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 신 극장판 다카포 후기 (스포 조금 있음)

이번 완결편에 대해서 주로 이야기하는 것이 맞겠지만 쉽지 않은 일입니다. 97년 데스앤리버스 개봉 직후부터 에바 세계관에 빠져 지내왔던지라 이 회차만 두고 얘기할 수가 없을 듯 합니다. 그만큼 EOE 이전과, 2008년의 신극장판 이후는 기묘할 정도로 얽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기도 하지만요.
완결편에 대한 기대는 버린 지 한참이라 어떻게든 마무리를 해준 것 자체로 참 고마운 마음입니다. LD에서 뜬 VHS, 현지 녹화본을 뜨고 또 떠서 도저히 형태를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의 조악한 화질로 보다가 넷플릭스로 선명하게 보니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느낌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그 극악의 화질, VHS로 봤던 에피가 하필 또 휴우츠키 교수의 네르프 설립 이전 유이와 겐도와의 기억 부분이라 의미심장하게 다가오기도 했어요. 본래 사람의 기억이라는 게 좀 흐릿하니까요.
오리지널 에반게리온 tv시리즈는 후반부로 갈수록 스토리 진행이 안 되는 데다가 각종 조악한 특수 효과(?)로 등장인물들의 혼란스러운 내면만 반복해 보여주다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뒤이은 데스앤리버스와 엔드오브에반게리온 개봉... 당시 현지 반응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안노 감독을 죽여버리겠다는 살해협박이 있었을 정도로 극단적으로 충격을 먹은 팬(덕후)들도 있었다고 하죠. 제 기억이 맞다면 이번 완결편은 에바 Q이후 8년 만의 스토리 전개입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말한 바 있듯, 90년대 후반 안노의 텍스트 전반에는 극도의 염세적 세계관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희망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달하고자 했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과 극단의 대조를 이뤘죠. 그런데 “다 죽어버렸으면…”이라는 식의 과거 안노의 세계관은 이번 완결판에서 다른 모습으로 변모했습니다. 유이의 영혼이 겐도의 그릇된 욕망마저도 감싸 안아주는 모습을 보세요. 타인에게 관심과 사랑을 갈망하지 말고, 먼저 다가서고 손을 뻗으라는 메시지가 읽히죠. 이는 과거와 달라진 분명한 변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90년대의 안노와 25년이 지난 지금 그의 생각이 굉장히 많이 달라졌다는 걸 느끼게 해줍니다.
자신에게는 우주나 다름없는 존재인 엄마를 비롯해 어른들에게 인정받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최고의 에바 파일럿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자존감을 갉아먹으면서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한 신지. 그러나 이는 아스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무엇에도 무성의한 태도에 시종일관 화만 내는 아스카의 신경질적인 태도는 관성적인 수준을 넘은 인상입니다. 이기적이기 그지없는 인간들의 욕망. 사랑받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에 절망하지만 그 절망을 그저 내면으로만 외치는 캐릭터들. 이들은 이런 절망의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 성숙하지 못한 것이고, 어른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에 두려워합니다. 한데 아야나미 레이는 다른 캐릭터들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는 이카리 겐도의 이기심에서 비롯되어 등장한 클론이지만 신지와 겐도에게 구원을 주는 캐릭터죠.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화학반응에 시종일관 혼란스러워합니다. 뭐, 사실 이건 레이들의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일이긴 하지만...
겐도와 신지가 처음으로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던 후반부의 장면도 인상깊었습니다. 서드 임팩트를 막아낸건 인류의 종말을 잠시 늦춘 것일 뿐 포스 임팩트를 통해 겐도에 의한 인류보완계획은 계속 진행되는데, 이때 그 어느 때보다 밀도 있게 겐도는 유이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죠. 휴우츠키의 회상을 통해 간접적으로밖에 엿볼 수 없었던 겐도의 내면심리를 상세히 보여줬다는 점에서 훌륭한 떡밥 회수이며 친절한 해설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에반게리온 이매지너리’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것은 이를 위한 장치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OE에서 겐도는 아내인 유이를 다시 만나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마지막 순간에서야 간신히 아들을 바라보게 될 뿐이지만 3+1에서는 아들과 아버지의 찐한 몸의 대화를 통해 서로를 더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새롭게 부여했습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겐도가 자신의 욕망에 더욱 집착하는 모습은 더욱 인간적으로 보입니다. “유이를 다시 보고 싶고, 다시 만나겠다”는 욕망으로 지금까지 이 모든 것들을 끌고 왔다는 이야기로 읽히니까요. 그가 인류의 불완전함을 보완하겠다는 이유로 내놓은 인류보완계획 아이디어 역시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은 다들 잘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신극장판 1편에서 단순히 리뉴얼, 리메이크, 리마스터 수준으로 그칠 것인가에 대한 걱정이 컸다고 한다면, 3편(Q)부터 굉장한 스토리 라인의 분기가 일어난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서드 임팩트가 아닌 니어 서드 임팩트의 발발 그리고 네르프 탈영자들의 집단 비레와 분더 함선 등장 등 장면 등은 정말 대 충격일 정도였죠. 무엇보다 비레와 분더의 등장 신에서 거의 기절할 뻔했죠. 신극장판 이후로 에바에 입문(?)한 사람들에게는 구작 티비판과 단순 비교 정도로 그칠 수 잇겠지만 너무 오랜간 에바에 탐닉해온 저는 냉정하게 극장판을 재단하고 비판하고 싶진 않습니다. 디씨 에바갤 글들을 보면 비판 일색이던데 그 지점에선 나름 마음이 아팠습니다. 어떻게든 인간은 살아남아 계속 삶을 지속시켜 나가야한다는 안노의 의지를 스즈하라 토지, 아이다 켄스케, 마을 사람들을 도와 일하는 레이의 모습에서 느꼈거든요. 레이가 주변인들과의 소통을 통해 “고맙다”, “미안해”, “부끄럽다” 등의 감정을 알아가는 장면들도 너무 좋았어요.
솔직히 이정도로 친절할지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켄스케가 그렇게도 갈망하던 네르프에 입성해 뷔레를 서프트 하는 일을 맡아 충실히 수행하는 모습은 전작의 켄스케(아마 성인이 되지 못했을)에게 훌륭한 선물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또한 사도의 침입으로 인한 부상 탓에 장애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스즈하라 토지의 건강한 모습도 감동이었어요. “어? 뭔가 달라졌네?” 하기엔 아쉬울만큼 감동적인 대목이었습니다.
세컨 임팩트의 발원지 구 남극 심해에서 양자개념과 마이너스 우주 개념을 가져다 쓴 것도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서로 대화를 나눠야할, 소통이 필요한 당사자들끼리 어우러질 수 있는 장을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두 ‘어머니’들이 어나더 임팩트를 저지하고 자녀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미래를 부여해준다는 결말은 25년 전 접했던 에바와 또다르 차별점이죠. 저는 이 점 때문에 과거의 에바와 지금의 것은 완전히 다른 작품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단의 근원(...)인 신지의 엄마 유이가 포스임팩트를 저지하며(feat. 미나) 끝을 맺는 것 또한 훌륭한 마무리였다고 봐요.
제가 생각하는 가장 결정적이고 중요한 장면은 엔딩신이었어요. tv판 결말과 도돌이표처럼 ‘에바가 없는 세상’속 신지와 주변사람들의 일상을 보여주고 있죠. 이른바 수미상관 시퀀스입니다. ‘곡의 맨 처음으로 가서 다시 연주하라’는 뜻의 ‘다카포’라는 표현이 나름 스포가 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어쨌거나 여러 면에서 진짜 EOE는 이번 작품이 되어야 맞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제대로 된 평들이 올라올거라고 생각합니다 전 에반게리온을 즐겁게 보내줄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되어 매우 좋게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