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캔 카운트 온 미 (2000) 스포일러 있음.
"너는 내게 의지할 수 있어"
고아가 된 어느 누나와 동생의 이야기다. 이만큼 따스한 이야기를 영화에서 보는 것을 좋아한다.
싱글맘 쌔미는 뉴저지 어느 작은 마을에서 평생 살아왔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미국의 작은 마을 - 모든 것이 반듯하고 잘 정돈되어 있고 깨끗하고 -
적당한 부촌이다. 마을사람들끼리 잘 안다. 함께 태어나 자라왔으니까.
쌔미는 그런곳에서 사는 것이 익숙해져 있다. 단 하나, 외롭다. 무슨 일 하나 일어나지 않는
조용한 마을이다.
그런 그녀에게 남동생 테리가 연락을 해 온다. 돈을 빌려달라는 것이다. 쌔미는 오랜만에 남동생을 만난다는
생각에 설레이며 기차역으로 나간다. 남동생은, 그런데, 돈만 받고 떠나가려 한다.
쌔미는 화를 낸다. 오랜만에 만나서 대화도 없이 그렇게 떠나가는 법 있냐고. 테리는 할 수 없이 쌔미의 집으로 함께
간다. 말쑥한 뉴저지 부촌의 깔끔하고 정장 입은 누나 - 다 떨어진 옷을 입은, 헝클어진 머리의 노숙자같은 동생.
부모님의 사고로 돌아가신 후, 누나와 동생은 서로를 의지하며 자라난 사이다.
테리는, 뉴저지의 쾌적하고 고독한 삶을 떠나서, 이리저리 떠돌며 막노동을 하며 살아 온 동생이다.
변변한 교육같은 것도 받지 못해서, 뭘 해서 먹고 살고 있나 심히 의심스런 동생이다.
쌔미가 동생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절절하고 애틋함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세상을 떠돌고 있을, 동생은 소식 하나 전하지 않았었다.
마크 러팔로가 동생 테리로 나와서 명연을 펼친다. 두서 없고 솔직 직정적이다.
예의 차리고 모든것이 반듯 규격에 맞는 이 동네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누나와 동생은 전혀 성격이 맞지 않는다. 동생도 이 숨막히는 뉴져지의 부촌이 참을 수 없다.
하지만 누나는 이 동생에게 무한한 애정을 쏟는다. 누나의 애정에 대한 갈망을 채워줄 수 있는 존재도 동생뿐이다.
남매는 서로를 이해한다. 하지만, 동생은 누나를 떠나서 세상을 떠돌아야 한다. 노숙자가 되고 길바닥에 쓰러져 죽을 지라도 그는 바깥세상에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타고났다.
여기에서 비극이 시작된다.
영화가 아주 조용하고 깔끔하고 투명하다. 이 영화는 아주 세련되고 섬세하고 아름다운 그림이다.
주제곡으로 영화 내내 울리는 바하의 무반주 첼로조곡처럼.
쌔미의 일상을 투영하는 음악이다. 이 영화는 사건 중심으로 흘러가는 영화가 아니다.
쌔미와 테리의 성격을 투렷이 각인하고, 그들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간극을 부각시킨다.
무한한 애정과 이해, 그러나 메울 수 없는 간극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 그들 간 관계이다.
쌔미와 테리가 함께 살기 시작하자, 테리의 이런 행동들은 쌔미의 조용하고 안정된 삶에 트러블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엉망진창이 되고 마는, 조용한 수면같은 쌔미의 삶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둘 간에 다툼이 일기 시작한다.
테리는 자기가 누나를 떠나야 할 순간이 왔음을 안다.
테리를 배웅하러 기차역에 온 쌔미가 테리와 함께 벤치에 앉아 기차를 기다리는 장면은 명장면 중에 명장면이다.
로라 리니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를 안겨 준 그 장면이다.
쌔미: 어디로 갈 거니?
테리: 글쎄...주차장에서 며칠 일해 여비를 마련해가지고...... 내가 임신시킨 여자친구를 만나러 갈까. 여자친구 아버지가 몇대 때리면 그냥 맞고......
쎄미: (정색하며) 누가 너 때리는 것 싫어. (울음을 터뜨리며) 최소한 어디 갈 지 그것이라도 정한 다음 떠나면 안 되니?
테리: 아냐, 어디로 갈 지 나 다 정해 놓았어. 가만 있자......그래, 알래스카로 갈 거야. 알래스카는 내게 늘 행운을 가져다 주었거든. 거기서 어떻게 돈을 모은 다음, 남쪽으로 내려갈 거야.
쌔미: (계속 울면서) 지금 헤어지면 다시는 못만날 것 같아.
테리: 아냐, 왜 못 만나. 쌔미, 내가 올해 크리스마스에 올께, 우리 함께 크리스마스를 지내자.
내가 어디에 있든, 어디에서 어떤 멍청하고 더러운 짓을 하고 있든, 나는 늘 기억할 거야. 여기 집에 내가 무슨짓을 하든 받아줄 누나가 있다는 것을. 여기 누나가 있다는 것을.
소위 글 잘 쓴다는 사람들은, 이 정도는 써야 한다. 구구절절이 가슴을 파고든다. 그리고 여주인공 로라 리니 그리고 남주인공 마크 러팔로의 명연도 대단하다. 톤 하나 높이지 않고 조곤조곤 말하면서,
감정의 진폭은 폭발시키듯 만들어내는 것이 대단하다.
동생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하면서 두서 없고 혼란스럽다. 세상을 정처없이 떠돌면서 방랑할 것이 분명하다.
아마 누나 걱정처럼, 이제 헤어지면 다시 못 볼 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생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무슨 상태로 돌아오든, 누나는 진실한 애정으로 동생을 맞아줄 것이다.
그리고, 테리는 도착한 기차를 타고 멀리 사라져 버린다. 플랫폼에는 쌔미 혼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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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정서에 맞는 듯도 하죠. 그런데, 이 영화 주인공이 동생이 아니라 누나 쌔미입니다. 누나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우리나라의 정서와 미국 정서 차이에 기인한 것이려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