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멋진 세계' 간단 리뷰
1. 2009년에는 영화 '아바타'와 '해운대'가 개봉해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1994년에 데뷔한 밴드 오아시스가 해체했고 네드베드와 말디니가 은퇴했다. 4세대 그랜저와 6세대 소나타가 출시됐고 소녀시대와 브라운아이드걸스, 슈퍼주니어는 기가 막힌 춤을 췄다. 아이유는 아직 'Boo'와 '마쉬멜로우'를 부르며 아는 사람만 아는 가수였고 애프터스쿨은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용산 4구역 철거현장 화재사건으로 6명이 목숨을 잃었고 전직 대통령 2명과 마이클 잭슨도 세상을 떠났다. 신종플루와 북한 2차 핵실험이 일어났다. 그런 시대에 살던 사람이 어느날 세상과 단절했다. 그리고 13년이 흘러 다시 세상에 나타났을 때 여전히 '아바타'는 속편이 나오지 않았고 '해운대'에 이은 천만영화가 10여편이 등장했다. 재결합을 염원했다 오아시스는 아직도 으르렁대고 있고 그렌저와 소나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소녀시대는 회사가 흩어졌지만, 여전히 건재하고 브라운아이드걸스는 소식을 알 수 없다. 슈퍼주니어는 어느새 아저씨가 됐고 아이유는 연기까지 하더니 우주대스타가 됐다. 애프터스쿨도 역사속으로 사라졌고 용산 참사는 초능력 슈퍼히어로 영화로 재탄생됐다. 대통령이었던 사람은 감옥에 가있고 신종플루보다 몇 배는 무서운 전염병이 창궐했다. 북한은 그새 4번 더 핵실험을 했고 여전히 핵무기로 개긴다.
2. 2009년에 13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간 사람의 모습을 상상해봤다. 감옥에도 TV는 있을테니 세상 돌아가는 건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달라진 분위기를 TV로 접하는 일과 직접 마주하는 일은 다르다. 세상이 변한 것은 몇 개의 아이콘에 대한 변화로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공기와 풍경, 사람들의 표정으로 체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멋진 세계'의 미카미(야쿠쇼 코지)는 13년만에 출소한다. 전과 10범에 6번 감옥에 다녀온 그는 인생의 절반 가까이 되는 28년을 감옥에서 살았다. 그에게 감옥에서 지내다 출소하고 세상에 적응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야쿠자였던 그는 출소하자마자 조직의 품으로 들어가 다시 생활을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진작에 조직세계에서 손을 씻었다. 이번에 감옥에 간 일도 부득이한 사고였으며 법정에서 검사의 도발에 넘어가 말실수를 한 덕에 유죄가 확정됐다. 아내 쿠미코(야스다 나루미)와는 진작에 갈라섰고 이제 그는 홀로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
3. 미카미는 '싸움꾼 마짱'이라고 불릴 정도로 업계에서는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는 야쿠자가 되지 않을 각오를 하고 운전면허도 다시 따려고 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여기에 그를 소재로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제작하려는 방송국 사람들도 있고 그를 도와주는 마트 사장도 있다. 그러나 평생을 험하게 살아온 그의 성격과, 노인성 질환 탓에 세상에 적응하는 일은 쉽지 않다. '멋진 세계'는 13년간 세상과 단절돼있던 사람이 세상 속에 녹아드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앞서 언급했지만, 미카미는 감옥에서 산 시간이 28년이다. 굳이 그 중 13년을 끄집어낸 이유는 무엇일까? 사회의 발전 속도는 문명이 발달할수록 더 빨라진다. 스마트폰의 등장은 문명의 발달에 부스터샷 역할을 했다. 미카미가 감옥에 가기 전 2000년대 중후반에는 스마트폰이 막 세상에 등장할 때였다. 그리고 스마트폰의 등장 이후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세상은 빨라졌다. 그 기간에 미카미는 감옥에 있었고 출소 후 한동안 공중전화를 이용할 정도로 문명의 변화와 멀어져 있었다.
4. '멋진 세계'에서 주인공이 야쿠자에 몸을 담고 있었다는 점은 중요하다. 이는 일본 사회의 변화와도 맞물린다. 1991년 처음 재정된 폭력단 대책법은 2011년 폭력단 배제조례로 더 강화된다. 이 폭력단 배제조례는 야쿠자 등 폭력집단을 사실상 국민으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들은 자녀를 학교에 보낼 수도 없고 자신의 명의로 스마트폰을 만들 수도 없다. 통장 개설도 당연히 안되고 취업도 제한된다. 후지이 미치히토의 넷플릭스 영화 '야쿠자와 가족'은 이런 시대상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멋진 세계'는 '야쿠자와 가족'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일본 사회에 대해 더 확장된 시선을 갖는다. 2000년대 초반부터 일본은 초고령사회에 접어들었고 야쿠자 역시 고령화된다. 특히 2010년대 이후부터는 폭력집단에 대한 젊은 세대들의 시선이 바뀌면서 아무도 야쿠자에 가입하려고 하지 않는다. '멋진 세계'에서 아랫집 총각이 보여준 태도는 폭력집단에 대한 현재사회의 시선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제 일본에서는 '야쿠자' 자체가 과거의 유산인 셈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과거의 어두운 유산을 버리려는 구시대 일본인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5. 미카미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다. 그는 복지사와 주변인의 도움으로 새로운 직업을 찾았고 자신의 삶에 대해 더 성실해질 수 있는 기회, 과거 앞에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기회도 생겼다. 그러나 이야기는 가혹하게도 그 순간 미카미를 죽여버린다. 잘 풀리지 않았던 미카미의 출소 후 생활은 복지사의 도움으로 간병인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풀리기 시작한다. 이때 미카미의 각오는 대단히 비장하다. 자신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기 위해 불의를 보더라도 참고 어울리며 지내기로 한다. 앞서 미카미가 감옥에 갔을 때, 출소 후 길거리 양아치들과 시비가 붙었을 때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에서 비롯됐다. 미카미가 길거리 양아치들과 싸움이 붙었을 때, 관객들은 가장 합리적인 선택으로 경찰에 신고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의 절반을 감옥에서 보낸 미카미에게 경찰을 부르는 일은 선택지에서 찾기 어렵다. 그래서 경찰을 부를 수 없다면 불의를 보고 참아야 한다. 그 일은 미카미에게 대단히 어렵고 힘든 일이다.
6. 그동안 중립적이고 냉정한 시선을 유지했던 영화는 이 지점에서 처음으로 미카미의 편을 든다. 미카미를 도와준 주변인들은 일하면서 불의를 봐도 참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거기서 누구도 "불의를 보면 국가의 힘을 믿어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미카미가 비록 공권력에 의해 고생한 사람이지만, 적어도 누군가는 그와 공권력의 담을 허무는 역할을 했어야 했다. '참아야 한다'는 미카미가 혈압약을 찾게 할 정도로 어려운 선택지다. 영화가 미카미의 편을 들면서 국가에 대한 신뢰를 져버리는 이유는 앞서 언급한 폭력단 배제조례로부터 비롯된다. 넷플릭스 영화 '야쿠자와 가족'에서도 폭력단 배제조례로 사회 구성원으로 돌아올 길이 막힌 겐지(아야노 고)와 그 동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조례가 갖는 부작용에 대해 꽤 오랫동안,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여기에는 국가 제도의 부조리함과 사람들의 시선까지 그대로 담겨있다(미카미에게 '경찰에 신고하라'는 선택지가 없었던 이유도 그가 야쿠자였던 이력 때문일 수 있다).
7 타인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고 국가 질서를 어지럽히는 폭력조직에 대해서는 응징을 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법이 정한 죗값을 치르고 사회로 돌아왔다면 그들이 사회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영화에 등장한 신원보증인이 그 역할을 하는 것 같지만, 아직 사회의 시선과 제도는 미카미와 같은 사람을 사회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게 배척된 미카미와 같은 사람은 결국 옛 동료를 다시 찾아가 어둠의 길로 들어선다. 폭력단 배제조례는 야쿠자 조직의 씨를 말리는데 성공했지만, 그 이후의 대책에 대해서는 고민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일본은 야쿠자 이후를 고민하지 않는 듯 하다. '야쿠자 이후의 고민'은 광범위하게 해석하면 '초고령사회에 대한 고민'과도 맞물린다. 야쿠자 자체가 과거의 유산이고 많은 일본인들이 야쿠자까지는 아니더라도 과거의 유산을 안고 사는 만큼 초고령사회는 변화에 뒤쳐진 일본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일 때 일본의 뉴스에서는 벽면에 그림으로 확진자수를 그린 웃지 못할 그래프가 등장하기도 했다. 과거의 유산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변화한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미카미의 모습은 비단 야쿠자나 노인들의 문제가 아니다. '야쿠자와 가족'은 일본사회에 대한 서슬퍼런 경고를 했다. '멋진 세계'는 그 경고의 연장선에 놓여있다.
8. 영화 '멋진 세계'는 그리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비정하고 메마른 시선에 조금의 감성을 더한다면 한국영화 '해바라기'와 별 다를 바 없는 이야기가 돼버린다. 폭력에 대한 미화나 감성을 드러내면서 '멋진 세계'는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본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영화가 된다. 그런데 여기에 유일하게 감성적인 순간이 있다. 미카미와 요양병원에서 보조로 일하던 아베라는 청년은 지적 장애가 있다. 그는 동료 간병인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있고 미카미는 이를 목격한다. 그러나 미카미는 불의를 보고 참으라는 주변인들의 조언 때문에 섣불리 나서지 못한다. 미카미는 간병인들을 보고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끝내 참는다. 그 순간 아베는 태풍이 몰아칠 것을 염려해 코스모스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베는 퇴근하는 미카미에게 코스모스를 선물한다. 코스모스를 들고 집에 돌아온 미카미는 집으로 돌아와 창문 밖에 걸어놓은 빨래를 정리하다 심장질환으로 쓰러져 사망한다.
9. 미카미의 마지막 순간을 복기해보자.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랜만에 쿠미코의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나중에 점심이나 먹자는 약속을 했다. 혼자 지내는 집으로 돌아온 미카미는 빨래를 걷다가 쓰러진다. 그리고 아베가 준 코스모스의 냄새를 맡는다. 한국에서 코스모스는 고향역 어귀에 피어있는 꽃이다. 나훈아의 '고향역' 가사처럼 코스모스가 피어있는 길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말한다. 일본에서도 이런 뜻이 통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다만 코스모스의 꽃말은 '소녀의 순결', '순정'이라고 한다. 여기서 '소녀의 순결'은 배제하고 '순정'이라는 말은 앞서 쿠미코와의 통화와 이어진다. 이는 단순히 '마지막 순간에 쿠미코를 떠올렸다'로 해석하려는 게 아니다. 미카미가 기억하는 쿠미코의 마지막은 법정에서 울부짖는 모습이었다. 그 순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쿠미코와 행복했던 한 때, 감옥에 들어가기 전 순간으로 돌아가려는 의지가 드러난 대목이다. 영화는 쿠미코와 행복했던 순간을 보여주지 않는다(이것 역시 영화가 비정하게 느껴지는 지점이다). 대신 운전면허학원에서 쿠미코를 떠올리고 과거를 회상하는 지점은 미카미가 쿠미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준다. 어쩌면 코스모스 향을 맡고 쿠미코를 떠올린 그 순간, 미카미는 자신이 죽인 젊은이에게 늦은 사죄를 했을지도 모른다(미카미가 진정 속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고통이 아닌 연민이었다).
10. 아베를 도와주지 않는 미카미의 모습은 '비겁함'이 미덕이 된 현대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편으로 미카미의 주변인을 통해 세상이 그리 비겁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사실 미카미는 아베를 도와줄 수 있다. 자신이 신원보증인이나 마트 사장, 복지사, 방송작가의 도움을 받은 것처럼 아베에게도 '좋은 주변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미카미가 스스로 남을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걸 인식하기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영화는 가혹하게도 미카미에게 그런 시간을 주지 않는다. 여기에는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 있어도 사회의 편견과 그것을 조장하는 시스템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세상이 미카미에게 조금 더 일찍 기회를 줄 수 있었다면 아베 역시 조금 더 일찍 도움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스템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복지'는 국가가 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그런 국가의 복지를 믿고 타인을 돕는다. 버블이 붕괴되고 저성장 시대에 들어선 일본은 여느 국가와 마찬가지로 양극화가 심해졌다. 사람들의 삶은 팍팍하고 남을 도울 여유는 더 없어진다. 이는 비단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양극화가 심하다'는 말은 복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남을 도울 심적, 경제적 여유는 더 사라진다. 비겁함이 미덕인 사회는 과연 일본만 그런 것일까?
11. 결론: '멋진 세계'는 비정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한 개인이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살아가는 이야기다. 복지 시스템과 사회제도가 온전히 작동했다면 그 개인은 재사회화돼 이웃으로 자격을 충분히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양극화가 심해지고 삶이 팍팍해진 사회에서는 남을 도울 여유가 없다. 그런 와중에도 어딘가에 신원보증인, 마트 사장, 방송작가, 복지사 등의 사람들이 있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어려운 사람을 도우려는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러나 비정한 사회와 팍팍한 경제구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멋진 세계'라는 이 영화의 제목은 그래서 더 아이러니하게 다가온다.
추신1) 영화 '멋진 세계'는 넷플릭스 '야쿠자와 가족'과 함께 읽히는 지점이 많다. 후자의 영화를 아직 못 본 사람에게는 감히 추천해본다.
추신2) 일본에만 있는 것 같은 '신원보증인'이라는 제도가 참 재미있다. 이 제도를 처음 본 건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본 히로키 류이치의 영화 '노이즈'에서다. 여기에서는 미성년자 성폭행범이었던 출소자의 취업을 추진하던 신원보증인이 출소자로부터 살해당한다(영화의 거의 첫 장면인 만큼 스포일러까지는 아니다).
추신3) 영화의 포스터가 참 의미심장하다. 미카미는 푸른 하늘 아래에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가 바라보는 게 철조망인지, 그 아래 코스모스인지, 혹은 철조망 너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의 배경을 생각하면 철조망 안에 있는 미카미는 교도소 안의 모습이다. 그가 바라보는 철조망 너머의 세계는 변해버린 세상이다. 철조망 안 그의 세상에는 푸른 하늘이 있고 코스모스도 있다. 철조망 너머의 세상은 꽤나 적응하기 어렵다. 미카미에게 '멋진 세계'는 철조망 너머일까, 철조망 안 쪽일까?
추신4) 일본의 시골 기차역에도 코스모스가 피어있나?
추신5) 이 영화의 리뷰가 늦어진 이유는 두 가지 버전을 두고 뭘로 쓸지 고민했기 때문이다. 비교적 간단한 버전으로 고른 게 이 리뷰다. ...복잡한 버전도 기회가 되면 써보고 싶긴 한데, 그건 에세이처럼 확장해서 쓸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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