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인의 여걸

[14여영호] 1972년 정강 감독 작품.

60년대까지 홍콩 영화계는 여배우들의 세상이었다고 합니다. 영화의 크레딧에도 여배우 이름이 제일 먼저 뜨고 홍보에도 여배우들 이름을 앞세우고, 남자 배우는 여배우들의 상대역 정도... 심지어 그 여배우의 상대역이라는 것까지 여배우가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뭐... 그시대에 동성애에 관대했다는 소린 아니고, 성별상 남자인 역할까지 여배우들이 했다는 거죠.

그러다가 장철이라는 사람이 나타나면서부터 판도가 단번에 뒤집어져버렸다고 해요. 장철의 푸시하에 왕우가 모든 여배우들을 제치고 독보적인 스타로 떠올랐고, 그 뒤로 강대위-적룡, 이소룡으로까지 이어지면서 홍콩영화계는 남자배우들이 점령하게 됩니다. 특히나 운동신경과 체력이 요구되는 무술 영화 장르에는 남성들이 두각을 나타낼 수 밖에 없기도 하죠.

그런 와중에 쇼부라다스는 뒷전으로 밀려나고있던 여배우들을 한방에 출연시키는 올스타 프로젝트를 내놓았습니다. 그 이름도 [14인의 여걸]
뭐... 어찌보면 좀 앞서 나왔던 장철의 남성 올스타 프로젝트인 [13인의 무사]의 여성판으로 나온건 아닌가싶기도 한데... 어쨌거나 숫자가 더 많군요^^

중국에서 겁내 유명한 전설인 양가장 이야기를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역사상으로 양업, 양육랑, 양문광 이렇게 3대에 걸쳐 나라에 충성했다는 명문 양씨집안의 실화에다가 양념을 듬~~뿍 쳐서는 그 짙은 양념에 묻혀서 실화따위는 저기 어디론가 증발해버린 이야기입니다.

이야기꾼들은 양육랑과 양문광 사이에 양종보라는 인물을 창조해서 원래는 양업의 손자인 양문광을 양업의 증손자로 만들어버렸고(양문광이 아버지나 할아버지에 비하면 업적이 쳐지거든요...) 양업의 아내인 사태군과 양종보의 아내인 목계영도 창조했습니다. 이 두사람이 양가장의 실질 주인공이라 봐도 좋고, 그중에서도 목계영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협입니다. 워낙에 많은 창작물에 주인공으로 등장했고, 허구인물임에도 중국 사람들은 실제로 있었던 위인인줄 아는 경우가 많다고합니다.

[14인의 여걸]은 양종보가 서하와의 싸움에서 전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미 양업의 대에서부터 양씨 집안 남자들이 줄줄이 전사해서 집안에 남자가 거의 없는 상태에 가장인 양종보까지 전사하고 그 아들인 양문광은 아직 어려 양씨집안에 남자가 없다고 업신여김을 당하게 되자, 집안의 어르신인 사태군이 양씨집안에 넘쳐나는 과부들과 딸들을 데리고 직접 출정해서 서하를 털어버리고는 남자들의 콧대를 눌러버린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실제로 있었던 일은 아닙니다. 송나라라는 나라가 변태적으로 국방력이 약해서 허구헌날 주변국들에 털렸는데 이야기꾼들이 그걸 뒤집어서는, 일개 집안에서 일으킨 사병이 송나라를 주구장창 괴롭혔던 주변국을 털어버렸다고... 정신승리를 한 겁니다.
역시 송나라가 배경인 '수호전'에서도 일개 산적집단이 요나라를 털어버리죠.

'수호전'은 무협이라고 하는 장르의 시조격이고, 근현대에 무협소설이 성행한 것 역시 현실에서는 서구열강과 일본에게 내내 털리기만 하던 중국인민들의 정신승리를 위해서였다고 하고... 현대의 무협영화에서도 중원의 절륜한 내공으로 서양의 대포따윈 가볍게 찜쪄먹어버리니까... 이런 형태의 정신승리는 중국무협물의 기본속성이라고할 수 있으니 그러려니 해야합니다.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가운데 이야기를 끌어가는 중심인물은 사태군과 목계영, 양문광 세사람입니다.
사태군역은 헐리우드에서 활동하다 홍콩에 돌아온 리사 루가 연기하고 있고, 사실상 주인공인 목계영역은 쇼부라다스를 홍콩 최고의 영화사로 밀어올린 1등공신이었던 능파가 연기합니다.
목계영의 '아들'인 문광역을 당대 최고의 인기여배우였던 하리리가 맡아서.... 딸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앞서 이야기했듯이 예전 홍콩영화에서는 여배우가 남자역할을 한 경우가 많으니 그러려니 해야합니다.
역시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던 리칭이 양업의 딸들중 양팔매 역할로 나옵니다. 비중은 상대적으로 적은편...

모자지간으로 나오는 능파와 하리리의 실제 나이차이는 7살입니다. 근데 능파는 리칭의 조카며느리역인데 리칭의 나이는 손자뻘로 나오는 하리리보다 어립니다. 근데도 여배우들이 캐릭터의 나이를 반영하지 않고 늘 나오던 모습대로 나오고 있어서... 그것도 뭐 그러려니 해야합니다.

감독인 정강은 감독 보다는 각본가로 더 유명하지만 감독으로서도 왕성히 활동했습니다.
정강의 아들이 그 유명한 정소동입니다. 이 영화에 양소송과 함께 무술지도로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14인의 여걸]은 73년 국내에 개봉해서 크게 화제가 되었습니다.
당시 영화 치고는 스케일 크고 액션도 아주 실감나고 자극적이었습니다.(지금봐도 그렇다는 보장은 못함) 특히 '인간다리' 만드는 장면은 전설이 되어서 영화 안본 사람도 어디선가 들어는 봤다고할 정도입니다.
 

1984년에 나온 쇼부라다스 영화 [오랑팔괘곤]이 이 영화의 프리퀄이라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는 양업과 양육랑이 나옵니다.

한국의 명배우 이혜영님이 이 영화를 보고는 배우가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80년초에 비됴로 출시되었습니다.(이 비됴가 현재 나와있는 공식 DVD보다 덜 잘렸던듯...) 껍데기에는 다른 영화에서 가져온 사진 하나만 달랑 붙여놨었는데, 한때 (국내에 하나뿐이던) 모 영화잡지에서는 그 비됴를 '제목만 봐도 뻔한' 에로물로 취급한 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