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크모드
  • 목록
  • 아래로
  • 위로
  • 댓글 5
  • 쓰기
  • 검색

<이니셰린의 밴시>, 그리고 마틴 맥도나의 천재성

일인칭시점
4943 7 5

tile-2.jpeg.jpg

 

고요하지만 맹렬한 비극삶의 폐부를 있는 힘껏 끄집어내는 갈등과 고뇌. 올해 <이니셰린의 밴시>로 영화계를 뒤흔든 천재 극작가 마틴 맥도나는 연극과 영화를 오가며 인생의 슬픈 단면들을 조명하기로 유명합니다. 그의 작품엔 거스를 수 없는 운명에 가로막히거나 이유 모를 상실감에 절규하는 사람들이 가득하죠.

 

개인적으로 올 아카데미 작품상에 노미네이트된 작품들 중에서 <이니셰린의 밴시>가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불꽃처럼 맹렬한 아일랜드의 현대사를 다뤘다면, <이니셰린의 밴시>는 물처럼 고요하게 흘러가는 개인의 삶으로 아일랜드의 현대사를 바라봤다고나 할까요. 
 

<이니셰린의 밴시>는 절친했던 두 남자 파드릭과 콜름의 갑작스러운 절교로 시작됩니다. 콜름이 파드릭에게 절교를 선언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그와 나누는 무의미한 대화가 싫어졌기 때문이죠. 콜름은 영문을 모르는 파드릭에게 죽은 뒤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 말합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 대화를 나눌 시간에 음악을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말하죠.

 

하지만 파드릭은 콜름에게 다정함이 남지 않냐고 되물으며 두 사람의 꼬인 마음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손수 만든 예술을 남기고 싶은 자와 평범하지만 따뜻한 다정함을 남기고 싶은 자의 갈등은 혼란한 시대를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대하는 아일랜드인들의 갈등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 영화의 배경이 1920년대 아일랜드라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말이죠.

 

파드릭과 콜름의 갈등은 1921년 체결된 영국-아일랜드 조약 이후 빚어진 갈등의 은유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일랜드의 자치를 인정하되 대영 제국의 휘하에 둔다는 조약의 내용을 두고 아일랜드인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 격렬한 갈등에 휩싸입니다. 찬성 측은 조약을 미래에 있을 완전독립의 발판으로 삼자는 의견을 내세웠고 반대 측은 전쟁을 불사해서라도 완전독립을 쟁취하자는 입장을 고수했죠.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함께 싸웠던 이들의 균열은 파드릭과 콜름 이 두 남자의 절교를 통해 더욱 선명해집니다. 변화를 꿈꾸는 누군가에겐 그저 평범하길 바라는 이가 따분해 보이고, 그냥 평범한 게 좋은 누군가에겐 변화를 갈구하는 이가 피곤해 보이듯이, 다름을 인정하기보단 배척하고 단절하려 애쓰는 모습은 당대 아일랜드인들의 분열을 대변하기에 충분하죠.

 

그렇다고 해서 영화는 두 사람의 갈등을 시대적인 아픔에 묶어두기만 하진 않습니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삶을 바라보는 자세에 따라 달라지는 관계의 본질에 집중합니다.

 

파드릭은 살아가는 과정에 의미를 둡니다. 다정한 마음과 저녁에 마시는 맥주 한 잔만으로도 삶의 의미가 충분한 인물이죠. 하지만 콜름에겐 죽음 뒤에 남겨질 결과가 더 중요합니다. 자신의 존재가 오래도록 기억될 수 있는 무언가를 남겨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에 휩싸여 있는 것이죠. 그렇게 영화는 두 사람이 가진 삶의 목표가 절대 교차될 수 없다는 걸 수없이 비춰줍니다.

 

파국으로 치닫는 관계에서 부각되는 키워드는 바로 착각입니다. 파드릭은 절교하자는 콜름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가령 만우절이라는 걸 알고 콜름에게 너스레를 떨거나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말해달라고 화를 내기도 합니다. 모두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여지가 자신한테 있다고 믿는 착각에서 비롯된 행동들이죠.

 

콜름도 착각에서 자유롭진 않습니다. 스스로 창작한 음악이 자신의 유산이라 믿으며 열과 성을 다하지만 정작 주변 사람들은 그의 음악을 따분하다고 여기죠. 모차르트까지 언급하며 음악에 남은 생을 쏟겠다는 그의 말로 미뤄보면 콜름은 단순히 음악을 남기는 걸 넘어 위대한 무언가를 만들고 남기고자 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주변의 미지근한 반응은 그의 결연함을 무색하게 만들 뿐이죠.

 

이렇게 마틴 맥도나는 착각이라는 개념을 통해 의지만으로 이겨낼 수 없는 한계에 가로막히는 인물들을 조명합니다. 파드릭은 말을 걸 때마다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던지는 콜름 앞에서, 콜름은 손가락이 사라질 때마다 연주할 수 없게 되는 바이올린 앞에서 체념의 정서를 마주하죠. 이토록 자기파괴적인 결과까지 불러오는 두 사람은 후반부로 치닫을수록 과연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에 봉착합니다.

 

영화 후반부터 마틴 맥도나는 21세기의 셰익스피어라는 별명에 걸맞게 불행한 운명에 직면한 인물들의 선택을 그려냅니다. 파드릭이 애지중지하는 당나귀 제니가 콜름의 손가락을 삼키다 죽게 되자 그는 콜름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셰익스피어식 복수의 근간이 되는 ‘개인 내부에서 진행되는 도덕적 갈등’을 조명합니다. 마치 햄릿이 복수를 위해 선택하는 살인엔 도덕성이 훼손되는 결과가 따를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끊임없이 고뇌하는 것처럼 말이죠.

 

햄릿의 복수는 결국 살인을 동반하지만 파드릭의 복수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이 아끼는 당나귀가 죽었으니 콜름이 아끼는 강아지를 똑같이 죽이겠다는 등가교환식 복수도 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콜름을 찾아가 친절하게 복수를 언제 어떤 식으로 단행할 것인지 예고하죠. 처음엔 체념한 듯 보였던 콜름은 끝내 죽음을 피하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파드릭의 예고 때문인지 콜름의 두려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2개의 죽음이 마을을 덮칠 것이라 말한 노파의 예언은 빗나갔다는 것이죠.

 

이 대목이 바로 마틴 맥도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입니다. 운명이 정해놓은 길을 따라가거나 거스르며 비극을 맞이하는 셰익스피어 작품과 다르게 마틴 맥도나의 캐릭터들은 운명을 거스르면서도 희망의 불씨를 살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죽게 될 거라는 걸 알려주는 아일랜드의 유령 ‘밴시’의 존재가 무색하게 말이죠. 결국 영화는 비극을 만드는 건 운명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와 선택에 달린 문제라는 메시지를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운명 같은 부조리 앞에서 고뇌를 거듭하는 인간과 그 인간의 선택이 불러오는 비극, 그리고 비극의 결말을 결정할 키를 다시 인간에게 쥐어주는 일말의 희망. 이것이 진정 마틴 맥도나가 비극을 사랑하는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작품 하나를 만난 것 같아 기분이 좋네요. 여러분도 꼭 한 번쯤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니셰린의 밴시 뿐만 아니라 마틴 맥도나의 초기 희곡이나 <쓰리 빌보드>에 대한 해석과 이야기도 아래 링크 영상에 담아놓았으니 궁금하시다면 한 번씩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https://youtu.be/PfXoir38o9s

 

 

신고공유스크랩

추천인 7


  • 비둘기야밥먹자꾸꾸

  • GrayHEAD

  • 노스탤지아

  • 이성과감성
  • 카란
    카란
  • kmovielove
    kmovielove
  • golgo
    golgo

댓글 5

댓글 쓰기
추천+댓글을 달면 포인트가 더 올라갑니다
정치,종교 관련 언급 절대 금지입니다
상대방의 의견에 반박, 비아냥, 조롱 금지입니다
영화는 개인의 취향이니, 상대방의 취향을 존중하세요
자세한 익무 규칙은 여길 클릭하세요
profile image 1등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이 영화에선 좀 특별한 배경에 극단적인 행위들이 나오지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에서 한번쯤은 겪었을 법한 인간 관계의 갈등을 떠올리게 하는 보편성도 있다고 봤습니다. 본인들에겐 비극이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희극인 것도 그렇고요.
곱씹을만한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20:35
23.03.26.
profile image 2등
영화참 좋았어요. 보고서도 어떤점이 좋았는지 갈피를 못잡았는데 명쾌한 해설 잘봤어요.
21:14
23.03.26.
profile image 3등
완전 정독했습니다!
멋진 분석과 리뷰 감사합니다!!
22:18
23.03.26.
글 재미있었고, 흥미로운 해석 같습니다.
다만 저는 2개의 죽음은 동네 바보청년과 당나귀의 죽음으로 예언이 실현됐다고 봤거든요. 그래서 그의 죽음과 콜름이 살아있는 장면을 바로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10:35
23.03.27.
Edwood86
저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당나귀와 콜름의 죽음으로 실현될것으로 보였다가, 콜름 대신 소년이 죽은게 아닌가 싶었네요.
19:41
23.03.3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에디터 모드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공유

퍼머링크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파문] 시사회에 초대합니다. 6 익무노예 익무노예 5시간 전11:36 693
공지 [데드데드 데몬즈 디디디디 디스트럭션: 파트1] 시사회에 초... 17 익무노예 익무노예 3일 전20:03 2789
공지 (오늘 진행) [총을 든 스님] 시사회 당첨자입니다. 4 익무노예 익무노예 3일 전19:54 2121
HOT 실사영화 "최애의 아이" 흥행실패 (일본) 3 호러블맨 호러블맨 1시간 전15:55 543
HOT KBS2 '스즈메의 문단속' 더빙판 방영 예정 4 호러블맨 호러블맨 1시간 전15:50 410
HOT '서브스턴스' 국내 블루레이 출시 예정 4 golgo golgo 1시간 전15:08 603
HOT 오징어게임2 월드프리미어 기념품들 1 전단메니아 전단메니아 1시간 전15:31 545
HOT 정우, [바람] 후속편으로 감독 데뷔 2 시작 시작 1시간 전15:18 924
HOT 태국 방콕의 '오징어 게임' 수상쇼 1 golgo golgo 3시간 전13:25 636
HOT 제임스 건, '수퍼맨' 제작비 3억6천3백만달러 소... 3 NeoSun NeoSun 2시간 전14:38 923
HOT <우리가 끝이야> 원작자 콜린 후버, 블레이크 라이블... 3 카란 카란 2시간 전14:04 520
HOT 2024 영화 요약 콜라주 포스터 상세샷 4 NeoSun NeoSun 3시간 전13:53 414
HOT 극장판 스파이 패밀리 코드: 화이트 극장개봉 1주년 축전 1 중복걸리려나 4시간 전12:24 444
HOT 오늘의 쿠폰 소식입니다^-^ 보고타 시빌워!! 4 평점기계(eico) 평점기계(eico) 8시간 전08:41 1364
HOT 국보 예고편 4 GI 4시간 전12:27 851
HOT 참신하고 독특한 종교심리스릴러 "콘클라베" 5 방랑야인 방랑야인 4시간 전12:06 835
HOT 디즈니+ <애콜라이트> 한 시즌 만에 제작 중단한 이유 5 카란 카란 7시간 전09:58 2525
HOT <노스페라투> 캐릭터 포스터 공개 2 넷플마니아 넷플마니아 6시간 전10:24 666
HOT 워너, '수퍼맨' 내부시사회 후 "긴장":... 13 NeoSun NeoSun 5시간 전11:47 3021
HOT '무파사 라이언 킹' 오프닝 흥행 참담한 수준, &#... 3 NeoSun NeoSun 5시간 전11:35 1295
HOT <하얼빈> 1주차 현장 증정 이벤트 1 넷플마니아 넷플마니아 6시간 전10:28 818
HOT 넷플릭스 '오징어게임' 시즌2 참가자 6명 영상 / ... 2 NeoSun NeoSun 7시간 전10:01 935
HOT [하얼빈] 사전 예매량 40만장 육박 2 시작 시작 8시간 전09:01 953
1161565
normal
무비티켓 17분 전16:46 106
1161564
normal
하늘위로 26분 전16:37 116
1161563
image
NeoSun NeoSun 42분 전16:21 194
1161562
image
NeoSun NeoSun 55분 전16:08 253
1161561
image
NeoSun NeoSun 1시간 전16:00 185
1161560
image
호러블맨 호러블맨 1시간 전15:55 543
1161559
image
뚠뚠는개미 1시간 전15:53 141
1161558
image
호러블맨 호러블맨 1시간 전15:50 410
1161557
normal
RandyCunningham RandyCunningham 1시간 전15:49 87
1161556
image
전단메니아 전단메니아 1시간 전15:31 545
1161555
image
NeoSun NeoSun 1시간 전15:31 420
1161554
image
NeoSun NeoSun 1시간 전15:29 270
1161553
image
시작 시작 1시간 전15:18 924
1161552
image
golgo golgo 1시간 전15:08 603
1161551
image
golgo golgo 1시간 전15:06 251
1161550
image
넷플마니아 넷플마니아 2시간 전15:02 195
1161549
image
NeoSun NeoSun 2시간 전14:47 314
1161548
image
NeoSun NeoSun 2시간 전14:38 923
1161547
image
NeoSun NeoSun 2시간 전14:23 349
1161546
image
전단메니아 전단메니아 2시간 전14:13 361
1161545
image
NeoSun NeoSun 2시간 전14:05 362
1161544
image
카란 카란 2시간 전14:04 520
1161543
normal
넷플마니아 넷플마니아 3시간 전14:03 192
1161542
image
호러블맨 호러블맨 3시간 전13:55 400
1161541
image
NeoSun NeoSun 3시간 전13:55 207
1161540
image
NeoSun NeoSun 3시간 전13:53 414
1161539
normal
golgo golgo 3시간 전13:45 240
1161538
normal
넷플마니아 넷플마니아 3시간 전13:39 258
1161537
image
NeoSun NeoSun 3시간 전13:35 368
1161536
image
넷플마니아 넷플마니아 3시간 전13:26 218
1161535
image
golgo golgo 3시간 전13:25 636
1161534
image
NeoSun NeoSun 3시간 전13:21 304
1161533
image
golgo golgo 3시간 전13:17 356
1161532
image
NeoSun NeoSun 4시간 전12:48 624
1161531
image
NeoSun NeoSun 4시간 전12:35 9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