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역사상 가장 쿨했던 <빗속의 연인들>, 그리고 김추련을 기억하며!
들어가기에 앞서. 거창한 글의 제목과 달리 나는 개인적으로 김추련을 알지 못한다. 다만 후술할 내용에서 스치듯 지나간 '불가식 표현의 인연이 전부'라는 사실을 미리 밝힌다. 그리고 조금 더 주도적인 느낌을 위해 경어가 아닌 반말체인 것 역시 읽는 이들에게 양해를 구한다.
영화 <빗속의 연인들>은 1976년 10월 23일에 개봉한 영화다. 사실 이 기록이 진짜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기억하기에는 너무나 오래 전이다. 조금 과장을 보태 나와 연식이 비슷한 영화인 터라 당대에 보지 못했던 영화였다. 즉 기록으로 알게 된 사실일 따름이다. 단관 개봉이나, 재개봉이 흔한 시절이었고 몇 달 또는 1년이나 2년이 지난 어느날 변두리 극장에서 무시로 상영하던 때였다. 그러니 이 시절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았던 분이라면, 아마도 어느 계절이나 그날의 분위기와 함께 기억의 모서리에서 먼지를 쌓아두고 있지 않을까.
그저 그 시절의 신문 한꼭지를 빌려 기분을 느껴보자면!
이 영화를 알게 된 것은 아마도 1997년이었던 것 같다. 토요일도 일을 하던 때였다. 매일 7시에 출근해 새벽 2시에나 퇴근하던 일상을 반복하던 나에게 반공일이라고 우스갯소리하던 토요일은 작게나마 쉴 수 있는 탈출구였다. 지금 같아서야 이런 반공일에 휴가를 쓴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일지 모르겠으나 그야말로 사치였다. 토요일 하루에 휴가라도 쓸라치면 선배 직원들의 온갖 눈치와 말로 안 내뱉을 뿐인 욕을 감내하며 불편한 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아마 그 토요일도 바로 이런 날이었던 듯하다.
토요일 한낮에 점심을 먹으려 라면을 끓여 TV앞에 앉았다. 그때 이 영화가 딱 시작했다.
대략의 영화 정보와 줄거리는 저렇다.
시골에서 상경한 고학생 문오가 어느 호텔의 창문닦이를 하는 순간에, 담배를 문 정화와 창문에서 딱 마주친다. 정화는 남자에 지쳤다는 독백을 하며 호텔에 혼자 머물러 있다. 그런 정화를 보며 문오는 콜걸이라고 대뜸 의심해 버린다.
하루하루가 힘들고 돈에 쫓기는 고학생이었던 문오에게 돈 많은 여자 미옥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물론 친구와 양다리를 걸칠 줄 몰랐던 때문에 당연히 출세를 위한 결혼도 서슴치 않으려 했다.
친구와 여자에게 배신을 당한 문오는, 치기에 어려 콜걸이었던, 물론 오며가며 몇 번 스치듯 만난, 정화를 만나려 든다. 그러나 정화가 처음 만났던 그 호텔의 손녀라는 사실을 알고 존재와 현실을 자각한다.
보통은 이 정도 상황에 처한 남자라면, 어떤 결론에 다다를까. 어떤 선택을 할까.
어떻게든 돈 많은 상속녀인 정화를 꼬드겨 자신의 것으로(당시 표현이라고 치자) 만들려 들지 않을까. 겁박하고 또 강제적인 물리력마저 행사해서라도!
이 영화가 각인되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과거의 서울을 보여주는 시대감이 아름다웠다는 사실, 그리고 문오가 마지막에 내린 결정 즉 영화의 결말 때문이었다.
영화에서 다루어지는 서울을 보며, 아마도 30년은 족히 지났을 것임에도 서울은 같았고 달랐다. 서울의 여러 술집, 빈민가, 자취방 등의 모습은 지금과 비슷했다. 하지만 호텔로 상징할 서울의 외관은 그때와 너무 달라졌다. 정말 눈부시게 발전한 서울의 과거가 그토록 아름다우며 반대로 새로울 수 없었다. 영화 속 서울을 지금에 와 표현하라면 나는 이렇게 쓰겠다, 시간을 뒤로 보내는 아름다움!
분명 30년도 더 된 서울임에도 <빗속의 연인들> 속 서울은, 지나치게 아름답고 무섭도록 낡았으며 오늘과 같았지만 지금과 달랐다.
되돌아와 문오는 정화가 호텔의 상속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자신의 현실을 뼈저리게 자각한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분명히 정화를 택할 만한데도 그는 정화와 아름다운 이별을 선택한다. 자신의 속물 근성을 반성하면서.
두 사람은 쿨하게 이별을 받아들이며 마지막 장면을 눈부시게 주도한다. 어떤 치근덕거림이나 미련도 없이. 수동적이거나 미적거림 없이!
그 마지막 장면은 정말 눈부셨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서울의 고가도로를 걸었던 그리고 헤어지던 마지막! 여기서 앞서 언급했던 아름답고 새로웠던 서울의 30년 전과 맞물려 두 사람의 '저 세상 쿨한 이별'이 적어도 지금껏 본 적 없던 한국 영화 사상 가장 멋진 결말로 나에게 각인되었다.
지금도 많은 영화를 본다. 한국영화도 거의 빼놓지 않고 본다. 그러나 결말이 통째 각인되어 하나의 기억으로 저장되는 사례는 드물다. 이 영화 <빗속의 연인들>을 제외한다면 플롯과 함께 저장되었던 <기생충>, 그리고 어디에도 본 적 없던 공포를 통째 눈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던 <깊은 밤 갑자기> 정도가 아닐까 생각된다.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결말 중 하나로 꼽히는 <제3의 사나이>보다 개인적으로 다 강렬하게 각인되었던 영화가 바로 <빗속의 연인들>이었다.
시간이 지나 이 영화를 보는 것은, 보통사람에게는 힘든 일이 되었다. 영상자료원에도 검색되는 내용은 시나리오와 스틸 컷 정도가 전부라 아쉽기 그지없다. 간간이 EBS에서 상영될 때가 있기는 하나 무시로 보고 싶은 욕심에 비하자면 턱없는 상영에 그친다.
영화가 워낙에 크게 각인되었던 터라 김추련과 최민희, 두 주연배우에 대한 이미지도 오래 남았다.
최민희 배우는 <빗속의 연인들>에서 매우 보이시하며 도회적인 모습의 당찬 여인이다. 뭐랄까 그즈음뿐 아니라 <가슴 달린 남자> 같은 영화가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 영화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형태의 여성의 모습이었다. 전통을 거부하며 자신의 주체성을 나타내는 그런.
아쉽게도 신문기사처럼 은퇴를 하고 만다. 이후 '82년에 복귀하지만 후로도 많은 활동을 하지 않고 사업가로 전향했다고 한다.
한창 주가를 드높일 시기에 영화처럼 쿨한 선택을 한 최민희 배우의 모습은, 문득 영화와 닮았다, 하고 생각했다.
그에 반해 김추련 배우는 주인공으로 상당히 활동했다. 다만 이 시기 즉 외화 쿼터를 채우기 위해 연말 즈음이면 한국영화를 마구잡이로 찍어내던 때에 활동했던 주연배우 상당수가, 동시녹음과 현대화의 시기에서 자리를 잡지 못했다. 비켜가거나 사라지거나! 김추련 배우도 그 시기와 맞물리며 또 주인공에서 조연으로 바뀌는 단계를 건강하게 버텨내지 못한 듯하다.
이 영화를 내가 TV에서 볼 즈음에 그는 고향인 마산(고성)으로 낙향했다. 마산 오동동에서 그는 <김추련의 라이브>라는 가라오케를 운영했다. 가수로 전업하기도 했던 그였기에 어쩌면 소통이 가능한 가라오케는 그의 작은 바람 중 하나였을까, 그저 짐작해본다.
그즈음 나 역시 직장이 마산이었기에, 출근을 하다 불현듯 보게 된 3층의 가게 상호는 신비했다. 나는 나만 아는 보물의 느낌으로 김추련 배우를 보기 위해 직장 동료나 친구, 사업 차 사람들을 데리고 그곳에 가고는 했다. 그러나 김추련 배우를 본 것은 두어 번이 전부였다. 직접 경영을 한 건지, 아니라면 이름만 빌려준 건지 물어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저 간간이 그를 만나볼 욕심을 내는 날은 아쉽지만 나에게도 평화롭기만 한 날은 아닌 시절이었다. 그게 정말 아쉬웠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 <김추련의 라이브>는 폐업했다. 그런데 어느날 과거 해수욕장이 있던 마산의 가포로 가는 구도로 언덕에 <김추련의 고성국밥>이라는 상호가 나타났다. 정말이지 반가웠다. 다만 너무 외진 데였다. 그래서 마음 먹지 않으면 갈 수 없는 장소였다. 아마도 찬바람이 턱을 감고 돌던 날이었을 것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는 용기를 내어 그 가게에 들렀다. 장화를 신고 가게의 음식물을 처리하는 듯하던 그의 모습은, 한눈에 보기에도 생에 찌들고 힘겨워 보였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하마 말을 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저 국밥을 한 그릇 먹고 가게에서 도망치듯 나오기 바빴다.
이후 나는 서울에서 터를 잡고 매일 자판을 두드리는 생활에 접어들었다. 물론 현장활동가로 살아가던 때라 내가 생각하는 상식 이하나, 불의와 맞서야 하는 날에는 도로에서 잠을 자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즈음에 기사 하나가 떴다.
2011년 11월 8일, 김추련 배우가 자살했다는 기사였다.
나는 이즈음 술을 거의 마시지 않을 때였다. 술만큼 소모적인 것이 없다는 회의감과 젊은 시절 술로 맺어졌던 사람들에 대한 환멸도 한몫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날만큼은 나는 술독에 빠지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단순히 '슬프다'와는 다른 복합적인 감정이라면 거창하려나. 중첩의 복잡함. 어디인가 알 수 없는 통각이 계속해서 나를 건드렸고, 영화에서만 보았던 그 쿨했던 '내가 꼽는 한국 영화 최고의 결말'이 사라져버린 느낌이 들었다.
영화에서는 고가도로를 환호하며 서로의 미래를 기원하던 그 결말이, 현실에서는 고무 바스켓을 들고 파란 장화를 신은 채 입을 앙다문 중년의 모습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배우 김추련!
오늘 그가 왜 떠올랐는지 모른다. 그리고 왜 영화 <빗속의 연인들>도 이렇게 거치적거리듯 기억을 건드리는지 모른다. 확실한 하나는, 내가 꼽는 최고의 한국영화 결말 중 하나가 이 영화라는 사실이다. 적어도 그것 하나만큼은 변함이 없다. 비록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다고는하나, 배우 김추련 역시 자신의 생을 위해 최고의 자부심으로 살아갔을 것이다. 영화 <빗속의 연인들> 속 고학생 문오처럼!
배우 김추련을 추모합니다. 그리고 영화 빗속의 연인들 역시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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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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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전 속 서울 중에서도 참 기억에 남는 영화였답니다.
영화 <빗속의 연인들>은 1676년 10월 23일에 개봉한 영화다. —-> 무려 조선 숙종 2년 때 나온 영화네요 ㄷㄷㄷ
오타 고쳤습니다. 감사!
추억의 영화로군요. 영상 자료원에서 상영 안해줄까요?
저도 디브이디나 블루레이 구입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영상자료원에서 70-80년대 한국영화 자주 보곤하는데 말씀 하신 것처럼 그 당시 시대상 구경하는 재미가 만만찮거든요. 요즘 한국영화는 좀 인공적으로 느껴져서..
이 글 보고 관심가서 좀 뒤져보니 "사랑의 미로" 원곡인 이 노래가 주제가로 쓰였나보더군요
https://youtu.be/3ykw5gsTIVc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영화를 세 번 정도 봤어요. 정확한 기억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마 마지막에 동대문에 그 철거한(? 유산이 된??), 그 고가도로를 오르며, 화면이 딱 멈출 때 즈음해 나왔던 노래가 이 노래 같아요.
보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젠가 올라오면 꼭 보겠습니다.
저도 가끔 고전 한국 영화 속에 담긴 서울 등 도시 풍경이 좋아서 자주 찾아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