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을 결산하며: 올해의 베스트 11편
포드 대 페라리, 제임스 맨골드
<포드 대 페라리>의 가장 큰 감흥은 무엇보다도 레이싱의 짜릿한 경쾌함이다. 그러나 영화는 동시에 레이싱이 가져오는 죽음과 불안을 응시한다. 이는 곧 영화 이미지에 대한 매혹과 불안으로 느껴진다. 그럼에도 영화는 끝내 그 불안마저 초월하며 말로 표현되지 않는, 그 매혹이 주는 순수한 감흥의 순간에 경배를 보낸다. 그 감흥은 마치 과거 고전영화들이 주었던 어떤 경지처럼 느껴진다.
기생충, 봉준호
이전까지의 봉준호 영화들이 탐색과 수사의 영화였다면 <기생충>은 침입과 은폐의 영화이다. 봉준호는 전반부를 일종의 케이퍼 장르로 구성되며 기택 가족의 침입을 그려낸다. 그리고 중반부터 서서히 영화의 표면을 적시며 틈새를 만들고 현실의 냄새를 서서히 침입시키며 장르가 만들어내는 환상을 무너트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을 막으려는 은폐의 과정은 끝내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감추어져 있던 현실은 드러나고 결국 파국은 발생한다. 그리고 남은 것은 결국 공존의 불가능이다.
아이리시맨, 마틴 스콜세지
<아이리시맨>은 기존의 갱스터 영화들이 보여주던 어떤 매혹의 순간도 비껴 지나가며 최후에 남은 것은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시간 뿐이다. 마틴 스콜세지는 이 영화에서 갱스터 장르를 해체하고 소멸시킨 이후의 시간을 묵묵히 응시한다. 또한 컴퓨터 그래픽으로도 가릴 수 없는 노인들의 얼굴과 몸짓들이 곧 영화의 서사를 만들어낸다.
라스트 미션, 클린트 이스트우드
이스트우드의 깊게 패인 주름과 근심섞인 표정을 보는 순간 영화와 현실의 경계는 무너진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그랜 토리노> 이후 다시 한번 그의 유언장을 갱신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동안 세상과 불화하고 이내 사라지는 영웅의 이야기를 그렸다. 그러나 <설리>에서부터 그는 그 영웅이 설 자리를 찾는것처럼 느껴진다(혹은 이스트우드 본인). 트럼프의 당선이 끼친 영향일까? 그래도 나는 계속 해서 그가 만들어내는, 마치 피었다 한순간에 지는 백합 같은, 아름다운 영화적 순간을 느끼고 싶다.
강변호텔, 홍상수
솔직히 말하면 나는 홍상수라는 감독을 잘 모른다. 그래서 이 영화가 그동안의 그의 작품과 무엇이 다른지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그의 영화가 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흥을 주는 지는 확실히 알았다. <강변호텔>은 수많은 엇갈림의 순간으로 만들어지는 영화다. 이상하게 영화 속 아름다운 장면에는 죽음의 불안이 같이 느껴진다. 그리고 마지막 엔딩은 그 죽음의 순간이 오면서 동시에 엇갈림이 봉합된다. 이 장면을 보며 이것이 영화만이 구현할 수 있는 기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퍼스트 리폼드, 폴 슈레이더
폴 슈레이더는 언제나 그렇듯 죽음과 구원에 집착하는 광인의 이야기를 그린다. 세상과 구원에 대한 회의에 빠져가던 사제가 어떤 여인과 접촉할 때 펼쳐지는 어떤 초월적인 순간이 주는 매혹과 불안의 광경은 싸구려 CG로도 가릴수없는 마법같은 순간이다. 그리고 마지막, 모든 것이 끝나고 죽음만이 남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결국 사제를 구원하는 세속적 욕망, 그러나 영화는 갑자기 화면을 중단한다. 폴 슈레이더는 영화를 통해 구원의 경로를 탐색하지만 여전히 그 구원이란 것이 가능한지 근심한다.
더 라이트하우스, 로버트 에거스
1.23:1의 좁은 프레임, 폭풍우가 몰아치는 섬이라는 환경을 조성한 후 영화는 마치 <샤이닝>의 광인들이 러브크래프트의 세계관에 던져졌을 때의 광경을 보여준다. 그 지옥같은 섬에서 인간을 파멸시키는 것은 결국 욕망이다. 환상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순간까지 몰아가며 구현하는 그 기괴하고도 뒤틀린 욕망의 이미지들은 어떻게 보면 아름답게도 느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화를 가장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로버트 패틴슨과 윌리엄 데포가 만들어내는 광기의 에너지이다.
지구 최후의 밤, 비 간
수많은 레퍼런스들이 스쳐 지나간다. 화어권 감독인 왕가위와 허우 샤오시엔은 물론이고 히치콕의 <현기증>, 심지어 타르코프스키까지! 솔직히 서사는 무슨 내용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기억들이라는 것은 알 것만 같다. 그리고 영화는 전반부에서 그 기억의 파편들이 만들어내는 매혹적인 이미지들을 최대한 끌어모으며 이내 그 감각을 체험의 순간으로 만드는 후반부의 3d와 롱테이크는 정말 올해의 놀라운 순간 중 하나이다.
애드 아스트라, 제임스 그레이
우주 버전의 <지옥의 묵시록>처럼 느껴지는 이 영화는 인간 내면의 심연을 들여다보며 혈연이 만든 운명을 따라야할지, 그것에서 벗어나야 할지를 고민하는 남자의 서사를 다룬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이다. 전작인 <잃어버린 도시 Z>가 공동체에서 벗어나 정글이라는 매혹을 찾아나서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뤘다. 그리고 <애드 아스트라>는 정확히 그 반대지점에서 매혹에 빠진 아버지를 찾아나서는 아들의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그 매혹이 가진 불안을 응시하며 끝내 공동체로 돌아오는 이아기라는 점이 상당히 흥미롭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서사 이상의 감정을 만들어내는 브래드 피트의 근심어린 표정일 것이다.
그녀들을 도와줘, 앤드류 부잘스키
제목만 보면 전형적인 여성들의 연대영화를 떠오르게 하는 이 영화는 실은 연대의 불가능을 근심하는 영화처럼 느껴진다. 처음부터 제시되는, 프레임 속으로 끊임없이 침입하는 인물들처럼 연대를 위한 주인공 리사의 노력에도 끊임없이 문제는 일어난다. 또한 그 연대를 무너트리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각자가 살아가는 삶이다.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의 연대의 환상이 무너진, 표백된 하늘만이 남아있는 공간에서 다시 한번 연대의 가능성을 살펴보면서도 그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끊임없이 의심한다.
김군, 강상우
<김군>은 익명의 광주 시민군의 실체를 추적하며 민주화의 성지이든, 폭동의 현장이든 각 진영의 기호에 따라 선택된 80년의 광주라는 일종의 이미지를 해체해 나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광주가 폭동의 현장이 아니었던만큼 아름답고 순수했던 민주화의 성지가 아니였던 것을 보게 된다. 그 때의 사람들이 말하는 증언을 통해 80년 광주가 갖고있던 엄숙한 이미지를 없애고 실제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세속적인 기억을 소환한다. 그리고 영화는 80년의 광주가 현재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 때의 광주를 그저 과거의 한 기억으로 묻어두려는 시도를 거부한다.
추천인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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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트우드 감독님 신작도 빨리 볼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