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마로나] 관람평(스포없음)
영화사 찬란과 소지섭님께 또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겠군요. 덕분에 이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극장에서 볼 영화로 <환상의 마로나>를 골랐고, 그 선택은 옳았습니다.
결국 눈물을 훔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별 일 없는 한, 올해 이 작품은 저의 베스트 작품목록에 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아래는 스포일러 없는 관람평입니다.
(스포일러라고 할 것이 딱히 없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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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마로나>는 애니메이션을 다시 태초의 마법적 체험으로 되돌려놓는다.
실사영화였다면 한계가 있었을 그 ‘환상’의 구현을 점과 선의 움직임으로 가능케 한다.
때론 과감하고, 강렬하며,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가득한 감각의 92분.
한마디로 4개의 서로 다른 이름을 가졌던 한 개(아홉, 아나, 사라, 마로나)의 회고록.
존재의 생성에서 소멸까지, 파란만장했던 생의 몸짓이다.
이 영화에 행성이 많이 등장한다. 개의 눈에 비친 이 세상은 곧 우주였고,
지구의 땅과 우주, 그 둘 사이의 경계는 사라지며, 개의 세계는 인간의 인식보다 확장된다.
이 작은 생명의 눈으로 바라보고 유영한 우주는 그야말로 변화무쌍하다.
때론 거친 세상 앞에 시련도 있다.
목숨을 위협하는 자동차들은 날카로운 이빨을 달고 있고,
이 문명의 기계 무리는 포식자처럼 야생을 대체한다.
서로 다른 세 명의 주인을 만나는 동안, 우리가 마주하는 건 공간의 이동뿐만이 아니다.
이 작품이 환상성을 더하는 건, 여기에 시간의 마법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적 워프.
마지막 주인인 솔랑주의 시대는 분명히 우리가 사는 시대와 동시대임이 확실하지만(노트북과 폰이 그걸 증명한다)
이스트반의 시대는 그보다 전이며, 마놀의 시대는 그보다 한참 전임을 환경의 맥락상 유추할 수 있다.
생명으로선 하나이지만, 마로나는 서로 다른 시대를 관통해 달리고 점프한다.
종으로서의 역사가 아닌, 개체의 역사가 그렇게 쓰인다.
애니메이션으로 이 작품의 빼어남은 심정의 이미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아홉’에서 버려지고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마놀의 마음은
끝없이 휘몰아치는 역동적인 곡선으로(그 선들은 불안한 마놀을 가끔 옭아맨다),
건축업자인 이스트반의 세계는 마치 제도(製圖)로 채운 격자 모양 같은 이미지로,
마지막 솔랑주의 세상은 색채로 가득하다(주로 밝고 노랑계통)
개와 이 주인들(그리고 그 주변인)은 깊은 교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관계는 번번이 실패한다.
<환상의 마로나>가 관심 있는 건, 인간사를 관찰하고 의문을 품는 개의 시선이다.
마로나의 하트 모양 코는 킁킁거리며 냄새로 인간의 희로애락과 자신의 운명을 감지한다.
관객은 이 개와 함께 시간을 건너며, 우리 스스로의 세상을 반추하게 된다.
우리의 곁에 무엇이 남아있는지, 뭔가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사유하게 된다.
김춘수의 ‘꽃’이 떠오른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한없이 곁에 두고픈 따뜻한 체온. 신음하며 비틀거리는 인간사에 선사한 위안은 이제 흔적이 되고 있다.
서로 다른 4개의 이름으로, 서로 다른 의미로 메모리되는 개의 여행.
프랑스어 원제대로, 기이한 마로나의 여정이 흩날린 감각의 잔향은 그윽했다.
‘시간을 달린 견생으로부터 얻는 인생의 배움.’
★★★★
텐더로인
추천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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