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IFF/약간스포] '빛과 철' 간단 리뷰
1. '빛과 철'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나는 2년전 썼던 '죄많은 소녀'에 대한 글을 다시 열어봐야 했다. '허물의 알고리즘'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글은 '죄'라는 허물이 어떻게 만들어져서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나름의 기술을 하고 있다. 이 기술은 '죄많은 소녀'에 드러난 지점으로 소녀가 짊어진 그 많은 죄들이 어떻게 형성됐고 어떻게 작용하는지 보여준다. '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영화는 종교적이지 않고 철저하게 인간적이다. '죄많은 소녀'는 사람 사이에 관계라는 붉은 실이 그물처럼 이어져있고 그것을 통해 죄는 어떻게 이어지며 그물망 사이를 지나며 그 죄가 어떻게 변하는지 보여준다. 죄의 본질보다는 죄 자체에 매몰된 인간이 지금 우리의 모습인 셈이다. '빛과 철'은 이것과 닮았지만 다른 이야기를 던진다. 죄를 의식하는 일, 죄의식은 우리 모두가 '타인'이어서 생긴다. '관계'는 상대와 내가 이어져있음을 말한다. 사회 속에서 상대와 나는 어떻게든 이어져 있다. 그것은 '케빈 베이컨의 6단계' 게임처럼 어떻게 가더라도 결국 관계의 끈이 이어져있음을 말한다. 우리는 관계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서로 일체하진 않는다. 다른 몸을 가지고 다른 환경에서 자라 다른 의식이 형성돼있다. 관계하고 있지만 우리는 각자 '타인'이다. 그렇다면 '타인' 사이에서 죄는 어떻게 일어나고 작용하는가.
2. '빛과 철'은 희주(김시은)와 영남(염혜란)의 이야기다. 희주의 남편 선우와 영남의 남편 남길은 간밤에 외딴 도로에서 사고를 당했다. 선우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남길은 숨은 붙어있으나 의식이 없는 상태다. 영남과 딸 은영(박지후)은 의식이 없는 남편(아빠)을 2년 넘게 돌보며 많이 지친 상태다. 두 사람은 우연히 한 직장에서 만났다. 이 직장은 남길이 다녔던 곳이며 희주도 사고 전에 근무했던 곳이다. 아마도 사고 전에 남길과 희주는 왕래가 없었던 모양이다. 사고는 100:0으로 선우가 가해자가 됐고 남길이 피해자가 됐다. 희주의 오빠 형주(이주원)는 패닉상태인 희주 대신 합의를 도와줬다. 희주는 자세한 내막을 모른 채 남편이 가해자인 것을 알고 영남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 다시 돌아간 직장에서 영남을 만났으니 불편할 수 밖에 없다. 영화는 희주와 영남의 불편한 재회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다 은영이 희주의 삶에 끼어들게 되고 그때부터 사고에 대한 몰랐던 진실이 하나씩 드러나게 된다.
3. '빛과 철'의 패턴은 꽤 단순하다. 사고가 있고 희주와 영남이 재회했지만 모두들 그날의 진실을 정확히 모른다. 그리고 두 사람의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이들을 둘러싼 주변인들이 하나씩 그날의 진실을 털어놓는다. 이야기를 털어놓는 사람들은 모두 공통점이 있다. 사건에 대해 자신만의 죄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죄의식은 마치 감옥처럼 희주와 영남을 둘러싸서 괴롭힌다. 죄의식은 간단하다. 모두들 그날의 사고에 대해 자신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작 희주와 영남은 하나씩 진실을 알아가면서 상대방에게 책임을 묻지만 사고의 책임은 영화 속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지고 있다. 그 죄의식은 상대에게 말하지 못한, 말했어야 하는 후회에서 비롯된다. '말하지 못함'은 결국 타인이었기에 비롯됐다. 그리고 상대방이 타인이기 때문에 오해하고 갈등한다. 영화 속 모든 '죄의식의 향연'은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도 결국 '타인'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희주가 찾아간 정신과의사의 말은 이 영화의 핵심이다. "아내도 타인이다".
4. '빛과 철'은 '죄의식의 향연'이다. 때문에 이 영화를 보는 일은 꽤 괴로운 경험이다. 첫 장면에서는 선우와 남길이 일어난 사고를 뒷따라오는 차 안 운전자의 시점으로 보여준다. 이 운전자는 사고현장을 목격하고 잠시 멈칫하지만 이내 차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간다. 사이드미러에서는 사고난 차의 전조등 불빛이 처참하게 도움을 외치고 있다. 이 장면은 관객을 사고의 공범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날 내려서 응급처치를 하고 구급차를 불렀다면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죄의식을 관객도 갖게 한다. 이후 영화는 끊임없이 희주와 영남에게 관객을 이입시킨다. 예를 들어 희주에게 일어나는 이명을 그대로 관객에게도 들려줘 희주의 고통을 체감하도록 한다. 여기에는 김시은과 염혜란의 기가 막힌 연기도 한몫한다. '빛과 철'은 그들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으로 초대되는 기분이다.
5. 그렇다면 관객은 왜 이 고통으로 초대돼야 하는가. '빛과 철'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은 상대와 내가 타인임을 인정하는 과정이다. 모두들 죄의식을 털어놓음으로써 타인이었음을 인정한다. 희주는 남편의 정신과 기록을 불법적으로 구하지만 다 읽었는지도 모르게 찢어버린다. "아내도 타인"이라는 사실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모두들 서로 다른 사람이며 다른 경험을 했고 다른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이는 희주와 영남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같은 사고의 가장 직접적인 당사자지만 같은 경험을 온전히 공유하고 있진 않다. 그렇기 때문에 오해하고 갈등한다. 물론 같은 경험을 공유한다고 좋은 결과가 나오진 않겠지만 적어도 비극적 결말은 막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험이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이는 서로 타인임을 인정하는 과정이다. 얼마전 '강철비2: 정상회담'과 관련해 양우석 감독은 "통일을 하기 위해서는 서로 분단국가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사람 사이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서로 타인임을 인정해야 한다. 무엇보다 아내와 남편은 일체가 아니며 자식은 부모에 귀속된 존재가 아니다. 관리직은 사원의 개인사를 모두 관리할 의무가 없고 오빠는 동생의 모든 것을 챙길 필요가 없다. 타인임을 인정한다면 죄의식에 괴로워 할 일도 없다. '빛과 철'은 타인임을 받아들여 죄의식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다.
6. 결론: 영화를 다 보고 돌이켜보니 이야기의 패턴이 단순해서 헛웃음이 났지만 크게 어색하진 않다. 모두의 죄의식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과정을 잘 선택했다. 소위 말하는 '회수되지 않은 떡밥'이 많지만 영화적으로 이해할 꺼리가 된다. 아마도 이 영화가 개봉하고 나면 유튜버들은 '곡성'이나 '기생충'만큼 해석하려고 달려들 것이다(물론 영화가 잘돼야 가능한 일이다). 다른 것보다 배우들의 연기는 정말 완벽하다. 염혜란, 김시은, 박지후. 그 누구의 얼굴을 보더라도 마음이 아파온다. '빛과 철'은 근래 본 독립영화 중 배우가 가장 빛나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