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 사태' 감상문(스포)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 했다. ‘투쟁’이라는 단어는, 사실 공산주의 해체 이후 다소 낡은 이념어로 고착된 경향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 곳곳에는 20세기 이전과 마찬가지로 곳곳에서 투쟁이 일어나고 있으며, 휴전국가에 발 붙이고 사는 우리 역시 크게는 북한과, 작게는 우리 삶의 비아(非我)와 투쟁 중이다. 신채호가 말한 ‘아(我)’는 개인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라는 공동체를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의 투쟁 역시 마찬가지다. 나를 위한 투쟁도 있지만, 좀 더 이타적이고 거국적인 연대를 통한 투쟁도 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나요?
영화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에서는 막다른 궁지에 몰려있던 이들의 연대와, 그 연대의 시발점인 낸 골딘의 삶을 동시에 그려낸다. 사실 앞서 언급한 이타적인 연대라는 것은 꼭 그 동기부터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낸 골딘의 투쟁에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거나, 거대 기업의 횡포를 반드시 꺾어 시민 개개인의 진정한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거창한 이념이 묻어나진 않는다. 그녀는 거침없이 말한다. ‘새클러 가에 대한 나의 분노는 개인적인 것이죠.’ 낸 골딘 및 그녀와 연대하는 이들의 동기는 사실 거대 기업이 고의로 망가뜨린 개인의 삶에 대한 적절한 보상과 그들의 횡포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그런 동기가 때론 유혈사태를 불러일으키더라도, 아름답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본래 가장 정확하고 훌륭한 보도는 가장 주관적인 것이다
미국 출신의 세계적 기자 옵솔 형제의 말이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불편한 좌파들의 시위를 정당화하는 편향된 영화라고 하겠으나, 되려 묻고 싶다. 이토를 쏴 죽인 안중근은 테러리스트인가, 독립운동가인가? 주관을 담지 하지 않은 사실 나열은 진실과 다르다. 그녀의 투쟁은, 영화 속에서 씨실과 날실처럼 얽히는 그녀의 ‘주관적인 삶 그 자체’를 들여다보지 않고 평가하기는 힘들다.
새클러 가는 중독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그 약을 그대로 판매하여 수많은 마약 중독자를 양산해 냈다. 타인을 죽여가며 불린 유산이 영화 챕터 2에 비치는데, 동시에 낸 골딘은 자기 자신을 찾아가며 얻은 자산을 보여준다. 영화는 대체로 챕터 제목에 의거하여 끊임없는 비교 대조를 통해 이야기를 전개해 간다.
특히 이 챕터에서는 사진을 접하게 된 낸 골딘이 사진이 진가를 발휘하게 되는 때를 보여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피사체로 등장한 자기 자신이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순간이 바로 그것이다. 빛에 반사된 자기 자신의 객관적 모습을 보며 주관적이기 그지없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그녀는 남들이 담기 원치 않던 날것 그대로의 감성을 드러냈다.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드렉 퀸의 삶을 살아간 그(그녀)들의 모습을 찍어주고 세상에 드러내었던 낸 골딘은, 자신의 추악함을 숨기기 위해 돈세탁을 하는 수단으로 미술품 전시 후원을 택한 새클러 가의 모습과 분명히 대조된다. 여기서 찾아가는 시위는 하나의 행위 예술이 된다. 숨겨지길 바라고 눌러져 있기를 원하는 목소리는 한데 어우러져 전시관 중심에 서게 된다.
낸 골딘은 자신의 성을 팔아 돈을 마련하여 살았고, 새클러 가는 누군가를 죽여가며 얻은 피 흘린 돈을 세탁하며 살아갔다. 정말 더럽게 번 돈은 무엇일까. 그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세상에 발을 디뎌낸 낸 골딘의 모습과 대비되는 새클러 가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그들은 짓밟을 타인의 삶이 필요했다. 무지한 환자가 있어야만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모습은 거대한 자금과 거대한 빌딩 사옥에 가려진다. 낸 골딘을 화제 인물로 만든 ‘성적 의존의 발라드(The ballad of sexual Dependency)는 의존과 자립 사이의 투쟁을 상징한다. 과연 누가 의존적이며 누가 자립적인가.
사실은 누구보다 의존적인 새클러 가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일을 하며 산다. 미술관 곳곳에 후원의 이름을 남기는. 하지만 생존을 위한, 있지만 없는 이들의 있음을 대변하는 낸 골딘. 치부조차 드러내려는 그녀의 예술과 삶은 치부를 가리려는 새클러 가와 또 한 번 대조된다.
저항할 수 있다면 희생자가 아니다
에이즈는 사실 동성애 문제로만 매도하기에 어려운 부분이 있다. 건강 보험 제도의 문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지만, 교회와 정치권은 이를 동성 간(특히 남성 간) 성관계를 하는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 버린다. 낸 골딘은 그런 이들을 데리고 전시회를 열며, 위대한 예술을 정하는 것은 교회도 국가도 아니라 자기 자신임을 천명한다. 에이즈 환자가 작가인 전시회를 열면 그것은 다분히 정치적인가. 하지만 정치적인 것이 그 자체로 문제인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서체를 인터넷으로 공유하는 것 또한 다분히 정치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월호 유가족의 글 전시회 또한 정치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되어야 하는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에이즈 환자들은 세상에 자기 삶의 흔적을 남기려 애를 쓴다. 사회와 제도는 그들을 지우려 하지만, 거기에 저항한다. 저항하는 것. 그들은 희생자가 아니라 저항하는 자로서 죽으려 한다.
다음 챕터에서 새클러 가의 제약회사 퍼듀파마의 파산신청 이야기가 나온다. 벌금, 보상금 지급을 피하고자 말이다. 새클러 가가 백억 달러 이상을 회사 밖으로 빼돌렸다. 이 돈을 몰수할 형사법상 근거가 사라지게 되었지만, 그런데도 낸 골딘과 연대하는 이들은 끝없이 시위한다. 챕터 제목 그대로 ’도피수단‘으로서 파산 신청한 새클러 가에게 끝없이 따라붙어, 자기가 당면한 문제 앞에 도망치지 않는 용기로 한 걸음씩, 서로 어깨동무하고 같이 드러눕고 한 목소리가 되어서.
마지막 챕터 제목은 ’자매‘다. 낸 골딘의 언니는 권력(부모)의 무관심과 억압으로 인한 희생을 당했다. 책임지려 하지 않고 부정하는 권력(부모+새클러 가). 낸 골딘을 만들어 낸 삶도, 낸 골딘이 지금 살아가는 삶도 결국 시작은 거기다. 고아원으로 쫓겨나 커튼을 불태우고 탈출한 낸 골딘의 언니에게 붙은 편견의 꼬리표. 그러나 그녀는 그저 House가 아닌 Home을 원했을 뿐이다. 살아있을 수 있는 집. 존재 그대로 인정받고 살아갈 수 있는 집.
처음 국가가 만들어질 때도 그랬다. 개인이 존재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안전한 제도를 위해 연대하고 계약하며 국가를 만들었다. 국가는 비실존체이나 개인은 실존한다. 허나 어느 순간부터 자본주의와 민족주의, 국수주의 등 비실존하는 이념에 개인이 점차 희생당하기 시작했다. 국가는 거대한 Home이 되어줘야 한다. 그러나 개인을 머릿수로 계수하려는 House가 되려는 순간, 그 속에 수없이 죽어가는 개인을 숫자 몇 개 바꾸는 것으로 대체하는 가장 비인간적인 제도로 전락해 버린다. 삐딱한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려면 삐딱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나 개인의 삐딱한 시선은 언제까지고 주변인들에게 좌파니 빨갱이니 소리를 들어야만 하는 것일까. 유혈사태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는 없을까. 아름다움을 말하면서도 결국 유혈사태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 그녀의 발걸음을, 조금 멀리서 응원하게 된다.
시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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