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웨일' 주관적 끄적임
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
평점
★★★☆☆
한 줄 평
' 폭풍우를 헤엄쳐나가는 고래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이 아닌 사랑 섞인 말 한마디."
the most imprssive line
"넌 완벽해, 엘리."
"에세이는 곧 너야. 내가 본 에세이 중 최고야."
들어가며,
찰리가 사는 집은 곧 배요, 그 배는 폭풍우를 헤쳐나가는 돛단배이다.
입에서 무심코 나오는 작살들이 고래를 찌른다.
고래의 헤엄에 무심코 밀려오는 파도 또한 배를 뒤집는다.
타인과 솔직함
"그런 생각 안 해봤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할 수 없다고."
우리 모두는 조금이라도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어떠한 이든 간에 완벽할 수는 없다, 누구보다 우월한 것이 뭐가 중요한가 마찰이 있으면 어떠한가 그러한 행동 언행들의 에너지가 모여서 인생이라는 배가 항해할 수 있도록 노를 저어준다.
방향은 중요치 않다. 그저 떨어지는 빗방울의 슬픈 촉감, 해조류들의 느끼한 비린내, 시끄러운 바람 소리. 그것들에서 우리는 살아감을 정의하고 교감하며 타인과 공생해나간다.
구원
"고래 묘사들이 잔뜩 있는 챕터들이 슬펐다. 자신의 넋두리에 지친 독자들을 위한 배려인 걸 아니까."
모두가 구원을 바라고 행하고자 한다. 그러나 진정한 구원이란 무엇인가
예수가 인도하는 초원? 아니다. 구원은 그저 타인을 향한 진심 어린 솔직한 말 몇 마디이다.
몇몇 어절이, 단어가, 성대의 진동으로 구원은 실행된다.
'구원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 행태의 결괏값'
구원받을 자격에 관하여.
동성애로 가족을 버린 찰리.
찰리를 배척하고 딸의 비행을 방관한 메리
교회의 돈을 훔치고 달아난 토마스.
이들이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가 묻는다면, 구원은 자격이 있어야 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이 필요한 자에게 자격이 생기는 것이라 답하겠다.
찰리를 구원하려 온 토마스는 되려 자신을 불행의 길로 빠트리려던 엘리의 행동으로 구원받는다.
그는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선행? 베풂? 아니다. 그저 존재만으로, 가족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
엘리와 찰리도 앞선 방식과 같은 구원이 성립된 것이 아닐까
기가 막힌 에세이를 써서 유급을 면한 것도 아니고 1억이 넘는 적금통장을 받는 것도 아닌 그저 수년 만의 재회로 얼굴을 본 것만으로 이 둘은 서로가 서로를 구원한다.
구원의 연속성. 찰리가 엘리를 엘리가 토마스를 엘리가 찰리를.
이 맥락에서 구원의 아이러니와 종교 신앙에 대한 아이러니를 엿볼 수 있다.
신앙심이 구원의 지름길이 아니며 선행만이 구원의 출입증이 아니다.
사랑
"넌 완벽해, 엘리"
결말 부분, 찰리가 자력으로 일어나 엘리에게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은 재활치료나 의약 복용이 아니라, 그저 엘리를 향한 무한한 사랑과 그 사랑을 받을 준비가 되어 문을 연 엘리이다. 엘리가 문을 열자 빛줄기들이 넘쳐들어와 이 둘을 덮어버린다. 그 빛줄기는 구원보다는 사랑으로 다가왔다.
그 어떤 철학, 신앙, 관념, 지론, 진실, 구원 등은 중요치 않다.
요점은 사랑이다. 대마를 피우던 비행 청소년이던 사이코 기질에 인성 파탄 자이던 뭐 어떠한가, 그저 내 눈엔 사랑스러운 나의 딸이다.
동성애로 가족을 버리고 272kg 거구에 엉덩이에는 두창이 있고 피부에는 종기들이 줄을 섰으며 자기파괴와 음식중독인 아빠도 내 눈에는 날 사랑해주는 바보같은 아빠이다.
기독교의 무한한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의 정신이 그런 것 같아요.
인간 입장에선 각자 자기들 편한대로 해석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