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영상자료원에서 들은 일
영화예술에 관심 있는 지지자라면 최근 며칠 동안 영상자료원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적극 참여하고 있지 않을까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참여란 1920~30년대 미국 흑백 고전 필름을 복원한 형태로 추스른 상영본을 가만히 앉아서 관람하는 것을 말합니다. 폭스가 20세기 폭스가 되기 이전 시절에 나온 영화들입니다.
나이가 30대 중반인 데이미언 셔젤은 위플래쉬나 라 라 랜드를 만들어 왔는데 최근작 퍼스트맨에 와서야 자기 스스로 영화를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크게 고민하면서 작업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셔젤에게 연출자로서 전환점이 되었던 라 라 랜드는 셰르부르의 우산을 레퍼런스로 삼아 참고한 한편, 이번 프로그램에서 상영하는 27년 작, 7th heaven의 영향을 받아 오래된 유명작들에서 여기 저기 끌어들여 완성한 영화입니다. 다시 말하면 셔젤이 만든 영화 가운데 가장 나은, 필름메이커로서 독립된 의식을 가지고 만든 작품은 퍼스트맨이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퍼스트맨은 셔젤이 지금까지 만든 몇 안 되는 영화들 가운데 가장 독자성을 갖춘 영화입니다.
7th heaven은 제1회 오스카 시상식에서 감독상, 여우주연상, 각색상을 수상한 작품이었습니다. 셔젤은 라 라 랜드의 엔딩이 이 영화의 엔딩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는데 직접 보면 칼 드레이어의 오데트 만큼은 아닐지라도 그와 흡사한 감정의 반향을 관객에게 전한다는 점에서 시네마틱한 경험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한 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질산염 필름을 4k로 복원한 이 버전은 한 번 볼 만한 가치가 있는데 안타깝게도 오늘 놓치면 이제 볼 수 없는 작품입니다.
영화가 끝나고 이번 폭스 제작 필름들을 수급하고 진행하는 데 기여를 했을 뉴욕 현대미술관의 큐레이터이자 필름 크리틱 데이브 커와 대화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옆에 보이는 인물이 낯이 익다면 70년대 미국영화를 무대로 마틴 스콜세지와 브라이언 드 팔마 사이에서 작은 자리를 확보하려 애쓰던 폴 슈레이더를 알아보신 것입니다. 퍼스트 리폼드 개봉 때 데이브 커와 폴 슈레이더가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할 때 모습인가 봅니다. 오늘 커와 짧은 대화에서 몇 가지 질문을 건넸고 그가 답변하는 와중에 내년 5월, 영상자료원에서 필름 역사상 가장 뛰어난 감독의 기획전을 할 생각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사람을 기리는 기획전을 한다면 앞으로 5개월 후에 인간과 사물의 성질을 다루며 예술의 경험을 이끌어내는 위대한 영화경험이란 무엇인지 다시 확인하는 소중한 시간이 될 듯합니다. 최근 미국영화들 가운데 포드 vs. 페라리나 겨울왕국 2처럼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제법 훌륭한 작품들이 연달아 나오고 있어서 반갑습니다. 이런 영화들은 두세 차례 관람하더라도 결코 시간 낭비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이번 20~30년대 폭스사 복원 영화들 같은 기획전은 영화가 무엇인지 알고 싶고 영화가 어떤 매체인지 궁금한 관객이라면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고전필름의 정수를 담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열리는 독립영화제와 이번 영상자료원 프로그램이 겹치는 일정이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겠습니다. 향후 언제라도 볼 기회가 있는 한국 독립영화 수상작과 뉴욕을 가야만 제대로 볼 수 있는 클래식 사이에서 영상자료원을 택한 분들의 시야와 관점이 더욱 넓고 풍부해졌을 것이라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영화를 말하며 과시하기 좋아하고 틈만 나면 사랑을 고백하려 드는 말 많은 사람이 반대편에 늘상 있지만 데이브 커와 자리는 평생에 걸쳐 자기 분야에서 묵묵하게 기여하고 연구를 이어온 종사자와 마주한, 좀처럼 흔치 않은 만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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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퍼스트 리폼드를 보고와서 폴 슈레이더 감독님이 반갑네요!!ㅎㅎ 고전영화에 관심이 많아서 참여하고 싶지만 영자원까지 찾아가기엔 시간이 안될것 같아서 정말 아쉬워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