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 이게 다 엔트로피 때문이다(스포)
보는 내내 '아는 거 참~ 많은 사람이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볍게 언급되는 것만 해도 통계역학, MBT 역할치료극, 양자역학, 우화 등
영화는 시작부터 결말을 예고합니다.
직업군인인 마르쿠스는 어딘가 데면데면한 가족과 떨어져 작전을 수행하며 파병 기간이 연장될 것을 고합니다. 가족들은 그럼 그렇지, 하면서도 실망하고 맙니다.
통계학자인 오토는 자신의 알고리즘을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거라 자신합니다. 하지만 "그럴 것이다"라는 실험자의 기대만 남긴 채 유의미한 결과를 증명하지 못하고 해고당합니다.
영화는 이들의 자기 확신의 거창한 실패를 따라갑니다.
오토의 연구 주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방대한 데이터로부터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말합니다. 여기서 그의 전공이 통계학이 아닌 통계역학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통계역학은 미시적인 것들로부터 거시적인 시스템을 이해하고 예측하고자 하는 학문입니다. 네 그 엔트로피를 이야기 합니다.
삼체문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천체가 2개 있을 때의 문제(예측)은 1개 있을 때와 동일하지만 3개 이상이면 풀 수 없다는것이 증명되어 있습니다(수학적 해를 말하는 것이 x).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물체가 아주 아주 많으면, 무한대에 가깝게 많아질 수록 여기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지점-예측이 가능한 것이 생깁니다. 관측 대상이 많아질수록 가능성이 희박해지는 경우의 수가 늘어나게 되고 변수 폭이 점점 좁아져 어떤 균일한 가능성으로 흘러가게 되는데 이게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입니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은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일어날 확률이 (아주) 큰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 입니다.
엔트로피는 관측 입자가 아주 아주 많은 거시적인 세계에서만 증가하며 입자가 몇 개 없는 미시적인 세계(원자 단위라든가)에서는 꼭 증가하지만은 않습니다. 엔트로피 법칙은 입자가 무한대일 때 100% 성립합니다. (무한대가 아닌 무한대에 가까운 상태에서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너무 희박하여 이 법칙이 반드시 성립하게 됩니다. 예로, 뉴턴의 고전물리학 법칙에서 컵에서 쏟아진 우유는 다시 컵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0%는 아니지만 가능성이 너무 희박하기 때문에 엔트로피증가의 법칙에 따라 컵으로 다시 들어갈 수 없다,는 자주 발생하는 사건을 우리가 관측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아주"와 "반드시" 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죠? 오토가 실직 직전에 내뱉던 "데이터가 많으면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
앞서 말한 통계역학의 연구 대상에
입자/미시적인 정보->사람
물리계/거시적인 현상->사회
대입하면 물리학의 방법론으로 사회 현상을 연구하는 사회 물리학이 나타납니다.
통계역학은 사회의 거시적인 특성 중 일부만을 예측할 뿐 개별적인 입자 하나 하나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숲을 보기 위해서는 나무를 봐야하지만 하나 하나를 세심하게 살펴보아서는 숲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가볍게 최대한 많은 나무들을 훑으며 그들이 만드는 패턴을 볼 때 비로소 "숲"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오토의 중대한 실수가 드러납니다.
그가 자기 눈에 거슬린 개인의 행동에 집착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그들의 패배는 예견돼 있습니다.
그는 마틸드의 마인드맵을 보면서 이건 다 헛짓이라며 "이건 모두 개별적인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마틸드가 절박함에 어떻게든 모든 개별적인 사건을 관계를 가진 것으로 이어보려 했던 것처럼 그 역시 자신의 죄책감을 던지기 위해 절대 통계역학 연구자로서 해서는 안 되는, 개별적인 사건들을 마치 상호작용하는 일련의 것들로 예측하는 우를 범합니다. 이미 되돌아올 수 없는 시점에서야 그는 자기가 틀린 예측을 했음을, 해서는 안 되는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닫습니다.
오토가 어린 시절 "자리를 양보하라"는 예절교육을 받은 것에서 나비효과가 일어나 마틸드의 어머니가 죽은 걸까요? 아니요. 이 모든 건 시간 순서대로 나열될 뿐 서로 상호작용하지않는 개별 사건입니다. 엔딩과 오프닝을 장식하는 "파란 자전거가 갖고 싶어요" 때문도 아니죠. 그것들을 이은 건 오로지 상실을 경험한 이들의 절박함뿐입니다.
이 영화는 시리우스의 말을 빌리자면 MBT 입니다.
영화 내에서는 역할 치료극 같은 거라고 나오는데 아마 정신화 기반 치료 Mentalization-Based Therapy를 말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야기 속에서 가족 내 결핍을 경험한 이들은 서로를 보듬으며 유사가족을 완성합니다.
모두 양육자-피양육자 관계에서 트라우마를 갖고 있으며 각각의 특성에 따라 이 공동체 안에서도 소그룹으로 묶이기도 합니다.
가족의 상실을 경험하고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마르쿠스와 오토,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이겨낸 듯 보이지만 여전히 고통받는 레나크와 우크라이나 청년(이름 까먹음), 비만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감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마틸드와 에멘탈러. 모두에게 실질적인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마르쿠스와 그가 휘두르는 폭력의 압제를 받는 나머지로도 볼 수 있습니다.
아기돼지 삼형제 친구들과 우크라이나 청년, 마틸드는 영화에서 그려지는 바로도 유년기의 트라우마가 영향을 미친 것을 알 수 있는데 영화 내내 가장의 위치에서 내려오지 않는 마르쿠스 역시 자신의 폭력적 성향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며 이윽고 오토의 품에 안겨 우는 것을 보면 다른 캐릭터들과 다른 방향성이나 어떠한 결핍이 있었으리라 예측할 수 있습니다.
이 가족 공동체 공간에 끼어 있으면서 그들을 배신함으로써 이들을 공동체로 묶는 사건을 유발하는 시리우스가 부모와의 유대감을 내비치며 이들과는 아픔에 의한 유대감을 쌓지 않는다는 점에서도요.
MBT의 특징은 내담자의 내적 표상을 모으기 위해 현재 정신 상태(생각, 욕구, 소망 등)에 집중하고 무의식은 덜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영화는 내내 이 망가진 캐릭터들이 "난 살찌는게 무섭지 않아"에서부터 "다 죽여버리겠다" 까지 욕구를 내비치게 하되 그들의 숨겨진 상처를 억지로 벌리거나 방어기제를 무너뜨리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 욕구를 숨기지 않는과정에서 살짝 내비쳐 보이긴 하지만요.
이 영화의 끝에서 다 뿔뿔이 흩어져 자기 상처만 보던 이들은 서로를 위해 고른 선물을 주며 시공간을 함께 하며 다소 장난스럽기까지했던 치료의 약효가 들고 있음을 보여주며 묘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가족에 의해 상처 받은 이들이 유사 가족을 이루며 치유받는다는 것은 정상가족이라는 구시대적 가치를 폐하면서 동시에 가족이라는 가치관을 다시금 공고한다는 점에서 조금 새로워진 보수주의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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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필요없고 이 영화는 유러피언 블랙코미디로 그린 드라마입니다 ^^ 액션도 임팩트가 센데 생각해보면 엄청 멋있는 촤차차차착 하는 액션은 딱히 없어 (그냥 배우의 간지 효과였던 거 같기도) 가족 힐링 드라마 60+블랙코미디 30+액션10 정도로 느꼈습니다.
영화의 진짜 메시지는 우크라이나의 우화에서 드러납니다. '아 세월의 무상함에 복수의 의미도 풍화되는구나, 복수란 참 덧없으니 집착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평화염원을 던지는데 모든 캐릭터가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란 표정을 쫙 보여주길래 '아 여기서 한 번 더 웃겨주는 구나, 쉽게는 안 넘어가네' 싶었습니다 ㅎ
개인적으로는 유럽 북쪽(같은 나라 안에서도 북쪽 지역이 더) 좀 더 이런 시니컬함? 심각한 상황에서 생뚱맞은 짓을 저지르는 아이러니한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블랙코미디 기조가 있다는 느낌입니다. (기후 때문인건가 싶기도..)
마르쿠스가 찾고자 했던 다이아몬드 반지는 "가족"이라는 가치였을겁니다.
딸은 낳을 마음이 없었지만 가족을 만들고 싶었던 이유인 아내-이 "가족"이라는 상징을 빼앗아갔기에 복수를 해야했던
하지만 공주의 다이아몬드 반지와 달리 그가 잃어버린 다이아몬드 반지는 딸을 살리기 위해 애쓰는 순간에, 절대 사람은 못 죽인다던 세 친구가 자기를 구하기 위해 총을 들었을 때, 곰의 뱃속이나 어딘가 오물 사이에 있는게 아니라 이미 그의 손에 다시 끼워져 있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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