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시트럭] 간략후기 (스포)
- 스포일러 있습니다 -
제이슨 스타뎀이 주연을 맡은 가이 리치 감독의 신작 영화 <캐시트럭>을 아이맥스로 보았습니다.
2005년작 <리볼버> 이후 16년 만에 뭉친 가이 리치 감독과 제이슨 스타뎀은 여전한 호흡을 자랑합니다.
단순해 보이는 이야기도 현란하게 풀어낼 줄 아는 가이 리치 감독의 감각과 감정보다 행동으로 승부하는 제이슨 스타뎀의 무자비 액션,
얼핏 성격이 명확히 달라 보이는 이 두 가지 요소가 한 영화에서 만나며 독특한 재미를 줍니다.
긴 시간에 걸쳐 각자의 스타일을 확립한 감독과 배우가 다시 만나 빚어내는 그 기이한 조화가
단순한 복수극처럼 보이는 영화에 흥미로운 면모들을 부여한 것 같습니다.
LA의 현금 수송차량 전문 업체에 H(제이슨 스타뎀)라는 남자가 새 직원으로 들어옵니다.
이혼 경력이 있고 아이는 없다는 것 외에는 개인사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H는 입사 능력 시험을 가까스로 통과한 뒤,
현금 수송차량을 노리는 강도들을 총으로 가볍게 제압하면서 하루아침에 직원들 사이에서 화제의 인물로 회자됩니다.
업무 특성상 외부로부터의 위협이 많을 수 밖에 없는 회사에서 H의 이런 활약은 직원들의 사기를 북돋는 한편,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고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또한 사게 됩니다.
역시나 H는 그저 돈을 벌기 위해서 입사한 것은 아니었으니, 그의 진짜 목적은 아들에 대한 복수였습니다.
현금 수송차량을 노리는 강도들에 의해 아들이 목숨을 잃은 후, H는 아들을 앗아간 자에 대한 단서를 찾고자 이곳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렇게 H의 서슬퍼런 복수심은 서서히 그 타겟을 찾아가기 시작하고, 돌이킬 수 없는 피의 응징이 펼쳐질 시간은 점점 다가옵니다.
현재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액션 스타 중 한 명인 제이슨 스타뎀이 주인공인 복수와 응징을 주제로 한 액션 영화라면
일단 신선하단 느낌은 들지 않을 것이고, 그걸 가이 리치 감독이 연출한다면 '이 감독이 이런 영화를?'하고 의아해 할 것이나,
<캐시트럭>은 빤해 보이는 이야기를 가이 리치 감독 + 제이슨 스타뎀의 조합을 통해 빤하지 않은 영화로 만들어 냅니다.
영화는 크게 복수의 시작, 복수의 주체, 복수의 대상, 복수의 클라이맥스를 다루는 네 개의 챕터로 구성됩니다.
선형적 구성으로 풀었다면 전형적인 복수극에 지나지 않았을 이야기가 시점과 관점을 달리하며 비선형적으로 전개되고,
의문 투성이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 인물과 인물 사이를 오가며 점차 그 퍼즐 조각이 맞춰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모든 정황이 파악된 후 복수의 본게임에 들어서면 귓전부터 좌석까지 아찔하게 흔들어대는 총격전이 시작되죠.
주연배우가 주연배우다 보니 쉴 틈 없는 액션이 기대되는 데 비하면 꽤 긴 예열을 거쳐야 하지만,
영화는 복수라는 하나의 사건에 모여드는 다양한 인물들의 처지와 시간을 면밀하게 비추며 흥미를 유지시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초지종을 소상히 알게 된 후 마주하는 복수의 클라이맥스에서, 카타르시스만큼 크게 남는 것은 왜인지 혼돈과 무상함입니다.
복수극이라 하면 대개 복수의 주체는 무고한 피해자, 복수의 대상은 악랄한 가해자로 구분되어 있게 마련이지만,
복수의 주체인 H의 이야기와 그가 복수하기를 꿈꾸는 대상의 이야기를 번갈아 좇다 보면 그 구분이 모호해 집니다.
물론 H의 복수를 야기한 하나의 사건 안에서 H는 일방적인 피해자가 맞겠지만, 그 지점까지 오는 과정에서
H가 걸어온 길을 돌이켜 보면 이는 마치 지금껏 갖은 위험부담을 자의로 떠안고 살아온 H의 업보에 따른 결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여기에 복수의 대상이 된 자들이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까지 알게 되면, 후에 펼쳐질 복수는 더 이상 짜릿한 쾌감의 순간만이 아니게 됩니다.
H가 벌이는 복수는 빼앗긴 것을 되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미 잃은, 영원히 되찾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앙갚음이고,
그의 복수를 당하는 자들 또한 자신들의 목숨 그 이상을 빼앗길 것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해피엔딩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죠.
원제인 'Wrath of Man'이 '남자의 분노, 인간의 분노'를 의미하듯, <캐시트럭>은 복수의 쾌감보다는
피의 자취만 더 자욱하게 남기는 폭력의 악순환을 냉정한 톤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입꼬리와 눈초리조차 움직이지 않는 제이슨 스타뎀의 액션은, 그 묵직하고 암울한 복수의 파괴력을 전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합니다.
한때 멋스러움의 아이콘이었는데 세상 찌질한 동료로 등장하는 조쉬 하트넷, 카메오급으로 갑자기 등퇴장하는 포스트 말론도 눈에 띕니다.
<알라딘>으로 전세계 10억 달러 흥행 감독, 한국 천만 관객 감독이 된 후 가이 리치는 <젠틀맨>에 이어 <캐시트럭>까지
요동치는 남자들의 감정, 개성 넘치는 스토리텔링, 가차 없는 폭력 등 자신만의 연출 개성을 다시 한번 유감없이 뽐내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유머를 모두 뺀 하드보일드 스타일로 가이 리치식 영화 작법에 새로운 변주를 시도하기도 했고요.
조만간 <알라딘 2>를 연출하며 또 다시 자본주의적 일탈(?)을 시도하겠지만, 그러면서도 언제든 그가
자신의 고유한 영화적 영토를 찾고 가꾸며 변화시킬 준비를 하고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갖게 되는 영화였습니다.
개인적으로 다른 영화보다 제이슨스타덤의 약간 절제된 연기가 좋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