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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Dilbert Dilb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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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기에 앞서, 굳이 부제를 붙이자면 "어서 오세요, 편집증의 세계에" 정도가 좋겠군요.

아무래도 [미션 임파서블4]나, 리부트된 007시리즈나, 영역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본]시리즈나, 좀 멀리가면 [자니 잉글리쉬]시리즈가(....) 첩보물에 대한 어떤 고정관념을 심어줬나 봅니다. 도입부 장면이 지난 후 30분이 꽤나 집중하기 힘들더라구요. 하지만 노골적으로 "우린 유럽에서 만든 아트하우스풍 영화다!"를 외치는 분위기와 떼로 몰려나와서 근사한 억양으로 떠들어대는 영국배우들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그 "드라이함"(오동진 평론가의 발언을 인용하자면)을 음미할 수 있게 되더군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도입부는 - 그러니까 오프닝을 제외하고 말이죠 - 우리가 기존에 봐왔던 첩보조직, 혹은 정보부에 대한 어떤 관념을 상큼하게 들어엎어주면서 시작합니다. 이곳은 카리스마 있는 보스가 간달프에 비견할만한 통찰력을 발휘하고, 시선의 움직임에 맞추어 안면인식기능을 수행하는 특수안경따위의 첨단제품을 제깍 제공해주는 판타지세계가 아닙니다. 일단 머리가 너무 많고, 단합도 잘 되지 않습니다. 관료적이고, 예산문제때문에 늘 아쉬운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아야 되고, 개인생활보장도 안되죠. 명성이 자자한 원작을 굳이 읽지 않더라도, 초반 30분정도를 보고 있으면 "아, 이거 30분에 한번씩 뭔가 때려부수는 그런 영화는 아니구나."라는 감이 오게 됩니다.


 

 기존의 스파이 스릴러들이 지니고 있던 장르적(?!) 특성들이 거세된 공간을 채워주는 것은 거대한 편집증적 기운입니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힘은 "선의의 우리편이 모여서 거대한 악 - 무슬림 테러분자거나, 빨갱이거나, 혹은 일본을 공격한다거나(응?) - 에 대항하는" 단합의 과정에서 오는게 아니라 "니가 내편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는데 일단 지금은 대놓고 걸리는게 없어서 봐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너를 믿어주기에는 껄쩍지근한 거시기가 마 있다...하는 그런 생각이 든다는 말을 하고 싶은 뜻이 있습니다 마...."와 같은 불신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강조되는 것은 (당연하게도) 타인을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스스로를 갉아먹게되는 인물들의 피폐한 모습입니다. 

 

 정보직 종사자들이 가지는 '밥벌이의 어려움'의 끝에는 결국 퇴락만이 남아있습니다. 한때는 모두가 모여서 떠들썩하게 웃고 즐길 때도 있었고, "영국인이라는 자부심"에 의지해 청춘을 불태울 때도 있었지만, 결국 이들은 박수받으며 커리어를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 명퇴당하거나, 그 옆에서 패키지로 떨려 나가거나, 퇴물 취급받거나, 은둔자적 삶을 살게 됩니다. 아니면 언제 내장이 뽑혀 나갈지 몰라 안전가옥을 전전하거나요. 이 소용돌이에서 반발짝 벗어나 있는 것 같은 스마일리 마저도 사실은 공허한 존재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베네딕트 컴베비치를 앞에 두고 칼라와 만났던 이야기를 하는 장면 기억 나시는지? 거기서 보이는 게리 올드먼의 얼굴은 "나도 첩보질로 평생을 밥먹고 살았지만 국가고 믿음이고 .... 아무것도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듯 합니다. 마치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박해일을 한참 노려보다가 "모르겠다 씨발.....밥은 먹고 다니냐?"할 때의 그것처럼 말이죠.

 

 영화는 그렇게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한 황폐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덤덤히 풀어내다가 끝에 가서 퍽큐를 날리고 맙니다. 상관은 병원 침대에서 엎어져 죽고, 옛날의 동지는 추억만 곱씹고 있으며, 경쟁자, 혹은 지금의 동지들은 몰락하거나, 폐인이 되거나, 죽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두시간 내내 지겨울 정도로 이 직업이 못해먹을 짓이라는 이야기를 봐왔습니다. 그런 직장의 탑에 우렁찬 박수소리를 배경으로 앉게 된다? 제가 보기에 이건 해피엔딩이 아니라 지독한 냉소입니다. [범죄와의 전쟁]의 대사를 기억력이 허락하는 한 인용해 보자면 "이 얼마나 좋은 세상"에서 한번 멋지게 살아보셔! 라고 비웃는거죠. 그러니까 이 영화는 구구절절한 '먹고사니즘'에 대한 이야기면서 동시에 '자유와 평등을 수호'하기 위해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한 시절의 바닥에는 이렇게 갉아먹힌 '수호천사'들의 산이 있었다고 고발하는 이야기이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지금이라고 달라진건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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