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혈가두 (1990) 홍콩느와르의 걸작. 일급 베트남전쟁 영화. 스포일러 있음.
홍콩느와르에 대한 인식을 확 바뀌게 만든 걸작이다.
그 이전까지 홍콩느와르하면 저예산으로 뒷골목 갱들이 나와 권총을 쏘아대는 영화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이 영화는 지옥의 묵시록 타입 대규모 예산 영화다. 그리고 성공한 영화다.
베트남전쟁에 뛰어든 세 친구들의 비극을 너무나 절절하게 그려내서 감동을 안 받을 수 없다.
베트남 전 영화라고 하면,
기울어 가는 국가와 사회. 부정부패와 살인, 페시미즘이 판치는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으려 하지만
거대한 사회와 함께 몰락해 가는 주인공. 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결말. 절대 잔인, 절대악, 절대 고독, 절대 파멸에
직면한 주인공이 서서히 현실에 젖어가며 죽음으로의 긴 여정을 떠나는 과정. 전쟁의 잔인함 등이 다 드러나야 한다.
이 중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고 다 생생하게 살려낸 영화가 몇이나 있을까? 이 영화가 그런 영화다.
이렇게 생생한 묘사가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영화에 그려진 베트남의 풍경이 당시 홍콩의 풍경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중국반환을 앞두고 체제가 공산주의 속으로 편입되어 기존의 자유, 가치, 질서가 서서히 몰락해 가는 것을 직접 목격하며 그 속에서 발버둥치지만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 말이다. 영화 속에서는 몰락 직전 베트남의 풍경으로 그려지지만, 당시 홍콩의 절망적인 풍경이다.
홍콩 뒷골목에서 가난하게 자라난 세 친구 양조위, 장학우, 이자웅은 끈끈한 우정 빼면 모든 것이 다 다르다.
당시 홍콩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출구가 없다. 세 친구들은 돈도 없고 교육도 못 받았고 직업도 없다. 그저 가슴이 뜨거워지면 자전거를 타고 더러운 거리를 달려 바닷가 바로 앞까지 다다른다. 그리고 서로 시덥지 않은 농담을 하면서 돌아온다.
양조위는 자기 분수에 맞는 여공과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별 것 없는 결혼을 한다. 삐까뻔쩍한 파티같은 것도 없다.
허름한 식당 하나를 세 내서 식사나 한다. 그런데, 그 식당에 줄 돈조차 없다. 장학우는 자기집 집문서를 담보로 돈을 빌린다. 그 돈으로 양조위 결혼식 식당에 돈을 주려는 것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깡패들에게 돈을 빼앗길 뻔한다.
양조위는 그날밤, 난생 처음으로 살인을 한다. 장학우를 상처 입힌 잔인한 깡패두목을 죽을 때까지 두드려팬다.
때리다 보니 죽었다가 아니라, 일부러 살해한다.
그리고 양조위, 장학우, 이자웅은 당시 전쟁 중이던 베트남으로 도피한다.
홍콩에서는 꿈도 미래도 없지만, 혼란스러운 베트남에 가면 한 몫 잡을 기회가 무궁무진하다는 말에 세 친구는 베트남으로 온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것은 세 친구의 순진한 기대를 훨씬 더 뛰어넘는 잔인한 것이었다.
베트콩에 점령 직전이면서도, 미군 앞에서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미군 물러가라."는 시위를 하는 사람들. 남베트남 군인들에게서 작전정보를 빼돌려 베트콩에게 팔아넘기는 사업가들. 당당히 대낮에, 무장트럭을 몰고가 귀굼속상점 직원들을 기관총으로 쏴죽이고, 귀금속을 훔쳐 달아나는 군인들. 전쟁이 일어나자 폭발하는 화염 속을 뚫고 달아나는 민간인들. 이것은 혼란 정도가 아니다. 다들 공포와 절망에 지쳐서 미친 것 같다.
이 장면들이 무시무시한 설득력을 가지고 그려진 것은, 오우삼감독의 능력이 아니라, 당시 시대의 힘이 아니었을까? 직접 공포 속에 들어앉아 자기에게 닥쳐오는 것을 묘사하는 것 말이다. 남들이 아무리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감동을 조합해 보아도, 경험적 현실은 못 따라간다.
이것을 그냥 말로 때우는 것이 아니라, 탱크도 동원하고 헬리콥터도 동원하고 엑스트라들도 많이 동원해서
지옥의 묵시록 타입 대규모 전쟁의 참상을 설득력 있게 재현해낸다. 오우삼이 블록버스터급 영화를 만들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낸 영화다.
베트남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세 친구의 사투가 이 영화를 이룬다.
총상을 입어 신음하는 장학우때문에 몰래 수풀 속에 숨은 이자웅은, 수색하는 베트콩에게 잡힐 위기에 처한다. "둘이 다 죽는 것보다는 너 하나 죽는 것이 낫겠다" 하면서, 이자웅은 장학우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는다. 그리고, 베트남을 떠나 홍콩으로 도주하는 데 성공한다. 이자웅을 누가 욕할 수 있을까? 총상을 입어 운신도 제대로 못하는 장학우를 데리고 베트콩을 피해서 최후의 최후까지 도망간 다음에, 할 수 없이 장학우를 쏜 것이다.
장학우, 이자웅의 연기는 아주 훌륭하다. 이자웅은 잘못하면 그냥 악역이 될 수도 있었는데, 이자웅의 섬세한 연기에 의해 복합적인 인물이 된다. "나는 평생 많은 꿈을 꾸어 본 적 없는 사람이야. 유일한 꿈이 황금이야. 이정도도 나에게 허락이 안된단 말이야?"
양조위는 총을 맞고 혼수상태가 되어 강변에 버려졌다가, 베트남 사원의 승려들에 의해 구조되어 그곳에서 머물게 된다. 머리에 총알이 박혀 미치광이가 된 장학우는, 머리에 박힌 총알의 고통때문에 마약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아무도 살지 않는 폐허에서 대충 살며, 마약을 위해 아무나 죽이는 살인자가 된다. 양조위는 친구가 그렇게 고통 받으며 폐인처럼 사는 것을 볼 수 없어, 그를 죽이려 한다. 이 장면이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장학우는 최후의 순간에 정신을 차려 조용히 양조위의 총구를 잡아 자기 심장에 갖다댄다. 이미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절절한 눈빛으로 양조위를 바라본다. 우정, 자기를 죽여달라는 말, 만나서 반갑고 이런 일을 하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 그 모든 것들이 이 눈빛 안에 담겨 있다.
양조위는 장학우의 해골을 들고 홍콩으로 돌아온다. 이자웅은 베트남에서 가져온 황금으로 범죄조직에 투신하여 높은 위치에 올라 있었다. 그는 이자웅에게 할 말이 하나 있었다. "꼭 죽여야 했다면 머리를 제대로 쏘아 죽이지, 왜 그렇게 어설프게 해서 그 친구를 고통에 빠뜨렸냐?" 장학우가 친구인 것만큼 이자웅도 친구다. 양조위는 이자웅도 이해한다. 어릴 적부터 그가 얼마나 자기 비참한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는지 잘 안다.
나중에 양조위는 이자웅을 습격해 죽이려 한다. 하지만, 이자웅에게 당해서 오히려 총상을 입고 쓰려진다.
이자웅은 자기도 죽을 뻔했으면서도 양조위를 죽이지 않는다. 아마 그도 양조위를 이해했을 것이다.
이자웅은 총구를 장학우의 해골로 향한다.
"왜 날 따라왔니? 어떻게 해야 사라져 줄래? 총을 한 방 더 쏘면 사라질래?" 하지만 차마 쏘지 못한다. 양조위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얘가 눈을 감지 않고 날 똑바로 봐. 그래서 쏠 수가 없어. 네가 좀 쏘아줘라. 나도 이 지긋지긋한 고통에서 해방되어 보자."
양조위는 깨닫는다. 너도 고통 받고 그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 살고 있구나. 너도 장학우랑 똑같구나.
양조위는 트라우마상태인 이자웅을 쏘아죽인다. 그리고, 장학우를 안았듯이 이자웅을 안아준다.
출구 없는 상황에 놓인 세 친구들 간 벌어지는 비극이다. 기본적으로, 미래도 꿈도 없는 홍콩의 상황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리고, 세 친구들의 정신을 붕괴시킨 베트남전쟁의 참상이 그 다음 원인이다.
양조위는 두 친구들을 죽였다. 그는 다른 두 친구들을 이해한다. 그래서 죽인 것이다.
홍콩느와르가 암울한 페시미즘으로 유명하지만, 이 영화는 그 극단에 있다.
오우삼감독은 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지옥의 묵시록을 만드는 과정처럼 힘들었다고 했는데,
과연 이 영화를 만들었을 때 그의 머릿속에는, 지옥의 묵시록이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가 지옥의 묵시록보다 감동적인 이유는, 그 안에 인간적인 스토리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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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영화 황혼기의 걸작중 하나죠. 첩혈쌍웅 보다는 못하지만 최고중 하나입니다.
다만, 엄청 아쉬운 점은, 한국에서는 상영 횟수 늘리려고 홍콩판에서 25분을 잘라서 개봉했고,
원 감독 초기 편집판은 3시간 넘었으나 홍콩 개봉판은 이걸 50분 가까이 잘러서 145분 버전으로 개봉, 그리고 한국은 25분을 더 잘라버림. 그나마 당시 VHS비디오는 상하권으로 홍콩판을 그대로 출시했고 극장보다 오히려 비디오로 보는 게 혜자였죠.(저도 봤음)
그리고 알려진 바로는, 90년대 중반 오우삼 스튜디오 화재로 오우삼 작품중 대부분의 필름 원본 소실되고, 이중 이작품 초기 편집판도 소실되어서, 현존 최고 버전은 165분 감독 편집판이라고 합니다.
해서, 이 영화의 진가를 보려면 극장판으로는 절대 봤다고 할수 없을 정도이라, 꼭 초기판이나 재편집판을 봐야 알 수 있다는 아쉬움이 있죠. 양조위 장학우의 신은 진정 눈물없이 볼 수 없는 장면입니다.
양조위와 장학우 잘생겼어요.
제작자 서극이 오우삼 감독을 해고하고 직접 <영웅본색3>를
만드는 바람에 양쪽 제작자 모두 쪽박을 찼죠.
저는 <영웅본색3> 마크(주윤발)의 진정한 프리퀄은 <첩혈가두>가 더 좋습니다.
젊은 시절 마크(주윤발)를 주윤발이 연기한 작품보다 양조위가 연기한 작품이
훨씬 더 좋습니다.
출구 없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워서...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이걸 내가 봤었나 하고 글 다 읽다보니 보긴 봤더라구요 ㅎㅎ
함 찾아서 봐야겠네요 ㅎㅎ
장학우 연기가 대단했는데 보고 울었던 기억이 나네요
철철철 넘치는 비장미... ㅠㅠ
실제로 반 정도가 베트남전 이야기라 베트남전을 다룬 여러 대작들과 유사한 소재가 많이 나오죠.
첨엔 그냥 느와르 이야기인가 했다가 중후반부 전개에 진짜 몰입해서 봤네요.
영자원 gv로 봤는데 그게 몆분 버전인진 모르지만 과거 국내 개봉때 삭제된 씬이 복원된거라고 하긴 했습니다.
수현&주윤발 영화포스터 아직도눈에 떠오릅니다
주인공 3인방의 연기도 좋지만 조연으로 나왔던 임달화도 좋았습니다. 첩혈쌍웅의 상징이라 할만한 주윤발의 흰 양복을 첩혈가두에서는 임달화가 입고 나오는데 여러모로 반갑더군요.
이 영화는 존재만 알고 못 봤는데.. 세기말적 비장미가 철철 넘치는 것 같네요.
이자웅은 여기서도 배신자 역을...^^;
나중에 제대로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