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1967) 김승옥 무진기행의 영화화. 원작소설 못지 않은 참신한 영화. 스포일러 있음.
김수용감독이 1967년 만든 이 작품은 원작소설 무진기행만큼이나 참신하고 혁신적인 작품이다.
김수용감독의 영상스타일이 참신한 것이다. 산뜻하면서도 투명하고 깨끗하다. 갯마을이나 산불같은 그의 문예영화를 보면 금새 느낄 수 있다. 김수용감독만큼 무진기행을 영화화하는 데 어울리는 대가도 없다.
당시 젊은 감독들이 나와서 "영상은 스토리 텔링으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같은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김수용감독은 "누가 그걸 몰라서 못한 줄 아느냐? 지금까지 투자자들에게 얼마나 시달려 왔는데......
" 하면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대놓고 모더니즘영화를 만든 것이다.
이 영화는 영상미를 강조했다, 신선하고 참신한 감각이 돋보인다, 시간과 공간을 마구 섞어서
매력적인 영화적 공간을 만들어냈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 영화가 전개된다 등을 들 수 있다.
젊은 신성일과 중년의 신성일이 만나는 장면도 나오고, 어떤 사건이 신성일의 과거에 대한 공상을 촉발시켜서,
영화가 시간을 거슬러 그 장면으로 느닷없이 이어지는 장면들도 자주 나온다.
다 당시로서는 엄청 새로웠을 것이다.
우리나라 모더니즘영화의 시작은 바로 이 영화다. 다양한 영상실험들이 나온다. 실험적이고 참신하고 지적이다.
동시에 쿨하고 간결하고 투명한 서정이 가득하다.
당시로서는 그러지 않았을까 추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보아도 그것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김승옥이 직접 각본을 썼다.
부잣집딸과 결혼해서 제약회사 상무가 된 신성일은 지루한 일상을 산다.
아마 그는 여기서 자기 스타파워를 활용했을 것이다. 모던하고 쿨하고 패셔너블한 사나이 - 그런
이미지를 당시 갖고 있었을 것이다. 스티브 맥퀸의 불리트를 보고 반해서
포드 머스탱을 직구해다가 경부고속도로를 전속력으로 달렸던 사나이니까.
인자하고 가정적인 성격으로 알려진 김진규가 모더니즘영화의 이 역할을 할 수 있었을까?
어느날 그는 서류에 결재를 하고 있는데, 손 위로 개미떼가 바글바글 올라오는 것을 본다.
신성일의 심리상태를 이런 초현실주의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과 짜증이 가득하다.
그는 고향 무진으로 잠시 다녀오기로 한다.
아무것도 없고 오직 안개만 가득한 고장이다. 사실 가상의 고장이다.
무진으로 가면서 그는 여러가지 공상을 한다.
스토리텔링과 무관하게 이런 공상들 (신성일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공상과 회상이 마구 섞여 있다)이
보여진다.
가령 중년 신성일이 시골길을 가는데, 젊은이가 밀짚모자를 쓰고 온다. 오래 전 청년 신성일이다.
그는 해맑은 얼굴로 중년 신성일을 보며 비웃는다. 그리고 영화는 갑자기 청년 신성일에 대한 이야기로 바뀐다.
이런 식으로 시간과 공간을 뒤섞어서 영화가 진행된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 영화가 구성되어 있다.
동시에, 신성일이라는 인물이 입체적으로 구축되어 간다.
유현목같은 거장이 이 영화를 만들었다면, 무겁고 철학적인 작품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의 영상 자체가
잉마르 베리만을 연상시키는 검고 무겁고 고통스런 흑백화면이다.
김수용감독의 영상은 아주 투명하다. 하지만, 무작정 가볍지는 않다. 고급스럽다.
그의 영상이 세련된 감수성과 참신함으로 이 영화의 모더니즘을 만들어낸다.
신성일은 고향 무진으로 오자 벌써 공허를 느낀다.
공허의 공간 무진 -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은 공허함에 지쳐 이곳을 떠나려고 한다.
신성일은 학교 교사 윤정희를 만난다. 세련되고 지적이고 미녀인 윤정희는
동료와 어울려 술자리에서 젓가락으로 장단을 맞추며 유행가를 부른다.
이 언밸런스한 저속함과 세련됨의 공존 - 신성일은 역겨움과 동시에 매혹을 느낀다.
둘은 섹스를 한다.
이 둘의 끈적끈적한 불륜도 아주 세련되고 산뜻하고 쿨하게 그려진다.
윤정희는 몇번 보았다고 신성일더러 서울로 데려가달라고 한다. 신성일은 자신이 윤정희를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스스로를 일부러 속인다. 자기에게 속아넘어가는 척 한다.
윤정희가 신성일 앞에서 안개라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유명하다. 실제로는 정훈희가 부른 노래다.
원래 소설에서는 푸치니의 나비부인 아리아 어떤 개인 날을 불렀다고 하는데, 이 노래가 영화 속 윤정희의
성격에 더 잘 어울렸을 것이다.
신성일은 아내의 연락을 받고 무진을 떠난다. 윤정희의 일은 기억에서 지워 버린다.
불륜도 섹스도 다 안개 속에 던져 버린다. 그것들은, 무진에 와서 그의 뇌리를 떠다니던 공상들 중 하나였다.
무진은 그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떠다니는 안개 같다. 윤정희도 실체 없는 안개입자들 중 하나로
무진을 떠다닌다. 그는 무진에 와서 자기가 경험하고 떠올리고 했던 모든것들을
쿨하고 부정하고 무진의 투명함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한다.
그는 무진과 결별하고 짜증나고 피곤한 현실로 돌아온다. 내가 이기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자 하고
중얼거리면서. 윤정희에게 그렇게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는 것이다.
신성일이 연기를 못한다고? 이 영화를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이 영상혁명을 신성일처럼 잘 연기해낼 수 있는 사람이 신성일 말고 어디 있었겠는가?
아마 투자자가 이런 실험적인 작품에 돈을 내었던 것도, 주연배우 신성일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워낙 많은 작품에 출연했기 때문에, 그가 출연한 걸작들도 적지 않다. 연기파배우들 중 신성일만큼 걸작에 출연한 배우도 많지 않을 것이다.
신성일은 이 영화에서,
중년의 지치고 공허한 남자, 청년, 불륜남, 에고이스트를 넘나들면서 매혹적인 연기를 펼친다.
신성일은 자기가 배우가 아닌 스타였다고 말했는데, 이것이 배우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한 시대를 상징하는 힘을 말하는 것이니까. 이 영화에 힘과 중심을 부여하는 것은
신성일이 가진 스타로서의 불가사의한 힘이다.
그러고 보니, 감독 김수용, 주연배우 신성일, 윤정희, 이낙훈 등 모두 세상을 떠났다.
이제 이 영화는 진짜 전설이 되었다.
추천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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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자부심이 대단한 작품이었네요
이영화를 직접 찾아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흑백영상이 특유의 감성과 잘맞아서 정말 인상깊게
본 영화였네요
좋은 소개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