 오는 굉장함
<기생충>은 봉준호 감독의 ‘발명’이다.
처음 <기생충>을 봤을 때,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이 영화는 코미디, 서스펜스, 사회 등, 하나의 장르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전에도 감독님은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 작품들을 만들어왔지만, <기생충>은 하나의 도달점처럼 보였습니다. ‘봉준호’라는 하나의 장르를 만들어낸 것이죠. 보고나서 한동안 멍해졌고 좌절감이 치밀어 올랐습니다.
<기생충>을 처음 본 건 작년 여름 제가 감독한 <시블링스 오브 더 케이프>로 타이페이 영화제에 참석했을 때였습니다. 일본에서의 개봉은 반년 뒤에 이루어질 예정이지만, 대만에선 이미 상영되고 있어서, 참다못해 영어 자막으로 봤습니다.
작품의 굉장함은 언어를 모르더라도 충분히 전해져왔습니다. 음악, 화면, 템포, 색조, 그리고 세트와 캐스팅. 모든 것이 완성도가 높고 흠잡을 구석이 없었죠. 압도당해서 다음날에도 영화관에 갔고, 두 번째 볼 때는 중국어 자막으로 봤습니다. 귀국 후에는 봉준호 감독과 친분이 있는 사카모토 준지 감독님과 함께 시사회로 봤는데, 보고난 뒤에 사카모토 감독님도 아연한 표정이었습니다. 역시나 충격적으로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감동을 넘어 무릎을 꿇게 만든다. 이건 그야말로 영화라는 범주를 넘어선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현대의 미켈란젤로다”라며 그 충격을 코멘트로 남기셨죠.
한국인 친구한테서 <기생충>이 아카데미상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는 흥분과 동시에 다소 불안함을 느꼈습니다. 노미네이트된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도 <기생충>은 빼어나게 재밌지만, 영어가 아닌 작품이 과연 오스카를 탈 수 있을까 싶어서 말이죠. 하지만 그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미국의 아카데미상은 ‘진짜배기’였던 것이죠. (웃음)
손수 그린 스토리보드의 충격
이건 봉준호 감독님이 <마더> 촬영 때 그린 스토리보드입니다. 일본에서도 세계에서도 이 정도로 치밀하게 모든 컷의 씬을 그리는 감독은 드물 거라고 생각합니다.
<기생충> 각본과 스토리보드는 책으로 나와서 작년 11월에 감독님과 만났을 때 건네받았습니다. 영화의 모든 장면들에다가, <기생충>에 나오는 유복한 집안의 단면도, 또 어떤 장면에서는 등장인물의 ‘피’가 어떤 식으로 배우에게 뿌려지는가에 이르기까지, 배우들, 모든 스탭들과 이미지를 치밀하게 공유하면서, 촬영 전에 이렇게까지 디테일을 추구하는 건가 싶어 놀랐습니다.
제가 처음 봉준호 감독님의 작품을 본 건 <살인의 추억>이었습니다. <기생충>에도 출연한 배우 송강호 씨가 처음 감독님과 호흡을 맞춘 작품으로, 실제로 있었던 미해결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입니다. DVD가 나와서 바로 봤는데 무척이나 재밌었습니다. 한편으로 “나는 왜 이런 걸 생각해내지 못했을까” 하는 안타까운 심정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조금만 손을 내밀면 닿을 것처럼 보이지만, 도무지 그 등 뒤를 쫓아갈 수 없는 느낌. 봉준호 감독님의 영화란 크리에이터에게 좌절감을 안겨주고 있죠.
저는 10대 후반에 TV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일했고, 2004년경부터는 조감독 일을 맡게 되었죠. 당시 일본에선 TV와 영화의 장벽이 사라지면서, 영화가 TV드라마보다도 저예산, 단기간에 만들어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됐습니다. 이대로 가면 영화계가 망가지겠다. 내가 영화 일을 계속 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죠.
한국인 친구가 <흔들리는 도쿄> 촬영장에서 일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한 게 바로 그 시기였습니다. 감독이 <살인의 추억>의 봉준호라고 하길래 무조건 해야겠다며 달려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현장에서 우선 놀랐던 것은 봉준호 감독님이 모든 장면의 스토리보드를 그려서 배우들, 스탭들과 공유했다는 점입니다. <기생충>에선 아이패드로 스토리보드를 그렸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아직 손그림이었죠. 카메라 구도가 바뀌는 한 컷, 한 컷을 세세하게, 마치 만화처럼 그렸습니다. 일본에선 액션 등 일부 씬의 스토리보드를 그리는 감독이 있지만, 모든 것을 그리는 감독은 처음이라서 신선한 충격을 느꼈죠.
카타야마 신조 감독
또 연출부와 조감독을 키우려 하는 감독님의 인품에도 매료되었습니다. <살인의 추억>을 찍을 때는 조감독에게 한 씬을 찍게 한다든지, 원 컷을 연출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감독님은 남의 체면을 살려주시는 데 탁월한 분입니다. 저는 <흔들리는 도쿄> 촬영 때 엑스트라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일을 했는데, 촬영지가 언덕길이라서 엑스트라들을 이끄느라 고생했었죠. 겨우 촬영이 끝난 뒤, 감독님이 저한테 “This is your shot.”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컷은 자네 덕분에 찍었어.”라고요. 이전까지 함께 작업한 감독들한테서 그런 식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어서, 살짝 감동했습니다.
각본료를 깎아서 로케 비용을
“이 감독은 굉장하다”라고 진심으로 느꼈던 건, 작품에 대한 ‘자세’였습니다. <흔들리는 도쿄>는 세트가 아닌 빈 집에서 촬영을 했기 때문에, 감독님이 염두에 두었던 컷을 찍으려면 부엌문을 현관처럼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미술 비용이 늘어나기 때문에 프로듀서가 “예산이 좀... 어떻게 좀 안 될까요?”라고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죠. 그러자 감독님이 부드러운 말로 “제가 돈을 낼 테니까 해보죠”라며 단호하게 밀어붙였습니다. 결국 프로듀서도 “감독님이 그렇게까지 말하신다면...”이라고 대꾸하면서 감독님이 하자는 대로 촬영을 진행했습니다. 그런 감독님의 ‘남자다움’에 저는 감명을 받았습니다.
일본에서는 히트작 제조기로 불리는 감독이라도, 대작을 찍을 때는 스폰서나 TV 방송국의 입김으로 작품을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님은 자신의 이상에 따라 모든 것을 컨트롤하려고 했고, 또 그것을 훌륭히 해냈습니다. ‘이런 감독이라면 돼보고 싶다’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만약 봉준호 감독님과 만나지 못했다면 저는 영화를 만드는 걸 그만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감독님은 저의 은인입니다.
감독님의 영화에 대한 자세는 지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옥자>(2017)를 찍을 때 예산이 부족해서 뉴욕 로케이션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자 감독님은 자신이 받는 각본료 일부를 로케 비용에 보탰다고 합니다. 사모님께는 비밀로 하고 말이죠. (웃음)
“좋았어요. 한 번만 더”
이 감독님 밑에서 좀 더 영화를 배우고 싶다. 그런 생각으로 노 개런티라도 괜찮다며 신신당부하여 조감독 일을 했던 것이 <마더>였습니다.
당시 봉준호 감독님은 이미 한국의 대감독이어서, 조감독을 해보겠다는 사람이 저 외에도 있었을 겁니다. 게다가 개런티를 안 받는다고 해도, 한 사람이 늘면 숙박비와 식비가 늘고, 또 제가 한국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죠. 일본어가 가능한 스탭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제가 한국에 도착했을 시점엔 해고된 상황이었죠. (웃음) 그럼에도 저를 조감독으로 받아들여준 감독님, 현장에 계셨던 분들에겐 정말로 감사를 드립니다. 결국 8명의 조감독들 중 가장 막내로서 감독님의 모니터를 세트하는 등, 회화를 못해도 할 수 있는 작업을 맡았습니다.
<마더>의 현장에서 겪은 1년은 감독님의 ‘타협하지 않는 자세’를 두 눈으로 목격한 나날이었습니다. 그토록 치밀하게 스토리보드를 그리고, 앵글과 반사의 디테일까지 신경 써서 사전에 계획을 세웠음에도 수십 번씩 테이크를 반복했던 것이죠.
영화감독이라고 한다면 배우에게 호통을 치는 이미지가 떠오를지도 모르지만, 봉준호 감독님은 일단 칭찬을 합니다. “굉장히 좋았어요. 한 번만 더 갑시다”라고. 저는 ‘좋았는데 왜 또 한 번?’이라고 생각했죠. (웃음) 매번 뭐가 문제일까 생각하면서 지켜봤습니다. 촬영 기간 중 저도 점점 한국어 대화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됐는데, 감독님은 언어의 뉘앙스를 미묘하게 바꾸며 다양한 패턴을 시도하고 있었던 거죠. 어느덧 40 테이크나 찍는 상황인데도 감독님의 칭찬은 계속되고 있어서 배우도 부담을 크게 느끼지 않고, 스탭들도 편한 모습. 봉준호 감독님은 냉정하고 머리가 좋은 대학교수 같은 인상이었습니다.
한국에는 '지하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마더> 때 조감독으로 일하면서 살 집을 찾을 때 알게 됐습니다. 지하 건물은 지상보다도 월세가 저렴했습니다. 저는 지하도 괜찮겠지 생각했지만 동거하는 한국인 조감독이 '지하는 싫다'고 해서 포기했죠. 축축하고 어둡고, 그리고 곱등이가 살죠. 한국인에게 있어서 '지하실 집'에 대한 이미지는 좋지 않은 듯했습니다.
창문을 통해 표현된 두 집의 격차
<기생충>은 두 집을 효과적으로 대비시킴으로써 현대의 격차를 상기시키고 있는데, 그 격차를 명확히 하기 위해, 두 가족에게 공통점을 주고 있습니다. 알기 쉬운 것이 아버지, 엄마, 자식들이라는 4인 가족 구성. 그리고 제가 “졌다”라고 생각했던 것은 창문의 사용법입니다. 가난한 집도, 부잣집도 창문의 가로세로비가 ‘시네마스코프(와이드 스크린)’에 딱 들어맞는 비율로 찍혀있죠. 그리고 둘 다 창문이면서도 바깥에 보이는 풍경은 완전히 다릅니다. 창을 통해 시각적으로 두 집의 격차를 떠올리게 해서, 감독님과 만났을 때 “굉장히 좋은 표현이었습니다”라고 제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저는 <기생충>을 5번 감상했는데, 볼 때마다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반지하 가족이 마시는 술이 싸구려 맥주에서 차츰 비싼 것이 되고 마지막에는 위스키로 바뀌게 되죠. ‘술’이 한 가족의 경제 상황을 표현하는 아이템이 된 셈입니다. 이러한 짓궂은 연출에 몇 번이고 감탄했습니다.
나머지 (유료라서 퍼오지 못하는..) 글 목차는...
"미쳤다"는 얘길 듣고
한국영화와 일본영화의 차이
타협하지 않고 해나간다
golgo
추천인 40
댓글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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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지는 모르겠지만 일본에는 지진때문에 반지하 주거형태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지금은 많이 사라졌다고 하네요
반지하 주거문화가 많이 생긴건 과거 박대통령 ( 박정희 시절 ) 시절 벙커를 대신할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런 지하 주거 문화가
발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사라지고 있는 추세고요
참고로 일본은 지진이나 재난에 대비 소위 부자집들 보면 마당에 벙커를 설치하는 집들이 있어요 그리고
그 벙커에 식량 , 물을 채워넣는거죠 후쿠시마 지진이후 이런 문화가 더욱더 확산되었다고 합니다
아주 하와이 같은곳으로 도피를 하기도 하고요
이제 사모님이 알게 되시겠군요! ㅋㅋ
사모님한테 등짝 스메시를 맞았을까 궁금하네요ㅎ
능력과 인성이 함께 있는 게 많지 않은데 참...
까면 깔 수록 ㅎㅎㅎ
어떻게 한국어 못 하는 조감독을 기용할 생각을?
카타야마 감독의 능력도 출중하겠죠?
봉준호 감독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글이네요
일독했습니다
일본과 한국의 시각차 중 하나는 같이 사는 사람을 '가족'이냐 혹은 '식구'로 표현하는 것일 수 있겠네요 ;]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