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코스프레? 태평양 전쟁 다룬 애니메이션 3편

태평양 전쟁을 배경으로 한 일본 애니메이션 세 편을 보고 가볍게 정리하는 마음으로 쓰는 글입니다.
소재의 특성상 '피해자 행세' 논란이 끊이질 않는 영화들인데, 작품에 대한 짧은 감상과 각각의 논란에 대한 생각도 간단히 덧붙여 봤습니다.
반딧불의 묘 (1988)
공습으로 인해 세상에 단둘이 남겨진 남매의 이야기로, 지브리 스튜디오의 초창기 작품입니다.
지브리답게 아름다운 작화와 섬세한 표현력, 관객의 감정선을 끌어올리다 한순간 흔들어놓는 솜씨의 스토리텔링이 일품이죠. 남매가 겪는 우여곡절과 가혹한 고난을 지켜보고 있으면 몇번을 울컥하게 됩니다.
지금 보면 이야기 자체는 다분히 신파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보다 효과적인 신파는 몇 없다고 느꼈을 정도로 영리하고 짜임새가 좋아요.
한편 이 영화도 피해자 행세 논란이 뜨거웠는데, 사실 어느 정도 의구심이 들 만한 부분이 있긴 합니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고위 군인이며 아들은 아버지를 자랑스러워 하며 힘차게 군가를 부르는 장면이라던가..
평화주의자인 원작자와 감독은 남자 주인공의 경솔함과 어리석음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으로도 봐 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지만, 막상 영화를 보면 주인공 남매가 철없게 느껴지는 것은 잠시 뿐이고 결국 한없이 불쌍해 보이기도 하거든요.
어쨌든 굉장히 탁월한 만듦새의 애니메이션이긴 한데, 맥락을 짚기에 따라선 당시의 일본을 '전쟁의 피해자'로도, 혹은 '스스로의 어리석음으로 화를 자초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조금 미묘한 구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바람이 분다 (2013)
뚜렷한 실존 인물을 다룬 영화입니다. 일본군의 주력 전투기였던 '제로센'의 설계자, '호리코시 지로'의 삶과 사랑을 소재로 하고 있죠.
미야자키 하야오가 특별히 공들인 작품인 만큼 영상미는 대단하지만, 영화의 전개는 어딘가 심심하고 단조로웠습니다. 연출 전반에 극적인 맛이 없어 좀 밍숭맹숭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리고 소재가 소재인 만큼 한국과 중국에서 전쟁 미화, 우익 논란이 가장 크게 불거졌습니다. 익히 알려진 반전주의자인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한 실망과 성토의 목소리도 나왔구요.
사실 영화를 보면 전쟁을 미화하는 우익적인 가치관은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인공의 입을 빌어 당시 일본 군부의 무모함과 포악함을 대놓고 비판하며, 일본의 파멸을 예견하는 외국인도 나오죠.
어쨌든 양심적인 지식인의 입장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냉소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을 견지하고 있는 작품인 것으로 보입니다. 단 한가지, 그 양심적인 지식인이 일본군에 크게 기여한 핵심 당사자라는 사실을 빼놓는다면 말이죠...
이러니까 좀 모순적으로 보이는게, 전쟁은 나쁘고 군부도 나쁘지만 전쟁통에 자기 꿈 좇아서 열심히 비행기를 만든 주인공에게는 약간 면죄부를 주는 느낌이 있는 겁니다. 일본의 군사국가화라는 현실을 외면하고 비행기 제작이라는 개인의 사명에만 미친 듯이 몰두했던 주인공인데요. (사실 이런 묘사도 창작으로, 실제 인물의 성향과는 좀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 생각해보니, 본인의 애니메이션을 통해 반전의 메시지를 수없이 설파한 장본인이면서 중증의 전투기 오타쿠로도 잘 알려진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의 내적인 모순을 영화로 풀어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ㅋㅋ
이 세상의 한구석에 (2017)
히로시마 인근의 한 마을에서 시집 살이를 시작한 어리숙한 새댁이 주인공으로,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대체로 소박하고 귀여운 그림체지만 애니메이션이기에 가능한 과감한 표현들이 돋보이기도 합니다. 멍한 주인공이 자주 현실과 동떨어져서 공상에 빠지는데, 그걸 묘사하는 초현실적인 장면들이 일품입니다.
이 영화는 많은 반전 영화들처럼 평화롭던 일상에 어느 날 군인이나 폭탄이 들이닥쳐 갑자기 삶이 망가지는 방식으로 전쟁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대신 언제부턴가 시작된 전쟁이 평범한 소시민의 작은 일상을 천천히 잠식하며, 평온과 소박한 웃음으로 채워진 공간이 조금씩 불안과 슬픔으로 대체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전쟁으로 인해 많은 것을 잃어버린 삶도 어쨌든 또 하나의 일상으로 이어짐을 함축하는, 영화의 겸허하고 담담한 분위기도 좋았구요.
배경이 되는 '구레'라는 마을이 실제로 전쟁 당시 일본 해군의 물자 보급을 위한 병참 기지 역할을 했다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순박한 주인공은 매일 보는 군함과 전투기를 심심풀이 삼아 그리며, 마을의 아이들은 어떤 악의도 없이 비행기를 보며 감탄하고 여러 군함들의 이름을 외우면서 자라죠.
그리고 일제의 침략 전쟁에 어떠한 기여도 하지 않은 듯한 이들에게도 결국에는 전쟁의 칼끝이 겨눠지고, 절대 지워지지 않을 고통과 함께 통렬한 자각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바로 자신들이 가해국의 국민이라는 깨달음입니다.
대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반전'을 이야기하는 대신 다소 둘러가는 화법을 취하지만, 민감할 수 있는 소재에 대한 태도를 관객의 몫으로 남기는 무책임한 영화도 아닙니다.
납작하고 평범한 반전 메시지가 아니라 전쟁과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는 영화, '피해자 코스프레'라는 경멸적인 표현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진솔하고 성숙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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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네요.
애니 만화 둘 다 훌륭한 작품인지라 애니만 보신분은 만화책도 꼭 보시길 추천 드립니다


여동생이 죽어갈 때 그 장면은 보고 마음이 너무 무너졌던,
피해자 코스프레라는 말 보다는 전 비참함을 더 많이 느꼈던...
두번은 못보겠더라구요.
바람이 분다는.........능력 있는 개인의 꿈이 만든 결과에 대한 반성이 없는 점이 아쉬웠던
이 세상의 한구석은 한번 봐야 겠네요


그 후로 일본 애니를 끊었죠.
원작자와 감독이 비판의 시선으로 봐달라고 한건 지금 알았네요.

자필 회고록에서 밝혔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미화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