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리뷰
밤이었다. 코로나19의 여파로 한산한 극장. 새로 개장한 용산 cgv 7층 식당가는 음식 냄새조차 퍼져 나오지 않았다. 자고로 음식 장사의 최고봉은 냄새로 구워삶는 모객이라 했거늘.
그런, 초라해진 상황에 초췌해진 마음이 더해졌던 탓일까. 무릇 시사라고 오면서 감독이 누구인지, 배우가 누구인지조차 검색해보지 않았다. 변명이라면 변명이다. 무신경했다. 영화를 보면서 이러기도 오랜만이었다.
그렇게 들어선 용산 12관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느라 한 줄 건너 한 줄, 관람객을 배치시켰다. 그러거나 말거나 몇몇은 자리를 이탈해 빈 줄로 가서 편함을 추구한다. 누구 하나 말리지 않더라도 알게 모르게 보풀 하나쯤 살짝 마음에 인다. 작은 것 하나 안 지키고 무시하는 심인은 나쁜 것에서 발화하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다.
불이 꺼지기 전. 이번에도 디오시네마 대표님은 마이크를 잡는다. 영화 잘 보시라는 의례적인 말에 괜히 미안해졌다. 요즘 같은 때에 그는 어쩌면 무모하거나 용맹한 사람일 테니까. 그러나 상당수의 심지를 저울 위에 두어 가늠하자면 무모함으로 치우치지 않을까. 그러나 이런 무모함은 늘 고맙다. 씨앗은 그렇게 뿌려야 분기탱천하는 열기를 견뎌내는 법이다. 그리고 불이 꺼진다.
스크린을 투사하는 불빛. 영화가 시작되자 늘 그렇듯 가슴이 뛴다. 영화를 본다는 열화! 물론 정확한 제목을 그제야 알았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새를 키워본 적 없는 내게, 참으로 추상적인 제목이다. 새가 지저귀는 것인지, 노래하는 것인지를 두고 싸우던 선배 시인들이 떠올랐다. 물론 그들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들을 속으로 이렇게 몰았다. 미친놈들!
영화는 웃음을 주기도 또 씁쓰레함을 주기도 하며 106분이라는 시간을 채웠다. 일본영화 특유의 느리고 긴 숏들이 간혹 심기를 건드렸지만 이건 창작자의 독자적인 자기 것이다. 가타부타 이를 말하는 것은 사실 나부터 지저귀냐, 노래하느냐를 가지고 상대를 설득하는 것에 다름없을 테니까.
영화를 보는 내내 용산 cgv 12관의 의자가 거슬린다. 약간의 움직임에도 살려달라 비명을 내지르는 삐걱거림이 애처롭다. 요즘 영 제 구실을 못 하는 내 발목을 보는 듯해서 약간은 심상하게 지나칠 법도 하지만 정도가 지나친 탓에 영화의 흐름을 방해하기 일쑤다. 청춘을 말하는 영화에 삐걱거리는 발목과 영화관 의자라니! 이게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영화는 청춘과 사랑을 말했다. 다만 청춘도 사랑도 규정하지 않음으로 인해 포용과 인지의 범위가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 인간은, 자신이 아는 한 그 모든 것들을 지식이라는 틀 안으로 끌어오려는 아둔함을 가졌다. 그러나 단 하나! 사랑만큼은 지식의 안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했다. 여전히 사랑을 학문이 아닌, 그러면서도 학문보다 소중히 대하는 태도 역시 용산 cgv 12관의 의자만큼이나 아이러니라는 사실이다.
가객 김창완은 청춘을 "언젠가 가는", "지고 또 지는 꽃"이라 했다. 누군가 보기에는 아무렇게나 사는 영화 속 청춘들에게 사랑은 그래서 더없이 간절했을 것이다. 훔쳐왔던 꽃은 시들고 어머니는 아프고 선배도 점장도 시난고난 살아가는 너의 새이거나, 나의 새일 테니까.
노래를 하든 말든 알게 뭔가. 어떻게든 되겠지. 살아가는 일이니까. 내일도 삐걱거리는 의자 어디인가에 관객은 앉을 터이고.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영화 속 남주의 대사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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