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오영화제 - 라이트하우스] 간략후기
마카오영화제 둘째 날 두 번째 관람작은 장안의 화제(?)인 호러영화 <라이트하우스>였습니다.
국내 미개봉작인 <더 위치>로 단박에 호러 신성으로 떠오른 로버트 에거스 감독의 신작으로
내년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유력 후보로 꼽히고 있는 이 영화는 논리로 설명되지 않은 채 파도치는 정서와
기괴하게 뒤틀린 에너지로 영화 속 주인공들은 물론 지켜보는 관객들의 마음까지도 장악합니다.
공포의 근원이 모르는 것,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가정한다면 이 영화는 수준급의 호러입니다.
1890년대 뉴잉글랜드의 외딴 섬, 두 명의 남자 이프라임(로버트 패틴슨)과 토머스(윌렘 대포)가 새로운 등대지기로 옵니다.
산전수전 겪다가 등대지기까지 하게 된 청년으로 보이는 이프라임과 베테랑 선원 출신으로 보이는 토머스는
의지할 곳이라곤 둘 밖에 없는 이 등대 안에서 쉽게 섞이지 못한 채 서로를 경계하게 됩니다.
토머스는 철저한 분업을 주장하며 이프라임에게 자신이 맡고 있는 램프 부근에 접근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이프라임은 등대 아랫부분에서 뒤치닥꺼리를 하며 과연 램프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증을 증폭시켜 갑니다.
수시로 들려오는 경보음과 파도소리, 서로 외에는 살아있는 것과 교류할 기회를 찾을 수 없는 등대 안에서
이프라임과 토마스는 점차 광기에 잠식되어 가는데, 그 광기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지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라이트하우스>는 1.19:1 비율의 흑백 화면, 그로테스크한 구도 안에서 확실히 제정신은 아닌 듯한 인물들의
표정과 행동을 비춤으로써 시작부터 관객을 고립되고 불편하며 괴이한 '근무 현장'으로 안내합니다.
자막 없이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 현대에는 좀처럼 쓰이지 않을 것 같은 영어 어휘가 흘러넘치는 것도 장벽이라면 장벽이었습니다.
특히 윌렘 대포가 연기하는 토머스는 첫 대사부터 웬 싯구를 읊기 시작하더니 수시로 비유와 상징이 넘치는 듯한,
그러나 현대 영어 문법에 대입하려면 시간이 꽤 걸리는 어휘를 구사해서 상대방인 이프라임은 물론 관객도 당황시킵니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니 그 모든 말들을 굳이 다 해석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왜인고 하니 설명되지 않고 납득되지 않는 분위기가 이 영화에서 공포를 느끼는 가장 큰 요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광기는 설명되는 순간 이미 광기가 아니게 되고, 그렇게 설명되지 않은 채 광기 그 자체로 날뛰며 공포를 번지게 합니다.
이프라임과 토머스는 통성명도 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등대에 입주할 정도로 서로를 경계합니다.
토머스는 십수년간 크리스마스를 배에서 보내는 통에 가정과 멀어진 고독한 선원이라고 자기를 소개하지만
이프라임에게 토머스는 설명할 수 없는 권위의식으로 상대방의 꼭지를 돌게 하는 이상한 노인으로 보이고,
이프라임은 벌목일을 비롯해 돈 때문에 안해 본 게 없다가 돈 많이 준다기에 등대지기를 하게 됐다고 소개하지만
토머스에게 이프라임은 채 설명하지 않은 께름칙한 과거가 있는 불순한 청년으로 보입니다.
물론 영화는 어느 것이 그들의 진짜 정체인지 굳이 드러내지 않은 채, 각자의 판단으로
서로와의 관계를 파국으로 몰아넣는 두 사람의 광기를 악착같이 비출 뿐입니다.
문제는 그런 의심들을 떨쳐버리기에 그들이 너무나 고독한 곳에 있단느 사실입니다.
계속적으로 들려오는 경보음, 그칠 줄을 모르고 돌아가는 램프등이 사람을 꿰뚤어버릴듯 신경을 긁는 것처럼
서로가 주시할 수 밖에 없는, 그러나 각자가 숨겨야만 하는 욕망들은 그들을 미치게 합니다.
마치 수십년 전에 만들어졌는데 이제야 발견된 듯 세월의 더께를 묻힌 화면 안에서
수염과 이목구비의 움직임에 힘입어 극명한 명암을 드러내며 연기하는 배우들이 공포감을 더 강화합니다.
이프라임 역의 로버트 패틴슨은 이렇게 연기를 잘 하는 배우였나 싶게 폭주하는 연기로 관객을 놀라게 합니다.
스스로 감추고 있는 욕망과 진실, 자꾸만 자라나는 타인에 대한 의심 사이에서 이성의 끈을 놓아가는 과정이
뒤로 갈수록 통제 불능 수준으로 펼쳐지며 관객을 벌벌 떨게 만드는데 그 카리스마가 대단하네요.
이 영화로 내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노미네이트가 유력한 토머스 역의 윌렘 대포는
마치 신화나 설화의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기이한 비주얼을 하고서 카메라에 무시무시하게 들이닥칩니다.
언제 어떤 모습의 광기로 탈바꿈할지 모를 그의 모습은 영화가 공포를 유발하는 중요한 축이 되기도 합니다.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들이 쟁쟁하긴 합니다만, 이 배우에게 트로피를 줘도 이의를 달기 힘들 듯 합니다.
두 사람은 이 영화에서 마치 누가누가 더 미쳤나 대결하는 듯한 수준의 연기를 보여줍니다.
끝까지 제대로 제시되지 않는 두 남자에 대한 정보와 끝까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 두 남자에 대한 진실,
그 속에서 저게 갑자기 저기서 왜 나와 싶게 속출하는 뒤틀리고 공포스런 이미지들,
시야의 좌우를 꽉 틀어막은 듯한 화면이 주는 고립감까지 더해지면서 <라이트하우스>는
의지해야 하는 동시에 의심해야 하기에 점점 미쳐 가는 두 남자의 정신으로 보는 이들도 저항할 수 없이 빠져들어가게 합니다.
국내 정식 개봉은 쉽지 않을 듯 하나 내년 초 아카데미 기획전 등의 상영을 통해서는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해 봅니다.
추천인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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