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무인들께 추천할만한 서부영화 10편
많은 영화를 봤다고 자부할 만큼은 아니지만, 제가 서부영화를 워낙에 좋아합니다.
저도 나이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서부영화 세대는 당근당근 아니죠!!) 티비에서 해주는 세르지오 레오네 영화를 시작으로 서부영화에 빠지게 됐습니다. 거슬러 거슬러 보다보니, 요즘은 정통 서부극을 좀 더 재밌어 하는 경향이 좀 생기기도 했고요.
서부영화는 시네필들 사이에서도 확실히 변방이더군요. 세르지오 레오네와 샘 페킨파 외에는 시네필들의 걸작/거장 리스트에 잘 회자되질 않죠.
일례로 존 포드는 영화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비해 우리나라에서 사랑받는 거장은 아닙니다. 허문영 평론가 정도가 존 포드를 최고의 영화감독으로 자주 거론하는 정도일까...
암튼 그러다보니
호러 / 액션 천국 익무에서 서부영화 부흥의 기치를 내거는 거 까지는 아니고 ...
제가 온라인에서 편하게 활동하는 커뮤니티가 여기밖에 없는데, 그나마 익무인들이라면, 볼 기회만 있다면 편견없이 좋아할거라 확신하는 서부영화들 몇편, 제가 디비디로 모셔놓고 심심할 때마다 꺼내보는 서부영화 중에 몇편을 추천하려고 합니다.
이름하야, '덕후가 아니라도 빠져들만한 쉽고 재밌고,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서부영화 베스트 10' 입니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은 그냥 주관적 기준입니다.
순위 있습니다.
1위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The Man Who Shot Liberty Valance 1962)
감독 : 존 포드
출연 : 존 웨인 / 제임스 스튜어트 / 리 마빈
이 영화가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의 초점이 악당 리버티 밸런스(리 마빈) 대 총잡이 톰 도니폰(존 웨인)의 대결에 맞춰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랜스(제임스 스튜어트)는 변호사인데, 꿈을 좇아 서부로 향하다가, 우연히 신본시(산본 아닙니다.)에 정착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그는 리버티 밸런스에 맞서게 되는데, 무력이 아닌 법을 사용해 그를 연방정부에 기소하려 합니다.
자유로운 영혼이자, 리버티 밸런스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톰 도니폰은 그런 랜스를 지켜주려 하면서도, 서부에선 무력이 법이라며 총 쏘는 법을 가르쳐 주려 합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순수한 미국의 이상향을 그리는 건 아닙니다.
주요 내용은 랜스가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서 텍사스 주를 연방에 포함시키는 법안에 투표하게 하려는 행동에 할애되고 있습니다.
리버티 밸런스 같은 흉포한 악당을 고용하여 마음껏 권력을 휘두르는 농장주들은 당연히 미국 연방에 편입되는 걸 거부하는데, 농장주들은 주민들이 올바른 투표를 하지 못하도록 협박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도시마다 두 명씩 선출하는 시 대표에 자기들의 대리격인 리버티 밸런스를 뽑도록 하려고 하죠.
랜스는 대부분이 문맹인 마을 사람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는데, 교재로 활용하는 내용이 대체로 미 헌법이나, 단체 교섭에 관한 권리, 투표의 권리 등 당시 농민, 노동자들을 각성시키는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점차 리버티 밸런스의 폭압에서 눈을 뜬 마을 사람들은 투표를 통해 도시 대표로 랜스와, 꼬장꼬장한 저널리스트인 '신본스타' 편집장, 듀톤 피바디를 선출합니다.
이에 격분한 리버티 밸런스는 신본스타에 테러를 일삼고, 랜스에게 결투를 신청합니다. 랜스는 이를 받아들입니다.
결말이 뻔한 이 대책없는 결투에서 놀랍게도 랜스가 리버티 밸런스를 쏴 죽이며, 랜스는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됩니다.
이 전설적 일화는 도시 대표가 모여 주의 연방 편입 여부를 결정하는 투표, 동시에 주 대표를 뽑는 투표에서 유리하게 작용하여, 신참내기 랜스는 기어이 새롭게 연방에 편입된 이 지역의 '주지사' 자리에 오르고 맙니다.
하지만 이 신화,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가 주지사가 되고, 상원의원에 세 차례나 당선되어 워싱턴 정가에서 차기 대통령 후보로 떠오르게 된 미국적인 신화에는 반전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노년의 대정치인이 된 랜스가 톰 도니폰(존 웨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열차를 타고 신본시에 도착해서는, 마을 사람들에게 그 전설에 숨은 비극적 실화를 들려주며 시작합니다.
그 진실은, 경우에 따라선 랜스의 정치 경력을 아작낼 수도 있는 추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신본시 사람들은 유명한 대사를 읇조립니다. 바로 '여기는 서부입니다. 서부에서는 전설이 사실이 되면 전설을 내보내죠.'라는 대사죠.
이 영화는 그 어떤 정치드라마보다도 역동적인 정치극입니다. 미국 초창기 서부개척사의 정치적 단면이 그 어떤 영화보다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죠. 특히 도시 대표들이 모여, 지주 대 자유인들, 주반대론자 대 찬성론자의 대결을 벌이는 투표장 장면은 마치 다큐를 보듯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장담컨데, 어느 다른 영화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풍경이 담겨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존 포드는 스스로 서부극의 신화를 완성한 뒤, 그걸 허물어뜨리기 까지 한 것으로 보입니다.
존 웨인은 이 영화에서 다른 영화와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으로 처참하게 몰락합니다. 그의 멋진 총 솜씨를 뽑낼 기회도 없고, 평생 연정을 바친 여자도 외지 출신 변호사에게 빼앗기고, 심지어 재산도 잃고 평생 주정뱅이로 살다가 잊혀진 채 죽어갑니다.
서부영화 역사상, 고전적인 서부의 영웅들이 어떻게 멸망했는지 기념비적으로 보여주는 두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이 영화에서 존 웨인이 자신의 집을 불지르는 장면과, 샘 페킨파의 와일드 번치에서 마지막에 기관총에 스러져 가는 주인공들을 보여주는 장면이죠. 무력 면에서는 대량 살상 무기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고, 사회적 측면에선 점점 세련되어 가는 제도에 적응하지 못해 무릎을 꿇은 것이죠. 이런 식으로 보면, 많은 평론가들이 말하듯 이 영화에 냉소만 가득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어느 영화보다 서부 시대의 종언에 대한 애수가 넘치는 작품이죠.
2위
레드 리버 (Red River (1948)
감독 : 하워드 혹스
출연 : 존 웨인 / 몽고메리 클리프트 / 월터 브레넌
서부극을 상징하는 인물 중 하나가 '카우보이' 입니다. 이 영화는 카우보이가 어떤 존재들인지, 이들이 왜 서부극의 대표 캐릭터인지를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내용은 꽤 단순합니다.
존 웨인은 달랑 암숫소 두 마리를 데리고 서부의 황야에 정착하는데, 시간이 흘러 그 일대 최대 목장 주인이 됩니다.
헌데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이 지역에선 소값이 개똥값만도 못하게 되죠. 반대로 당시 미국 북부는 경제적 부흥기를 맞아 스테이크 먹는 식생활이 유행이 됐는데, 공급이 수요를 못따라가 소값이 금값이 됩니다.
따라서 철도가 뚫린 곳까지만 소떼를 이동시킬 수 있다면, 엄청나게 뻥튀기 된 가격에 소를 넘길 수 있습니다. (약 50배 정도 되는 가격차로 기억합니다.) 존 웨인은 소떼 약 8000마리를 거느리고 대 이동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문제는 가는 길이 엄청나게 험난하다는 겁니다. 밤마다 코요테 무리들이 소떼를 동요시키지 않도록 불침번을 서야 하고, 급물살도 건너야 하며, 남북전쟁 패잔병들이 길목마다 강도짓도 하고, 살벌한 인디언들 구역은 무조건 피해야 합니다.
게다가 워낙 급변기라 철도가 어디까지 뚫렸는지는 단지 소문만 무성할 뿐입니다. 이 시절에 티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심각한 정보의 제약 속에서 단지 철도가 거기 있을 거라는 확신만 가지고 이동해야 합니다.
몇 달이 걸리는 여정입니다. 존 웨인은 수십명의 소몰이꾼들에게 계약서 한 장씩을 주며 각자 결정하라고 합니다. 그들로서는 목숨 걸고 인생 역전이냐, 죽음이냐에 배팅하는 셈입니다.
하워드 혹스는 왠지 막연히 서부영화 100편 쯤은 찍었을 것 같은 인상을 풍기는데, 의외로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이 영화가 첫번째 서부극입니다. 하드보일드, 코미디, 모험극, SF호러 등 워낙 다양한 장르를 가리지 않고 잘 찍는 분이라, 첫번째로 찍은 서부영화가 영화사에 길이 남는 걸작이 됩니다. (정말 질투나는 재능입니다.)
당시 엄청나게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고 있던 터라 300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제작비로 촬영했는데, 덕분에 지금 봐도 장관인 장면들이 다수 연출되어 있습니다. 주로 대규모 소떼 이동 씬이죠.
특히 기억에 남는게, 카우보이들은 밤중에 소떼들을 자극하면 안 되기 때문에 절대 술을 마셔선 안됩니다. 근데, 여기 처음부터 문제 일으킬 것 처럼 생긴 주정뱅이가 결국에는 몰래 싸온 술을 먹고 말썽을 일으킵니다. 식기를 모아둔 마차에 넘어져서, 냄비 몇 개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가죠. 수십명의 카우보이들이 잠에서 깨, 긴장된 표정으로 다들 숨죽인 채 다가올 재앙을 기다립니다. 소 한 두마리가 동요하기 시작하다가 전체가 발광합니다. 결국 한밤의 대란으로 이어지고, 몇 명이 소떼에 밟혀죽습니다. 노련한 카우보이들이 간신히 소떼를 협곡으로 몰아넣어 사태를 수습하죠. 이 장면을 별 다른 카메라 조작 없이 호쾌하게 와이드로 보여주는데, 정말 장관입니다. 처음엔 스릴러 영화처럼 긴장되게 시작했다가 활극으로 전개되는 양상이죠. 그밖에도 소떼들이 물살 쎈 강을 건너는 장면 등이 볼만합니다.
영화의 주된 갈등은 구세대과 신세대의 충돌에서 나옵니다. 어디나 그렇듯 이렇게 대규모 인력이 장기간 야전에서 생활하다 보면 여러가지 이유로 불만들이 터져나옵니다. 존 웨인은 초기에는 넘치는 카리스마로 이를 잘 다스리지만, 점차 지독한 군기와 독선으로 카우보이들이 힘들어합니다. 몽고메리 클리프트는 존 웨인의 양자 격인데, 앳되고 경험이 일천하지만 실력과 자질은 뛰어납니다. 그는 융통성을 발휘하여 카우보이들의 마음을 얻습니다. 결정적 계기가 위에 언급한 소떼 대란 사건. 소 여러마리를 잃고, 몇 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으로 존 웨인은 당연히 주범자를 사형에 처하려 하지만,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반대합니다.
둘은 철도가 어느 도시까지 깔렸느냐의 정보를 두고 다툼을 벌이다가 갈등이 폭발합니다. 존 웨인은 가장 보수적인 선택으로, 오래 전에 확인된 먼 도시까지 강행군을 하려 하고, 몽고메리 클리프트는 소문과 추론을 종합하여 가까운 어느 도시에 가면 반드시 철도가 깔려 있을 거라고 주장하죠. 이 극단적인 대립에서 카우보이들은 집단 항명을 택하고 몽고메리 클리프트를 새 지도자로 추대합니다.
결국 희대의 영웅이었던 존 웨인은 모든 것을 잃고 쓸쓸히 집단을 떠나가죠.
이 영화의 결말은 의외로 해피엔딩인데, 당시 투자자들의 강력한 요구였다고 합니다. 영화를 보다보면 절대로 해피엔딩이 될 수 없게끔 상황이 흘러가거든요. 원래 결말은 비극적인 결투로 끝을 맺는 것이었다고 하더군요. 평론가들은 이 영화의 결말을 두고두고 씹습니다.
저는 이런 정보를 전혀 모르고 영화를 봤는데, 기적같은 해피엔딩이 너무 유쾌하고 좋았습니다. 존 웨인과 몽고메리 클리프트 누구 하나 응원하기 힘든 상황이라서 ...
존 웨인의 개성이 이 영화만큼 여실히 드러난 영화도 드뭅니다. 젊은 몽고메리 클리프트도 빛을 발하고, 서부영화의 위대한 단골 조연인 월터 브레넌이 존 웨인의 사려깊은 동료로 멋진 연기를 보여줍니다.
(월터 브레넌은 노년에 하워드 혹스와 함께 찍은 영화에서 대부분 익살 넘치는 감초 역할을 맡았는데, 장년 시절엔 서부극의 악당으로 명성을 떨쳤던 배우입니다. 특히 존 포드의 '황야의 결투'에서는 와이어트 어프 형제를 위협하는 악당 목장주로 살벌한 매력을 보여줍니다. 저는 이걸 역순으로 봐서, 황야의 결투를 보다가 경악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원스어폰어타임 인 더 웨스트에서 헨리 폰다가 악역으로 나온 게 그와 필적할까 싶네요.)
3위
리오 브라보 (Rio bravo (1958)
감독 : 하워드 혹스
출연 : 존 웨인 / 딘 마틴 / 리키 넬슨 / 월터 브레넌
이 영화에 얽힌 유명한 뒷얘기가 있습니다.
프레드 진네만의 1952년작 '하이 눈'은 서부극의 대표적인 작품이죠. 악당 무리가 정오에 도착하는 기차를 타고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러 오고 있습니다. 은퇴한 보안관 게리 쿠퍼는 이를 막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러 다니지만, 아무도 도움을 주려하지 않자 결국 홀로 악당과 맞섭니다. 이야기는 10시 35분부터 12시까지 실시간으로 진행됩니다. 당시로선 매우 실험적인 시도였고, 매카시즘이 횡행하던 시절에 이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영화였습니다.
하워드 혹스는 이 영화의 내용에 꽤 분개했다고 합니다. 하워드 혹스의 말을 옮겨봅니다.
“존 웨인과 나는 〈하이 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 〈리오 브라보〉를 만들었다. 나는 좋은 보안관이라면 겁쟁이처럼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걸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보안관의 목숨을 살리는 것은 그의 퀘이커 교도 아내가 아닌가. 이러한 설정은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서부극이 아니다.”[네이버 지식백과] 하이 눈 [High Noon] (세계영화작품사전 : 고전 & 현대의 웨스턴 영화, 씨네21)
참으로 마초스러운 반응이죠.
그래서 나온, 하이눈에 대한 응답 같은 영화가 바로 '리오 브라보'입니다.
감독님 생긴 건 꽤나 학구적인데 말이죠. 이렇게 ...
암튼 영화 내용은 하이눈과 비슷하며, 매우 단순합니다.
텍사스 작은 마을 보안관 챈스(존 웨인)가 악당 죠를 감방에 잡아 넣습니다.
헌데, 죠의 동생이 부하 40명을 거느리고 형을 구하러 오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옵니다.
챈스는 혼자가 아닙니다. 술주정뱅이지만 심성은 착하고 순수한 부보안관 듀드(딘 마틴), 유쾌한 절름발이 노인 스텀피(월터 브레넌), 독고다이 명사수 콜로라도(리키 넬슨).
이 네 사람이 멋지게 악당들을 무찌른다는 초 간단한 내용이죠.
이 단순한 설정을 풍성하게 만드는 건 개성넘치는 캐릭터들입니다. 유치장을 끼고 있는 보안관 사무실이란 한정된 배경 속에서 악당들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네 사람이 부대끼며 만들어내는 관계, 리듬 이런 것들이 영화를 부족함 없이 꽉 채우고 있습니다.
이 영화 중간에 스텀피의 하모니카를 반주로 듀드, 콜로라도가 옛 노래를 부르는 명장면이 있습니다. 스텀피 역의 월터 브레넌은 위에 설명한 바 있습니다. 듀드 역을 맡은 딘 마틴은 우리나라엔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헐리우드에선 프랭크 시나트라와 비견될만한 커리어를 쌓은 대배우이자 수많은 명곡을 낸 가수입니다. 가끔 영화, 미드, 소설 속에 그의 음악, 그에 대한 언급이 단골로 등장하곤 합니다.
명사수 콜로라도 역의 리키 넬슨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유명한 가수입니다. 지금으로 치자면 아이돌 스타 두 명이 나온 액션 영화 쯤 되는데, 젊은 아이돌 스타를 데리고 희대의 캐릭터를 만들어 낸 하워드 혹스의 능력에 감탄하게 됩니다.
평생동안 다양한 장르를 섭렵한 감독 답게 이 영화는 코미디, 뮤지컬, 액션이 정신없이 섞여 있지만 모두 제자리에서 탁월하게 제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건 '죽기 전에 봐야할 1001편의 영화'에서 읽은건데, 훗날 존 카펜터와 조지 로메로 감독이 이 영화의 형식에서 '효과적인 저예산 영화 제작방식'을 터득했다고 합니다.
한정된 장소에서 캐릭터의 힘으로 충분히 긴장감 넘치는 영화 세팅이 가능하다는 걸 배운 거겠죠. 이런 식으로 이 영화는 저예산 장르 영화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한 사람이 모든 걸 가지면 안 되는 건데, 하워드 혹스 감독은 멜로 연출에도 탁월한 재능을 지녔습니다. 특히 말로 툭툭 주고 받는 스크루볼 코미디 장르의 거장 (히스 걸 프라이데이, 몽키 비즈니스 등의 걸작 코미디를 연출...) 답게 남녀가 티격태격하다가 사랑에 빠지는 설정을 환상적으로 잘 담아냈죠. 이 영화에서 존 웨인과 앤지 디킨스 사이의 감질나는 밀당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4위
롱 라이더스 (Long Riders (1980)
감독 : 월터 힐
출연 : 데이빗 캐러딘 / 키스 캐러딘 / 로버트 캐러딘 // 제임스 키치 / 스테이시 키치 // 데니스 퀘이드 / 렌디 퀘이드 // 크리스토퍼 게스트 / 니콜라스 게스트
월터 힐 감독은 라면으로 치자면 너구리, 과자로 치자면 치토스 같은 존재입니다. 1류는 아니지만 꽤 실력있는, 종종 생각나며 가끔 먹으면 맛있는, 하지만 너무 자주 먹으면 질리는 그런 별난 위치를 차지하고 계시죠.
필모그래피를 봐도 구로자와 아키라의 요짐보를 독특하게 리메이크 한 '라스트맨 스탠딩', 소소히 재밌는 흑백버디무비 '48시간', 미키루크의 '자니 핸섬', 전설적인 도심갱전투물 '워리어'를 연출하셨고, 무려 스핀오프 포함 에일리언 시리즈를 전부 제작하고 일부는 원안을 쓰셨죠. '코난-바바리안'을 만드신 존 밀리어스 감독과 상당히 비슷한 행보를 보였다고도 할 수 있고 ...
암튼 굉장히 특이하고 정력적인 활동을 하신 분이지만, 이 분 연출작 중에 역사에 남을만한 걸작이라고 한다면 이 작품 한편을 꼽을 수 있을 겁니다.
이 영화의 출연진을 저렇게 상세히 적은 이유는, 보시면 알 수 있듯 배우들이 실제 형제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걸 보시라고 한 겁니다.
실존 인물들인 제시 제임스 은행강도단은 제임스 형제 (배우는 키치 형제), 영거 형제 (배우는 캐러딘 형제), 밀러 형제 (배우는 퀘이드 형제), 포드 형제 (배우는 게스트 형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감독은 이들 모두를 실제 형제로 캐스팅 한 거죠. 영화에서 보면, 이 싱크로율이 대단한 효과를 발휘합니다.
최근 제시 제임스를 다룬 영화 중 유명한 게, 브래드 피트가 제작한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이란 영화가 있었습니다.
제목에서 여실히 알 수 있듯, 제시 제임스는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배신으로 죽습니다. 갱단 전체도 그 타격으로 대부분 죽습니다.
남북전쟁 이후를 다룬 은행강도 영화가 대부분 그렇듯 이 영화도 선악의 구분이 모호합니다. 제시 제임스 갱단은 상당히 잔인한 짓들을 자행하고 다니지만, 그들 역시 마을 자경단과 경찰 조직에 의해 가족들이 살해당하는 등 비극적인 일들을 겪다가 결국 배신당해서 처참하게 죽음을 맞습니다. 게다가 그들 꿈이 몹시 소박합니다. 전혀 이룰 수 없는 꿈이지만, 은행 강도로 목돈을 쥐면 멀리 도망쳐서 목장을 짓고 한적하게 사는 등 목가적인 비전을 지니고 있죠. 이런 면 때문에 순수한 여자들이 꼬여들기도 하고.
영화는 굉장히 노골적으로 샘 페킨파 영화를 모방, 계승합니다. 처음부터 대놓고 와일드 번치를 따라합니다. 하지만 나름의 독창적 매력이 있으며, 최후의 마을 전투 씬은 서부영화사에 길이 남을만한, 샘 페킨파도 흡족해 할만한 대단히 폭력적이고 탐미적인 아름다운 씬으로 완성되어 있습니다.
폭력미학 하면 반드시 거론되어야 할, 오우삼 감독에게 아마 큰 영향을 줬을 영화로 기억되어야 마땅합니다.
5위
자니 기타 ( Johnny Guitar(1954)
감독 : 니콜라스 레이
출연 : 조안 크로포드 / 스털링 헤이든
자니 기타에는 메르세데스 맥캠브리지가 연기한 엠마 스몰이란 악마적인 노처녀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한번 보면 꿈에도 잊혀지지 않을, 영화 사상 최강의 악녀 역으로 명배우인 스털링 헤이든, 조안 크로포드가 잊혀질 정도의
포스를 선보입니다.
내용은 세세히는 기억 안나는데, 비엔나(조안 크로포드)가 철도가
들어설 마을에 기차역을 짓고 싶어하는 선술집 주인으로 등장합니다. 그녀는 엠마 스몰을 비롯해 그녀를 혐오하는 마을 주민의 해코지가 두려워 옛 애인
자니 기타(스털링 헤이든)에게 술집을 지켜달라고 부탁합니다.
항상 검은 드레스를 입고 다니는 대지주의 딸 엠마는 댄싱 키드라는 좋아하는 청년이 있는데, 댄싱 키드는 비엔나를 흠모합니다. 엠마는 실상 키드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끔찍이 욕망하죠.
아마 그 때문에 엠마는 비엔나를 광적으로 싫어하고, 결국엔
마을 사람들을 선동해 마녀사냥을 자행합니다. 그 와중에 키드를 목매달아 죽이고, 비엔나의 술집을 불태웁니다.
비록 영화 내용은 자세히 기억 안나도, 엠마가 불지른 선술집 앞에서 양팔을 벌리고 서 있는 무시무시한 장면은 아직까지 기억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대략 이런 포스 ... 엠마 스몰이라 쓰고 ㅂㄱㅎ라 읽어도 무방한 ...
서부영화 사상 가장 독특한 서부극이라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6위
석양의 갱들 ( Duck, you sucker (1971)
감독 : 세르지오 레오네
출연 : 로드 스타이거 / 제임스 코번
이 영화엔 세 가지 다른 제목이 존재하는데, 뭐가 원래 제목인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한 영화에 수많은 판본이 존재하는 이탈리아 영화의 전통인지 ...
위 제목 외에도 'Once upon a time in the revolution', 'fistful of dynamite' 이런 제목이 존재합니다.
Duck, you sucker은 극중 제임스 코번이 자주 쓰는 대사인데, 처음엔 놀림으로, 중간엔 친근하게 다가오다가 마지막에 굉장히 슬픈 대사로 반복됩니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영화 답게 끝내주게 오락적인 대 활극입니다.
유명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무법자 삼부작, 원스어폰어타임 연작에 비해 묻히는 감이 있는데, 이 시리즈들에 비견할만한 독특한 매력이 있는 작품입니다.
세르지오 레오네 팬 중 이 영화를 가장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엔리오 모리코네의 음악도 임펙트가 상당합니다. 촌스럽고 직접적으로 심금을 울립니다.
폭탄 전문가인 제임스 코번은 IRA 요원이었는데, 친구의 배신으로 모든 걸 잃고, 간신히 목숨을 건져 미국으로 도피했습니다.
로드 스타이거는 길거리에서 역마차를 터는 가족 강도단 두목인데, 우연히 제임스 코번과 만나게 되어 그의 졸병으로 사상 최대 은행털이에 동참합니다.
그러다 어쩌다가 멕시코 혁명에 합류하여 ... 짧은 인생, 혁명전선에 한 목숨 바치게 되는 스토리 ...
로드 스타이거와 제임스 코번은 나란히 아카데미 수상 경력이 있는데,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죠.
저는 로드 스타이거를 상당히 좋아하는데, 끌로드 샤브롤 감독의 '더러운 손'에서도 멋진 중년 아저씨 연기를 보여줍니다.
7위
알프레도 가르시아의 목을 가져와라 ( Bring me the head of Alfredo Garcia (1974)
감독 : 샘 페킨파
출연 : 워렌 오츠
워렌 오츠는 이 영화 한 편으로 자신의 커리어를 다 써도 됩니다. 굳이 괜찮은 몇 작품 더 있긴 하지만, 이 영화 속 캐릭터가 압도적입니다.
영화 제목에 내용이 전부 응축되어 있는데,
멕시코 마약왕에게 애지중지 딸이 있습니다. 헌데 딸이 날건달 같은 알프레도 가르시아 란 놈과 결혼을 한다고 합니다.
분노한 마약왕은 딸을 집에 가두고, 부하들에게 알프레도 가르시아의 목을 가져오라고 명령합니다. 누구든 목을 가져오면 거액의 상금을 준다고 하죠.
워렌 오츠는 미국 작은 도시의 피아니스트인데, 마약왕 부하들이 그에게 알프레도 가르시아의 행방을 묻습니다.
눈치가 백단인 그는 돈 냄새를 맡고, 자신이 먼저 그를 찾아 돈을 받아내기로 합니다.
헌데 이 여행이 굉장히 초현실적이고 비극적으로 변질되어 가죠. 모든 것을 잃은 워렌 오츠는 알프레도 가르시아의 머리를 찾긴 하는데, 이 모든 비극을 벌인 마약왕을 자신의 방식으로 응징하기로 합니다.
이 영화는 반은 하드보일드, 반은 멕시코 웨스턴을 섞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권총을 든 갱들이 등장하는 현대 범죄극이긴 하지만, 전형적인 후기 서부극의 정서를 담고 있습니다.
'애수의 서부극'을 말한다면, 그 무드와 압도적인 캐릭터 면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쓰는 도중에 시간이 모자라서, 아래는 순위만 적습니다.
전부 할 말 많은 영화긴 하지만 흑 ㅠㅠ
8위
서부의 사나이 ( Man of the west (1958)
감독 : 앤서니 만
출연 : 게리 쿠퍼 / 줄리 런던
9위
아파치 ( Apache (1954)
감독 : 로버트 알드리치
출연 : 버트 랭카스터 / 진 피터스
10위
돌아오지 않는 강 ( River of no return (1954)
감독 : 오토 플레밍거
출연 : 로버트 미첨 / 마릴린 먼로
쓰다보니 50년대 영화가 가장 많군요.
서부영화의 문법이 익숙치 않은 분들도 최소한 위의 리스트들은 무리 없이 재밌게 보실 만할거라 생각해서 꼽아봤습니다.
익무의 서부화를 꿈꾸며 ㅋㅋ
scorberg
추천인 4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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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익무 규칙은 여길 클릭하세요
나름 국내에서도 인기 많은 스파게티 웨스턴보다도
고전들을 많이 소개해주셨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원래 서부극 사천왕 하면 존 웨인 / 개리 쿠퍼 / 제임스 스튜어트 / 헨리 폰다 인데, 우리나라에선 한번에 떠오르는 배우가 클린트 이스트우드겠죠 아마.
샘 파킨파 작품과 세르지오 작품만 본 것 같네요.. 워터힐 감독작은 본것 같은데... 기억이 거의 나지 않고..
저도 어렸을땐 서부영화 무지 보고 자랐는데 최근엔 제작이 거의 없다시피 하니깐 접할 기회가 없습니다.
그래도 필력이 좋으셔서 글을 읽었을 뿐인데 한편의 '영화' 를 본것 같습니다. ^^
1위는 꼬꼬마 어린 시절에 "하나도 재미없어" 라고 불평하며 보았었죠. ㅋㅋㅋㅋ
(그때는 서부극은 일단 5분에 한 번씩 총을 쏴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2위는 소떼가 강을 건너는 장면만 생각이 나네요. [굿바이 뉴욕, 굿모닝 내사랑]에서 대놓고 오마주를 해서 그랬나...
3위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서부극이죠. 저도 [하이눈]에 대해 하워드 혹스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ㅋㅋ
5위는 "오 자니~ 자니 기타" 하던 노래가 참 좋았던 것만 기억에 남네요.
어린 시절 토요명화나 명화극장에서 서부영화도 자주 틀어주고 했는데,
요새는 진짜 일부러 찾아보지 않으면 볼 수가 없게 되었네요.
간만에 서부영화에 대한 향수에 빠질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좋은 글 감사드려요~
하이눈에 대한 하워드 혹스의 견해는 저는 좀 심했다고 생각합니다. ㅋㅋ 이런 힙합스러운 대놓고 디스라니... 당시에 프레드 진네만이 진짜 섭섭해했다고 하네요.
글이 상당히 정성이 느껴지는 글입니다. 이 글 쓰는데 상당한 시간이 들어갔을 듯. 영화를 본 것 처럼 생생한 글.... 추천입니다.
그나마 자동완성기능이 있어서 조금씩만 날려먹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그래서 날라간 문단이 몇 개 되네요 ㅋㅋㅋ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이전엔.. 정말 가벼운 이탈리언 서부극만 많이 보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리스트가 낯설지만.. 꼭~ 찾아 보고 싶네요..
헐~~~ 서부영화는 정말 많이 못봐서 하나도 모르는 영화에요 시간이 되면 꼭 찾아볼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