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볼버> 리뷰 - 세 잔의 위스키
형사 하수영(전도연)은 2년 형기를 마치고 석방된다. 나와보니 아무도 마중 나오지 않았다. 터벅터벅 버스정거장까지 걸어가니 자기를 기소한 검사를 만난다. 바로 뒤따라 정마담이라는 여자가 위스키를 들고 반긴다. 누군지도 모르는데. 검사를 피해 정마담 차를 탄다.
수영은 동료 형사 임석용(이정재) 부탁으로 스스로 감방행을 택한다. 실은 부탁이 아니라 통보다. 차 안에서 부아가 난 수영은 석용 팔과 어깨를 손으로 때리는데 화난 아내가 남편을 타박하는 모습을 닮았다. 석용은 수영과 사귀는 사이였다.
수영은 이제 석용을 잊었다고 했다. 석용은 수영 "마음에서 썰물처럼 다 빠져나왔다." 하지만 수영이 받기로 한 돈과 아파트는 석용의 마지막 발자취를 따라가야 받을 수 있다. 석용은 석연치 않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감방에서 누워있던 수영은 티비에서 소식을 접하고 벌떡 일어났다.
첫 번째 술. 맥캘란. 옆 잔은 물이 차있다. 티 주전자에 물을 끓여 뜨거운 물을 부어 찬물과 섞어 미지근하게 담근다. 미지근한 물에 손가락을 담아 위스키 잔에 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린다. 이른바 미즈와리. 위스키에 물을 떨어뜨리면 향이 퍼지면서 풍미가 강해진다. 2년 동안 못 먹었던 술을 먹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잃어버렸던 자신을 되찾는 의식이기도 하다. 수영은 위스키를 이렇게 즐겼던 게 틀림없다. 후추 향으로 스파이시한 맥칼란을 이렇게 마셨던 게 틀림없다. 석용과도 함께 마셨을까. 수영은 과거를 마신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술. 앤디(지창욱)를 만나러 간다. 앤디는 약속한 돈을 준다면서 피를 뱉은 위스키를 마시게 한다. 주종을 모르겠다. 하지만 더 진해졌다. 물도 타지 않았다. 오히려 피를 섞었다. 꿀꺽꿀꺽 한 입에 털어 넣는다. 수영은 술꾼이다. 술을 즐겨 마셨던 게 틀림없다. 세 번째 술은 글렌피딕. 우디향이 근사한 싱글몰트 위스키. 정마담이 들고 온 걸로 봐서 수영이 즐겨먹지 않는 술일 가능성이 있다. 정마담은 마담 스타일로 얼음으로 가득한 물통에 위스키를 부어 마담 스타일로 마신다. 위스키를 차게 마시면 향은 줄어들고 알코올 도수 역시 내려간다. 정마담은 술을 파는 사람. 풍미가 아니라 매출로 술을 마신다. 수영과 정마담은 다음날 아침 '화종사'로 가야 한다. 임석용이 마지막 갔던 곳이었다. 우디향 가득한 글렌피딕을 마시고 깊은 산속으로 가게 된다.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 수영에게 “내 마음에서 썰물처럼 다 빠져나왔다"라는 대사를 준 건 결국 석용과의 감정이 정리가 됐다는 의미에서 그런 거였다. 그렇지만 수영의 행동을 보면 사실은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 생각하고, 그게 속박이자 굴레가 돼서 수영으로 하여금 계속 석용의 자취를 따라가게 만든다. 그렇지만 여기에 사랑이라는 말을 붙일 순 없다고 판단했다. 전도연 배우와도 그 감정이 사랑은 아니라고 이야기했었다. - 씨네 21, 오승욱 감독 인터뷰
하수영은 약속된 돈과 아파트를 좇아가지만 실은 임석용과 보냈던 과거를 되짚어가는 셈이다. 운이 나쁘게도 임석용의 마지막은 범죄 조직 '이스턴 프라미스'의 추악한 비밀과 맞닿아있다. 하수영은 하는 수없이 멜로와 스릴러 영화를 동시에 찍어야 한다. 그리고 중간중간 위스키를 마셔야 한다. 위스키는 지금 이 세상에는 없는 임석용 향기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자살당하기 전 임석용은 정마담에게 딱 하나 부탁한다. 수영이 출소하면 출소 선물로 위스키를 주라고. 위스키를 마시는 수영은 아직 석용을 완전히 잊지 않았다. 사랑이건 아니건. 미련이건 아니건.
클래식 누아르 '차이나타운'이 생각나는 모든 일이 끝나고 해변 노상 횟집에서 하영은 맹물처럼 투명한 소주를 한 컵 마신다. 이제 수영은 위스키를 마시지 않는다. 마실 필요가 없어졌다. 미지근한 물을 타서 마시지도 않고 남의 핏물이 섞인 위스키를 마시지 않아도 된다. 위스키는 과거 허영의 술. 지금은 소박한 소주다. 석용에게 바치는 한 잔. 드디어 모든 굴레와 속박에서 벗어난 자신에게도 한 잔.
리볼버 총 회전탄창이 빙글빙글 도는 듯 위스키도 자신을 가로막던 상대들도 수영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제자리에 놓는다. 수영에게 리볼버는 무기라기보다 묵주에 가깝다. 백팔 번뇌를 손끝으로 굴리는 염주와 같다. 수영에게 위스키는 술이라기보다 향에 가깝다. 절에서 기도를 올리기 전에 조용히 꼽아놓는 향. 스스로를 태워서 주위를 정화시키는 향. 이제 석용을 위해 향은 그만 피워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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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보는 문학적으로 근사한 리뷰였습니다^^
요즘은 맨날 하이볼만 먹었는데 오늘은 미즈와리 한번 해서 먹어봐야겠네요^^
술을 키워드로 한 멋진 리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