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리얼 페인(A Real Pain, 2024)> : 다른 사람의 아픔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
모든 이미지 출처: 영화 <리얼 페인>
힐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근 15년~20년 쯤 전이던가, '힐링'문화가 우리 사회를 강하게 치고 간 적이 있었는데 혹시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까 모르겠어요.
유형이든 무형이든 무언가 상품 앞에 '힐링'만 붙으면 프리미엄이 되었고, 그만큼 우리사회가 지쳐있다는 방증이라는 입장과 허상을 쫓는 거라는 반발이 공존했었죠.
재미있게도 이름만 달라졌을 뿐, 우리 사회의 갑론을박은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 같네요.
오늘 소개할 영화는 <리얼 페인>입니다. 실력파 배우 제시 아이젠버그가 직접 제작 및 연출로 나선 작품이죠.
그런데 미리 말씀 드릴게요. <리얼 페인>은 힐링물인데요. 실제로 작중 인물들의 아픔과 고통을 해소해주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위로'를 위한 작품인데요. 지난 번 <더 폴> 리뷰 혹시 보신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더 폴>은 이야기가 실제로 인물의 삶에 깊숙이 연관되어 작중 인물들의 삶을 실제로 바꾼 작품이었죠. 그런 점에서 <리얼 페인>은 현실적인 효과보다는 마음의 위로를 위한 작품입니다. 그 옛날 '힐링'의 의미와 상당히 비슷하죠. 자, 이 작품 어떨까요? 잘 만들어져서 정말 우리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작품일까요? 혹은 그저 빈수레를 요란하게 꾸며놓은 것일까요?
리얼 페인(A Real Pain, 2024)
감독 제시 아이젠버그
출연 제시 아이젠버그, 키에란 컬킨 등
국내 개봉 2024. 1. 14.
타인을 이해하는 것의 어려움과 위대함을
온 힘 다해 표현하는 영화
모두 2025년 첫 올해의 영화 후보에게 박수를 보내주세요.
<리얼 페인>은 타인의 아픔을 마주하는 정중한 진심,
전부 이해하거나 해결할 순 없어도 힘들어하는 네 옆에 있겠다는 든든한 용기,
그리고 세상 모든 아픔을 겪으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전하는 작지만 따스한 온기 하나입니다.
영화의 두 주인공 데이비드(제시 아이젠버그)와 벤지(키에란 컬킨)는 성격이 A부터 Z까지 모두 다른 사촌입니다. 전 두 사람의 MBTI가 영락없이 ISTJ와 ENFP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저 처럼 느끼신 분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유대인 가족인 두 사촌형제의 할머니가 최근 돌아가셨고, 형제는 할머니의 고향인 폴란드에 찾아가 할머니의 흔적을 돌아보기로 합니다. 보아하니 형제의 할머니는 2차대전 당시 나치의 위협을 피해 고초를 겪으셨던 것 같은데요. 이는 특히 할머니의 죽음을 괴로워했던 벤지를 위한 측면이 컸습니다. 어렸을 때 줄곧 붙어 다니던 두 사촌형제는 오랜만에 함께 여행을 떠나는 거죠. 형제는 유대인들의 아픔을 돌아보는 역사 패키지 여행을 따라갔다가 마지막에 따로 나와 할머니의 생가를 둘러보는 것으로 여행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자, 영화의 틀이 잡혔습니다. 이 영화의 모든 인물들은 각자의 아픔과 슬픔을 가지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하는 두 개의 아픔은 2차대전의 역경과 주인공 벤지의 아픔입니다.
주인공 벤지의 아픔이 무엇인지 정확히 딱 하나를 꼬집어 말해주지는 않습니다. 벤지는 사교성이 매우 좋고, 공감능력이 매우 좋으며, 대범해 보이지만, 실은 마땅한 직업 없이 외톨이로 지내고 있고, 늘 뭔가 깊은 우울에 시달리고 있으며, 이를 대마초로 해결하고 있고, 사랑했던 할머니를 최근에 잃고 있었죠. 결국 최근에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했었다고 합니다. 벤지의 삶은 그야말로 고통 그 자체입니다.
그런 벤지를, 우리의 ISTJ 데이비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죠. 데이비드는 이 사촌을 너무 사랑하지만, 성격은 아예 다르고 집도 멀어졌으며 이제 가족과 직장이 있으니 벤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소중한 어린시절을 함께한 나의 사촌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니, 함께 여행을 오긴 했지만 이 사촌은 때때로 별 것 아닌 일에 불같이 화를 내고, 갑자기 타인의 아픔에 너무 깊숙이 공감해서 눈물을 흘려버리기도 하며, 충동적으로 이것저것 일을 벌이는 기행을 일삼네요. 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눈치채셨죠? 이 사촌은 그냥 성격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영화는 고통 그 자체를 상징하는 벤지를 이해할 수 없는 타인 데이비드를 통해, 누군가의 아픔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줍니다. 심지어 어느정도 비슷한 사회문화적 배경을 공유하는 가족일지라도요.
그렇다면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아픔은 이 영화에서 벤지 뿐만이 아니겠죠. 유대인들이 겪은 그것으로 대표되는 전쟁의 아픔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영화는 서로 다른 두 아픔(벤지, 전쟁의 고통)을 병치시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대인 학살의 슬픈 과거를 교과서와 역사 프로그램을 통해 배우지만 그 당사자들이 겪은 아픔이 얼마나 큰지를 온전히 알 수는 없겠죠. 거대한 역사적 아픔과 개인의 아픔 모두, 우리는 제대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영화에서 주목할 것은, 그렇다고 이 영화가 벤지의 행동을 모두 정당화하거나 순수하게 미화시키기만 하는 것은 아니란 거죠. 벤지의 이상한 행동들은 분명 그가 겪고 있는 고통의 발로이자 표현이지만, 그렇다고 그의 언행이 다른 사람들(투어 참가자들)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자, 이 영화는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영화가 유대인들의 아픔을 다루는 방식도 매우 조심스럽고, 벤지의 아픔을 다루는 방식도 조심스럽고. 사실 마냥 조심스럽게 "타인의 아픔을 존중하자"라는 수준에서 끝났다면, 이 영화는 그저 그런 영화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영화는 거기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갑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네가 있음을 기억할게
벤지는 사실 마냥 할머니와 사이가 좋기만(?)한 것은 아니었죠. 심지어 할머니에게 뺨도 맞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벤지는 그 때가 정말 좋았다고 하네요. 역시 이상한 녀석이에요. 어떻게 뺨 맞은 게 좋을 수가 있나요?
"그 때 그 순간만큼은, 할머니가 온전히 내게만 신경을 쓰고 있었거든."
벤지가 바란 것은 문자 그대로 관심이었습니다. 누군가 나를 보아주기를, 욕을 하더라도 누군가 나를 신경써주기를. 신경을 써 준다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를 인지한다는 것. 그러니까 밴지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기억해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네요.
실은 벤지가 그래서 데이비드에게 속상했을 겁니다. 결혼하고 직장을 가지니 더 이상 나를 봐주지 못하니까요. 물론 데이비드 입장에서야 마냥 벤지를 신경쓸 수만은 없는 노릇이지만, 벤지는 그게 참 힘들었던가 봅니다. 재미있게도 바란 것은 그저 관심, 그게 다였으니까요.
영화는 그래서, 관심을 가져줍니다. 벤지에게, 유대인들이 겪은 슬픈 과거에.
역사투어 참가자들은, 그리고 후반부 할머니 생가를 찾아간 두 사촌은, 돌을 올려놓습니다. 묘비에, 그리고 할머니의 생가에. 돌을 올려놓는다는 것은 거기에 없던 무언가가 생긴다는 것. 누군가가 그 깊은 아픔을 기억한다는 뜻입니다.
데이비드는 집으로 돌아와 공항에서 헤어지기 직전 벤지의 싸대기를(...) 날려줍니다. 여전히 데이비드는 벤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벤지의 그 고통이 무엇인지 제대로 짐작할 수 없고, 그걸 해결해줄 수도 없죠. 그래서 데이비드가 알고있는 유일한 방식으로 벤지를 응원합니다. 할머니의 방식으로. 벤지는 이제 기억할 겁니다. 데이비드가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아 줬다는 것을요.
누군가의 아픔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내가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거나 해결해줄 수 없을지라도, 너라는 이가 여기 존재한다는 걸 내가 분명히 알고 있다고 이야기해주기.
<리얼 페인>이 세상 모든 아픔을 지닌 이들을 응원하는 방식이자 단순한 공감을 넘어 우리에게 던져주는 힌트입니다.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조심스러운 영화
이 영화, 참 조심스럽다고 말씀드렸죠? 바로 지난 번 <시빌 워:분열의 시대>가 의도적으로 전쟁의 잔혹함을 버르장머리 없이(...) 전달한 것과 반대로, 이 영화는 고통의 역사에 대해 한껏 예의를 차리고 있습니다. 흥겨운 컨트리음악의 bgm이 가득했던 영화가, 홀로코스트 유적을 찾아갈 때는 무음모드에 한껏 느려진 카메라워크를 사용한 것도 그렇고요. 아까 말씀드린 돌을 올려놓는 행위는 그 자체로 그 많은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헌사이기도 하죠.
벤지가 영화 중반에 보여주는, 열차 1등석 칸에 타서 고통의 역사를 배운다는 부조리함을 지적하는 예민함은 물론 다른 인물의 반응처럼 "뭐 저렇게까지??"싶을 수 있지만 과연 우리가 타인의 아픔에 얼마나 예의를 차리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볼 계기를 제공해주기도 합니다.
제시 아이젠버그가 이제 막 두 번째 장편을 연출한 것으로 아는데, 아주 신경을 많이 쓴 티가 역력하네요.
참고로 이 영화, 수미상관이죠? 영화는 벤지가 공항에 앉아 멍때리기 내지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끝나는데요. 두 장면의 벤지의 눈빛에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영화가 명확한 결론을 내려주지는 않았지만, 저는 긍정적인 변화가 있을 거라고 믿고 싶네요.
오늘 <리얼 페인>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동안 다소 장엄하고 거대한 스케일의 영화나 아주 깊은 사고를 요하는 영화들을 많이 봤는데, 경쾌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을 품은 영화라 좋았습니다.
영화의 미덕을 현실의 의도적인 왜곡이라는 파격에서 찾으시는 분들께는 추천드리기 어렵지만, 이런 따스함을 오히려 잃어가는 지금 이 시대에는 오히려 필요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좋아서 교육용으로도 손색이 없으려나... 싶었는데 대놓고 약물을 하는 장면이 있어서 그건 안 되겠네요. 좋은 건 아쉽지만 어른들끼리 봅시다...^^
블로그에 더 많은 영화 리뷰가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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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그린
추천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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