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광수 교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비판론
역시 <스크린> 1989년 8월호에서 흥미로웠던 마광수 교수의 평론도 공유해봅니다. 기본적으로 문학을 전공하신 분이다보니 서사 위주의 비평이고 평생 그분께서 천착하셨던 주제인 성과 에로티시즘이 중심 화제지만, 시네마가 과연 무엇인가 혹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관해서도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는 평론인 것 같습니다. 물론 영화의 존재론과 윤리학에 관한 마광수 교수의 입장은 상당히 극단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제 동의 여부와 별개로) 성립이 불가능한 입장으로 보이진 않고요.
개인적으로 '걸작'와 '고전'는 약간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설령 걸작이 아닌 작품이라도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고, 엄청난 걸작도 고전의 반열에 오르지 못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고전이란 역사상 탑클래스의 반열에 드는 영화가 아니라, 영화에 관한 확고한 철학을 통해 보는 이가 영화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영화들입니다. 즉 걸작은 보면서 감탄이 든다면, 고전은 보면서 공부가 되죠.
그렇기에 (많이 보진 않았지만) 고전 영화들을 보면 볼 수록 과연 어떤 영화가 훌륭한 영화인지는 확정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측면에서 마광수 교수의 글이 불편한 느낌도 있고, 또 배울 점도 있는 것 같네요.
1.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분명히 문제작으로서의 요소를 고르게 갖추고 있는 작품이기는 하다. 그것은 매우 깊숙이 성(sex)을 다루었다는 검열관적인 시각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성을 제대로 다루고 있지 못하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결론부터 말해 이 작품은 결국 대단히 꼼꼼히 만든 외설물에 불과하다는 생각인데, 그것은 이 작품 및 이 작품을 만든 베르톨루치의 명성에 비추어볼 때 나를 무척 실망시킬 수밖에 없었다.
먼저 영화의 줄거리를 소개해보면, 중년 남자 뽈(말론 브란도)과 20세인 잔느(마리아 슈나이더)는 아파트를 구하는 과정에서 서로 우연히 만나게 된다. 처음 만난 그들이 빈 아파트에서 이루어내는 장면은 성급하고 격렬한 정사. 다음 장면은 잔느가 그녀의 공식적 애인인 톰을 만나는 것. 톰은 일종의 영화광으로 그녀의 모든 것을 카메라에 담기에 바쁘다. 잔느가 "그래서 키스했군요. 영화인 줄을 알면서 비겁하게..."라고 화를 낼 때, 그녀는 어느 정도 그와 같은 약혼자의 태도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하지만 잔느는 결국 그 약혼자와 결혼하려 한다.) 한편 뽈에게 결부된 사실은 그의 아내인 로자의 죽음이다. 그것은 자살로 추정되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면도칼로 난자된 상태에서 죽었으며, 그녀를 난자한 그 면도칼은 뽈의 것이 아니며 이발사용 면도칼이라는 것이 각각 뽈과 잔느의 말을 통해 제시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로자는 여관의 주인으로서 같은 여관에 사는 마르셀이라는 정부뿐만 아니라 어쩌면 다른 많은 남자들과도 정을 통하고 있었다는 것 등이 암시된다. 그리고 그같은 사실은 뽈에게 깊은 상처로 긁혀져 있다. 뽈의 다음과 같은 대사. "..... 5년 동안 나는 당신의 남편이라기보다는 이 너절한 여관의 손님에 불과했어. 물론 조금의 특권은 있었지..... 당신은 두 남편을 만들고 만 거야. 무슨 말인지 알기나 해? 당신과 내가 관계한 회수가 맞녀석과 당신이 관계한 회수가 맞먹는지 어떤지를 물어볼 용기가 없었어....."
뽈에게 있어 또다른 상처는 그의 어릴적 기억이다. 즉 뽈의 아버지는 주정꾼이며 난잡한 폭군이었다. 어머니 역시 시적(詩的)이지만 술꾼이었다. 결국 그의 가정은 그가 어렸을 때나, 또는 어른일 때나 모두 한결같이 왜곡된 것으로서 나타난다. 이같은 사실은 잔느의 경험과는 극단적인 대조를 이룬다. 잔느에게 있어 그녀의 아버지는 아름다운 기억, 하나의 완벽성으로 존재한다. 그녀의 다음과 같은 대사. "대령은...... 대령의 두 눈은 푸른 빛이었고 그분의 부츠는 번적였어요. 나는 그 분을 신처럼 사랑했어요. 군복을 입은 모습은 아주 멋있었고요." 이 말에 대해 뽈이 반발할 때, "그 분에 대해선 농담하지 말아요"라고 쏘아붙일 정도로 잔느는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관계에 있어 뽈과는 정반대의 태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점은 영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데, 그것은 영화의 마지막 부분 잔느가 뽈을 권총으로 쏴죽이기 바로 전 장면에서 뽈이 잔느 아버지의 군모를 머리에 쓰는 행위를 함으로써 상징화된다. 즉 그 군모는 잔느의 아버지, 그가 속한 계급의 권위 및 잔느의 엘렉트라 컴플렉스적 사랑의 매개물로 의미되는 것인 바, 이때 그 모자를 쓰고 껌을 씹으면서 장난스럽게 군대식 경례를 하는 뽈의 행위는 그녀의 아버지의 유품을 통해 상징되는 권위에 대한 신화파괴의 기호가 된다면, 잔느가 그러한 행위를 하는 뽈을 죽일 뿐만 아니라, "난 저 사람을 몰라...... 그는 거리에서부터 날 쫓아왔어. 그는 날 겁탈하려 했어. 그는 미친 사람이야. 나는 그의 이름도 모르는 걸"이라고 하며 뽈을 부정할 때, 그녀는 뽈과 성행위를 함으로써 한때는 스스로도 연루되었던 신화 파괴 행위 자체를 압살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뽈과 잔느는 결정적으로, 그리고 회복 불가능하게 이별한다. 즉 잔느는 뽈을 저대적으로 부정함으로써 뽈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그와 관계된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바, 그것은 자기 스스로가 속한 계급관계, 또는 대령의 모자로 상징되는 기존의 가부장적 질서 속으로의 복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때 뽈과의 모든 행위는 하나의 비정상성, 또는 일탈로 규정된다.
2.
여기까지 소개된 줄거리로 보았을 때 문제는 이중적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심리학적으로 설명되는 성의 문제와, 계급적으로 설정된 성의 문제라는 이중적 규정을 지칭한다. 다시 말해 이 작품에 나타나는 성은 이 두 가지의 규정성이 첨예하게 만나는, 또는 헤어지는 것으로서의 성이며 그런 의미에서 아름답다기보다는 착잡하며, 순수하다기보다는 얼룩진 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색깔을 가진 성은 우리를 답답하게 하고 괴롭힐 수는 있으되 우리를 즐겁게 하거나 우리의 성적 욕구를 카타르시스시키지는 못한다. 바로 이같은 점이 이 영화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분위기이며, 우리를 짜증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이 영화의 여러가지 장점, 이를테면 뭉뚱그려 표현하여 영상의 아름다움 등을 평가하지 못하게 하는 이 영화의 한계인 것이다. 그러한 한계의 대표적인 예는 계속되는 지루한 대사이다. 그것은 어쩌면 심리학과 정치학을 동반하며 성을 이야기한 것과도 상통하는, 이 영화 스스로의 자기방어일 것이다. 다시 말해 성은 그것 그대로, 또는 적극적으로 묘사되어진다기보다는 은폐되거나 소극적인 역할에 만족하도록 억압되어진다. 마치 진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데 있다는 듯한 태도인데 이것은 성을 그린 모든 실패한 영화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속성이다. 그것은 비겁한 '양다리 걸치기'인 바, 보통 어정쩡한 문제의식을 전면에 내세우며 스스로가 포착한 관점, 즉 카메라 렌즈에 포착됨으로써 이미 그 중요성이 부여된 핵심적인 사실(예를 들어 육체의 묘사)을 스스로 부정해버린다. 그러한 경우는 우리나라 영화에서도 예외는 아닌데, 그러한 경향의 대표적 예는 영화 <매춘>이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제시한 것은 상류 포르노이다. 그것은 실제로 매춘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적절히 문제화하지도 못했으며, 그렇다고 성의 묘사를 통해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한 것도 아니다. 이 영화가 이룩한 것은 관능적 상상력을 통한 건전한 대리배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매춘에 대한 유치한 호기심의 부추김이었으며 결국 윤리에 호소함으로써 성 그 자체를 극단적으로 억압한 것이었다. 거기에 나타나는 것은 억압적인 것으로서의 윤리와, 상품화된 것으로서의 성이라는 잘못된 두 극단일 뿐이다. 그 어느쪽도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성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그 이유는 결국 영화 스스로의 자기방어, 구구한 자기변명식의 '양다리 걸치기'에 있다.
이같은 '양다리 걸치기'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경우, 새디즘이라는 또 다른 탈출구로써 표현된다. 즉 이 영화에 나타나는 새디즘은 관능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우리를 카타르시스시키는 효용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다기보다는 프로이드적 의미에서의 변태, 파괴적인 새디즘에 가까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뽈의 상처와 관계되어 있다. 뽈은 잔느의 항문에 치즈를 바르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의 개 같고 시궁창 같은 가문, 아-제기랄 우라질." 이러한 대사와 결부된 새디즘이란 관능성의 극치, 또는 섹스의 상승 매체로서의 새디즘이 아니라 순수한 파괴, 즉 가문으로 상징되는 질서에 대한 착잡한 부정 및 혐오일 뿐이다. 그리하여 무도회장에서 엉덩이를 까는 뽈의 행위는 비웃음이거나 도전일 뿐, 남성의 관능미에 도달할 것이 의도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성은 일종의 반항이나 거부로서 의도되며, 바로 그런 의미에서 심각하게 파손된 성질의 것이다. 그리고 그같은 결과를 초래하게끔 하는 주범은 성을 성 그대로 보여주지 못하게 하는 '양다리 걸치기'인 것이다.
3.
이 같은 '양다리 걸치기'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또 다른 예로 얼마 전에 개봉되었던 이탈리아 영화 <셀리아느의 스캔들>이 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이다.
전쟁 중의 이태리 어느 소도시를 배경으로, 대학교수인 남편과 사춘기의 딸을 둔 미쇼 부인. 그녀는 그녀가 경영하는 약국의 종업원 아르망과 내연의 관계를 맺게 된다. 이때 그 관계는 결국 파국을 향하게끔 준비되어진 것. 최초에 그 관계는 아르망의 실수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는 같은 약국의 여종업원인 줄리에뜨와 미쇼 부인을 혼동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을 때 아르망은 오히려 미쇼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며 그녀에게 접근하기 시작한다. 미쇼 부인과 아르망 사이에는 주인과 종업원이라는 계급적 차이가 가로놓여 있다. 그것은 최초에 미쇼 부인에게는 아르망과의 관계를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이었던 반면, 아르망에게는 오히려 그의 성적 호기심을 더욱 부채질하였던 조건. 온갖 야비한 술수와 위협으로 아르망은 결국 미쇼 부인 위에 군림하게 된다. 그는 미쇼 부인을 발가벗겨 약국 앞의 거리를 걷게 하기도 한다. 마치 자신의 열등한 계급적 위치를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듯 그는 미쇼 부인에게 온갖 새디즘적 가혹성을 실험한다. 그는 그녀를 철저히 괴롭히는데, 그러한 변태적 새디즘의 절정에 도달한 것은 미쇼 부인의 딸 저스띤느에 대한 아르망의 요구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미 미쇼 부인의 심리적 파국은 모두 준비된다. 모성과 질투심 사이에서 그녀의 신경질적 반응은 최고조에 이른다. 아르망의 위협 속에서 남편에게 자신의 부정을 고백하지만 이미 어쩔 수 없다. 자기 스스로 아르망에게 딸을 데려다주는 미쇼 부인. 결국 미쇼 부인은 독약을 먹는다.
<셀리아느의 스캔들>에 나타나는 성은 너절하다는 의미에서 그야말로 스캔들적인 것이다. 그 너절함의 핵심은 어디 있는가? 그것은 순수하게 성 그 자체가 추구되지 못한 것에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 영화가 내포한 도식화된 계급적 갈등의 구조이다. 즉 경제적 관점에서의 약자인 아르망과 경제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미쇼 부인과의 관계이다. 이 같은 지배, 피지배의 관계는 성을 통해 역전된다. 미쇼 부인이, "난 그의 창부가 되어서 복종의 즐거움을 배웠어요. 그가 시키는 일이라면 난 무엇이든지 해요. 만일 그가 숨을 쉬지 말라고 하면 반드시 숨을 멈춰서 죽을 거예요"라고 그녀의 남편에게 고백할 때 그녀는 완전히 아르망의 성적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르망은 성을 통해, 성을 무기로 자신의 지배계급에 대해 보복하고 있다. 여기서 성은 일종의 폭력으로 기능한다. 바로 이 점은 이 영화에서 보이는 새디즘의 지저분한 불건강성의 핵심적 이유이다. 그리하여 영화는 아름답게 육체를 포착하지도 못했으며 그것을 통한 대리배설을 유도하지도 못했다. 그것은 결국 한 가정의 파괴와 미쇼 부인의 자살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심리적 우울을 증폭시켰을 뿐이다. 그렇다고 성을 도구화한 그 같은 계급갈등의 부각이 사회적, 계급적 문제에 대한 진지하고 타당한 비판을 제기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영화 <셀리아느의 스캔들>의 '양다리 걸치기'는 성과 사회학 양쪽 모두에서 그야말로 양다리 걸친 실패를 낳고 말았다.
4.
그러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진정한 에로티시즘은 이와 같은 왜곡된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들의 억압된 성적 갈등을 미학적으로 해소시켜줄 수 있는 실제적 효용을 지닌 것이어야 한다. 그러한 효용은 영화를 봄으로써 우리의 관능적 상상력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게 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우리에게 하나의 환상, 또는 꿈의 세계로서 경험되어져야 한다. 달리 말해 우리의 에로티시즘 영화는 우리에게 일종의 '깨어있는 꿈꾸기'를 가능하게 하여야 한다. 이 때 카메라 렌즈에 포착된 모든 것은 영화라는 예술장르로서 관습화되고 매개된, 적극적 관음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어떠한 류의 도덕적 변명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될 것이며, 사회학적 문제에 대한 왜곡된 해결책일 수도 없다. 순수하게 성을 묘사하고 있는 카메라는 그것 스스로가 자유로운 상태에 있음으로 해서 우리 역시 자유 속에 있게 한다. 이때 카메라는 우리들의 자유를 선취하고 있으며 우리들 자유의 한 보증물이 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카메라라는, 관객으로써 집단화된 시각의 매개물이 가진 사회적 책임과 역할이 논의될 수 있다. 순수하게 성을 묘사한 영화에서 나타나는 새디즘, 마조히즘은 관능적 오르가즘의 상승 메커니즘으로써 기능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적극적으로, 또는 긍정적으로 규정되는 새디즘-마조히즘일 것이다. 그것은 실생활에서의 음양의 법칙과도 상통한다.
우리는 누구나 음양의 조화를 꿈꾼다. 그러나 새디즘과 마조히즘이 이같이 적극화되지 못할 때, 우리가 살펴본 영화에서와 같이 그 어떤 다른 목적에 의해 소극적으로 또는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남으로써 양다리 걸치게 될 때, 그것은 언제나 심각한 파괴와 폭력으로 복수하게 된다. 그것은 조화의 원리라기보다는 치열한 대립의 원리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고통을 줄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은 비유적으로 말해 카메라 렌즈의 고통을 의미한다. 카메라는 억압받고 있다. 과거에 데모 장면을 찍을 수 없었던 사실을 상기하라. 그같은 억압으로 인해 카메라는 자꾸 곁눈질하게 되는 것이다. 성을 묘사하면서도 자꾸 번명한다. 실제 피사체는 이것이 아니라는 식이다. 우리의 영화는 이러한 카메라의 자기방어를 극복해야 한다. 카메라로 하여금 그 스스로 포착한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도록 하지 말아야 한다. 프로이드적 변명도, 마르크스주의라는 포장도, 또는 그 어떤 교훈주의적 일탈도 모두 우리의 꿈을 방해할 뿐이다. 단지 선정적일 뿐인 저질 에로물의 핵심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꿈꾸고 있다. 자궁같이 어둡고도 편안한(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모든 것이 보이고 진행되는 영화는 얼마나 편안한가!) 영화관 속에서 환상적인 '카메라의 리얼리즘'에 빨려들고 싶다.
캘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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