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 Samourai (1967) 프랑스 갱영화란 이런 것이다. 단연 걸작. 스포일러 있음.
파리의 우울.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파리의 거리. 몽상과 고독과 멜랑콜리. 세련되고 산뜻한 감성. 고독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 잘 연마된 보석처럼 세련되고 간결한 스타일.
이 갱영화의 정체성은 이것이다. 이 영화 제목과는 달리, 이 영화는 사무라이와는 아무 상관 없다.
그냥 감독 장 피에르 멜빌이 사무라이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를 주인공 알랑 들롱에게 투영한 것이다.
"세상에 사무라이처럼 고독한 사람은 없다." 이런 문장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알랑 들롱은 철저하게 고립되고 고독한 존재다. 고독을 즐겨서가 아니다. 고독이 그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철저한 고독과 고립이 그의 정체성이다. 마치 사무라이처럼, 그는 철저한 고독과 고립을 강한 정신력으로 견디어 나간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그는 갈라파고스처럼 혼자의 룰에 따라서 살아간다. 이 룰을 위해 그는 언제라도 배를 가르고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자기 주변에 아무것도 두지 않는다. 철저한 무소유, 철저한 고독과 고립, 철저한 공허의 세계다. 이 영화의 알랑 들롱은 암살자이지만, 현대사회에서 실존적인 인물을 상징하는 것같기도 하다.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는다.
처음 장면이 아주 유명하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 철저한 정적과 고요함. 사방 벽지에는 곰팡이가 끼어있고, 쾌적한 것 아름다운 것은 하나도 없다. 그는 이불도 시트도 없는 침대에 누워 담배를 천천히 핀다. 푸른 연기가 어두운 방 위를 퍼져 나간다. 그리고 천천히 천장으로 올라간다. 이 공허하고 더럽고 아무것도 없는 방은 알랑 들롱의 내면이다. 알랑 들롱은 담배를 피며 무슨 생각을 할까?
나같으면 이 처절한 방을 즉각 박차고 밖으로 나가겠다. 하지만, 그 자신이 이 방이기를 선택한 사나이 - 그리고 그것을 견디어 나가는 사나이 - 늘, 사무라이처럼, 자신을 팽팽한 긴장 속에 놓아두는 사나이 - 그것이 이 영화의 주인공 알랑 들롱이다.
이런 캐릭터가 감독의 환타지가 된 이유는 모르겠다.
그는 킬러다. 돈을 밝히지도 않고, 사람을 죽이는 것을 즐기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그는 킬러를 할까? 이유는 없다. 그것이 그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사무라이가 자기만의 절도를 지키는 것처럼, 그도 자기만의 룰에 따라 움직인다. 의뢰는 반드시 완수한다. 그리고 목격자를 남기지 않는다. 주변에 아무것도 두지 않고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영화 킬러에서 마이클 파스밴더는 이런 캐릭터이어야 했다.
영화 내내 그는 무표정이다. 말도 거의 하지 않는다. 사람을 만날 때도 그는 무표정에다가 갈라파고스섬처럼 저 혼자 고립되어 있다. 이 사람에게 닿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고 팽팽한 긴장과 날카로움 속에 스스로를 가둔다.
하지만 이런 주제와 달리 영화는 아주 아름답다. 미남배우 알랑 들롱을 기용한 이유가 있다.
우락부락한 배우가 이 영화 주인공 킬러를 연기했다면 영화는 칙칙하고 건조한 것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미남배우 알랑 들롱이 고독한 킬러를 연기하고, 위와 같이 아름답고 멜랑콜리한 화면이 나오자,
영화는 세련된 아름다움을 가진다. 감독은 탐미주의적 예술가이자 스타일리스트이다.
그는 알랑 들롱을 통해 어떤 교훈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알랑 들롱은 어느 나이트 클럽 주인을 암살하라는 의뢰를 받는다. 그는 암살임무에 성공하지만, 클럽을 나오는 길에 흑인재즈여가수를 만난다. 그녀는 알랑 들롱이 살인자라는 것을 목격한다. 알랑 들롱은 웬일인지 그녀를 죽이지 않는다. 왜 죽이지 않았을까? 영화는 여기에 대해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머릿속에 "?"를 갖는 것은 아니다. 비유하자면 인셉션이 수수께끼들로 가득차 있다고해서, 사람들이 인셉션을 허술한 영화라도 생각지 않는 것처럼. 오히려 함축성과 신비함을 이 영화에 부여한다.
아무튼 이 일은 연쇄반응을 일으키고 일으켜서, 이후 알랑 들롱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자기도 죽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는 경찰에 의해 용의자로 체포된다. 하지만 재즈여가수는 웬일인지 그를 본 적 없다고 증언한다. 영화는 여기에 대해서도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재즈여가수와 알랑 들롱 간 관계도 애매모호 수수께끼 투성이다.
알랑 들롱은 재즈여가수를 찾아간다. 알랑 들롱은 지금까지 감정을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이 여가수에 대해서만큼은 감정을 보인다. 그런에 영화는 이상하게도 그들 간 감정의 정체에 대해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여가수가 증언을 안 하였기 때문에 알랑 들롱은 고마움을 느꼈다가 이것이 사랑으로 발전하였다"따위의
뻔히 보이는 전개는 없다는 말이다.
서로 어렴풋한 감정과 미소를 보이지만 그것이 다다. 둘은 명백히 어떤 감정의 교류를 하지만, 관객들은 그들이 감정을 교류하는 방식이나 그 감정의 정체에 대해 전혀 모른다. 사실 이 영화는 대부분이 알랑 들롱의 내면에서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이 영화 전체가 수수께끼다. 갱영화이지만 모호하고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영화다. 사실 이 여가수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겠다. 이 여가수는 이 영화에 나오는 유일한 흑인이다. 쟝 피에르 멜빌의 여타 걸작들에 흑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것은 없다. 하지만 뜬금없게 이 영화 여주인공은 흑인이다. 이것도 이상하다.
알랑 들롱은 여가수를 암살하라는 지시를 받고 여가수를 찾아 클럽으로 간다.
하지만 경찰이 몰래 잠복해 있었고, 알랑 들롱은 총을 꺼내다가 경찰들에게 사살당한다.
나중에 경찰은 알랑 들롱이 빈 총을 들고 왔음을 발견한다. 그는 자살한 것이다.
여가수를 사랑했고 이것 때문에 알랑 들롱은 그 빈 방에서 나온 것일까?
아니다. 그는 끝까지 그 빈 방에 남아 있었고, 팽팽한 긴장과 공허가 정체성인 인물로 남아있다가 죽었다.
그렇다면 왜? 무엇이 그를 할복자살로 이끈 것일까?
영화는 수수께끼 투성이다. 하지만 빈 틈 많은 영화라기보다 아주 단단한 영화로 느껴진다.
빈 틈이라기보다 탐미주의적인 모호함과 함축성으로 느껴지는 것이 이 영화의 특성이다.
프랑스 영화적인 감성과 투명함이 있지만, 영화는 감상적이거나 말랑말랑하지 않고
다이아몬드 표면처럼 단단하다. 차갑고 광물질이다.
이 영화 감독 멜빌은 이런 경험을 진짜 한 사람이다.
2차대전 중 레지스탕스로 죽음을 목전에 두고 팽팽한 긴장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그래서, 이 영화 속 알랑 들롱의 묘사가 아주 현실적이다. 그의 내면을 이해한다.
추천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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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_+
저도 멜빌 영화를 좋아합니다 !
수많은 작품들에 영향을 끼친 작품.. 오우삼도 많이 참고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