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평식 평론가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추천비평
최근에 입수한 <스크린> 1989년 8월 호를 보니 흥미로운 글이 많더군요. 물론 가장 끌리는 건 숀 영, 켈리 르브룩, 커트니 콕스, 위노나 라이더, 이미연, 트레이시 로즈 등 아름다운 여배우들의 눈부신 얼굴이 담긴 화보들이지만.....
흥미로웠던 글들로는 당시 모스크바영화제 경쟁부문에 <아제아제 바라아제>가 노미네이트 된 것을 기념해(이때 故강수연 배우님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셨죠) 작성된 모스크바영화제 취재 기사. 영화평론가 유지나씨가 쓰셨더군요. 또한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안제이 바이다 감독의 작품세계 특집기사, 브라이언 드 팔마의 <침실의 표적>의 각색 소설, 잡지 전체에서 가장 진지한 비평이었던 마광수 교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비판론 등도 모두 흥미로웠구요. 하지만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건 잡지 말미에 영화평론가 4인이 당시 극장 개봉작들을 대상으로 추천비평을 쓰신 대목인데, 김소영 조희문 등 (어떤 의미로든) 이제는 상당히 유명해진 평론가들이 썼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젊은 날의 박평식 평론가가 강우석 감독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에 대해 추천비평을 쓰셨더군요. 그 글 공유합니다.
이제는 귀기울여야 할 청소년들 목소리
"...난 앉아서 공부만 하는 그런 학생은 싫은데... 난 꿈이 있는데... 난 친구가 필요한데... 난 로보트도 아니고 돌멩이처럼 감정이 없는 물건도 아닌데... 엄마,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비탄스러운 이 목소리는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마무리하는 주인공의 독백이자 막 피어나는 젊음을 스스로 끊어버린 처절한 유서이기도 하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 청소년들이 가지는 가장 큰 고민의 90%는 '공부와 진학'이라고 한다. 그 결과 한 해 100명이 넘는 청소년들이 성적이나 입시문제로 자살을 한다고 하니 정신질환을 앓는 숫자는 확인해 볼 필요조차 없는 일이겠다.
입시위주 교육제도의 병폐는 학부모들만 아니라 온 사회의 초미(焦眉)의 관심사가 된 현실이다. 이 영화는 몇 년 전, 우리 사회와 교육계를 심한 부끄러움으로 되돌아보게 했던 어느 여자 중학생의 비극적 죽음을 모티브로 삼아 성적순이 결코 행복이 될 수 없다는 교과서적인 결론을 내린 작품이다.
농촌 출신 총각들의 결혼문제를 싱그럽게 묘사한 코믹터치의 멜로드라마 <달콤한 신부들>을 가지고 함께 데뷰한, 감독 강우석 시나리오 김성홍 컴비가 이번엔 우리 청소년들의 절박한 세계에 애정어린 포커스를 맞추었다. 입시열병을 지나 입시지옥으로까지 불리는 오늘의 교육현장이 무대다.
<행복은~>는 건강한 청소년 코미디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무작정 하이틴만은 겨냥한 것은 아니고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공부, 1등, 명문학교'만을 강조하는 어른들을 꼬집는, 마치 '웃음 뒤의 칼날' 같은 영화다.
한 번도 수석을 놓쳐 본 일이 없는 고교 2년생 은주(이미연 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부유한 환경의 은주가 친구도 없고 취미도 가지지 못한 채 기계처럼 학교와 집을 오가는 까닭은 극성이 지나쳐 위협이 섞인 뒷바라지를 하는 어머니 때문이다. 늘 꼴찌만 하면서도 영화감독을 지망하는 뚱보 천재(최수훈 분)와 은주를 좋아하는 꺼벙한 봉구(허석 분), 그리고 가난하지만 정직하게 살아가는 복싱선수 창수(김민종 분) 등이 급우들로 나온다. 여기에 호랑이 체육교솨(이덕화 분)의 인간미와 양호교사(최수지 분)의 미모가 화면을 훈훈하게 꾸민다.
강우석 연출력과 김성홍 시나리오의 특장(特長)은 행동의 디테일한 묘사와 폭소를 끌어내는 유니크한 대사를 꼽을 수가 있다. 따라서 관객들은 영화감상의 원초적 본능인 '재미'를 넉넉하게 맛볼 수 있게 된다. 화장실에 숨어 담배 피우기, 시험장의 진기명기한 컨닝작전, 가슴 죄며 성인영화 훔쳐보기, 짝사랑에 불 댕기기 등 치기무쌍한 학창시절의 삽화를 빠른 속도로 그려간다. 신선한 얼굴들이 풀어놓는 웃음 보따리에 묻혀 청소년들은 충분한 스트레스를 해소할 것이고, 어른들은 빛바랜 앨범을 펼쳐보는 것 같은 추억의 나른함에 잠기게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오락적 기능에만 몰두하는 삽화 일변도의 서술은 주제의 실종을 가져온다는 점이다. 특히 양호교사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갖가지 해프닝은 그 화면 점유율이 지나치게 높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이 점은 라스트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또한 가난한 창수의 등장과 사건전개는 극의 흐름과 주제 표출에 걸림돌이 되었다. 쓰레기차와 자가용->절도사건->난투극->선도위원회->화해->포옹의 대립방식은 느슨하기 짝이 없고 오늘의 교육현장이라기엔 너무 낡은 스토리 라인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커다란 아쉬움으로 남는 것은 은주가 죽음을 택하기까지의 진행과정이다. 은주의 자살이 우발적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성적 저하와 어머니의 매몰찬 성격이 얼핏 스쳐가지만 자살 동기로는 표피적이고 빈약할 뿐 아니라 설득력도 없다. 갈등 구조의 허술함과 심리 묘사의 결여가 그 원인일 것이다.
게다가 옥상에서 투신하기 직전의 은주 모습은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실연당한 여인처럼 꿈꾸는 듯한 환상의 클로즈 쇼트인데 그렇게 여유있게 분위기 잡고 급추락할 이유가 있는지 의문이 간다.
신인감독에게 요구되는 것은 비록 투박할지라도 패기와 진지함으로 주제를 끝까지 끌고 가는 치열함이다. 몇 가지 미흡한 점에도 불구하고 온 가족이 모여 유쾌함과 위로와 격려를 나누게 될 영화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살고 있는 기쁨을 느끼고 있는 흐뭇한 상태'라고 국어사전은 '행복'의 뜻 풀이를 한다.
그렇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닌 것이다.
캘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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