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영 특별전 - 이어도] 간략후기
익무의 은혜에 힘입어 CGV 명동역씨네라이브러리 헌정관 '김기영관' 오픈을 맞아 열린
'김기영 마스터피스 특별전'의 상영작 중 한 편인 영화 <이어도>를 보았습니다.
故 김기영 감독의 1977년작으로 故 이청준 작가의 동명 소설을 느슨하게 바탕삼고 있는 이 영화는
(실제로 영화와 소설은 상당히 많은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김기영 감독 버전의 재해석 개념이라고...)
지금도 지상파는 물론 케이블 TV에도 온전히 방영될 수 없는, 정식으로 극장 개봉을 한다 해도
온전히 상영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만큼 파격적이고 그만큼 진보한 영화입니다.
제주도 남쪽에 위치한 신비의 섬 '이어도'에 호텔을 지을 계획을 알리고자
기자들을 유람선에 태운 주인공 선우현(김정철)은 유람선이 이어도로 향한다는 것을
기자들에게 즉석에서 알리고, 이에 이어도와 근접한 섬 파랑도 출신의 기자 천남석(최윤석)은
그리로 갔다간 모두 죽을 거라고 반발하며 선우현과 한바탕 소동을 피우게 됩니다.
천남석과 밤새 선상에서 술을 마시던 선우현은 잠에서 깨어난 후 천남석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되고,
천남석의 실종 전 마지막으로 함께 있었던 선우현은 천남석을 죽였다는 오해를 받게 됩니다.
천남석을 계속 추궁하는 신문사 편집국장과 함께 선우현은 천남석의 고향인
파랑도를 돌며 여러 사람들로부터 천남석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습니다.
권력자처럼 보이는 무녀(박정자), 신문을 즐겨보는 술집여자(이화시),
천남석의 연인이었던 박여인(권미혜), 천남석과 애증으로 얽힌 동료 등을 만나면서
선우현은 천남석과 이 섬 사이에 감도는 이상한 기운에 휩싸이게 됩니다.
40여년이나 앞서 나온 영화라고 믿기 힘들 만큼 <이어도>의 전개는 독특합니다.
현재 시점의 선우현에서 시작해 3년 전에 그가 겪은 일에 대한 회상으로 건너간 후
나중에는 3년 전 이야기에 등장하는 천남석의 과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중 액자식 구성 속에서
다양한 인물들의 입으로 서술되는 한 인간과 섬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가뜩이나 속세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진 파랑도라는 배경에 더욱 음산한 신비감을 더합니다.
따지고 보면 당시(1977년)로부터 채 20년도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 이야기인데도,
영화의 이런 구성 방식 덕분인지 마치 매우 옛날 옛적에 있었던 이야기이거나
아니면 아예 시공간 불명인 아주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만나는 느낌입니다.
선우현은 자신이 천남석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주변인물들을 만나며
논리적으로 진실을 규명하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논리는 무의미해집니다.
이어도에 인접한 파랑도라는 섬은 논리나 이성보다 맹목적 믿음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남성과 혈통에 대한 믿음이 이곳 인구의 절대 다수인 여성들의 공동체를 짙게 지배하고 있고,
무녀는 그런 믿음을 발판삼아 권력자처럼 섬 사람들 위에 군림합니다.
진실을 규명하고자 했던 처음의 노력은 섬 사람들로부터 듣는 불가사의한 이야기들,
섬 곳곳에서 목격되는 괴이한 광경들 속에서 점점 무력화되고 마지막에 다다르면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따지는 것 이전에 이 섬과 섬 사람들의 정체를 목격하고
이해하는 것 자체가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과제로 남게 됩니다.
이렇듯 김기영 감독은 이 괴이한 섬의 정의와 실체를 친절하게 보여줄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갈수록 기함할 순간들을 보여주며 이런 것들 자체가 곧 이 섬의 정의이자 실체라고 말하는 듯 합니다.
요즘 나오는 웬만한 유럽영화에서도 보지 못한 후반부의 충격적인 장면이 나올 무렵에는
놀라서 입을 벌리거나 무서워서 눈을 가리기보다는 그저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가' 멍해질 따름입니다.
그러나 김기영 감독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혼돈과 무질서'의 공간을 '치밀하게' 구축합니다.
섬과 동떨어진 초반부 현대 도시에서 별다른 의미가 없어 보였던 대사와 장면들이
후반부에 이르러서 만나는 섬에서의 장면과 기묘한 대비를 이룰 때 감독의 천재성에 탄성이 나옵니다.
지금 들으면 몹시 어색한 문어체 대사나 고전 영화로서 어쩔 수 없어 보이는 테크닉의 흠결이 있지만
몰입을 방해하기보다는 이 무렵 나온 영화에서만 만날 수 있는 독특한 캐릭터처럼 느껴집니다.
그 모든 사건이 지나간 후 한 여인만 남겨둔 채 섬을 떠나오며 '끝'이라는 자막이 나올 때에는,
결국 이 섬이 자신만은 침착하고 이성적이라고 믿는 우리들 다수가 내면의 심연에
꽁꽁 숨겨놓은 비이성과 무논리의 영역을 비유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 영역을 없애거나 해설할 수 없고 다만 저 멀리 제쳐둘 뿐인 것이겠죠.
이토록 김기영 감독이 영화를 통해 임하고자 했던 인간 내면의 어두운 영역에 대한 탐구는
지금 나오는 그 어떤 한국영화 감독들도 쉬이 도전할 수 없었을 독자적인 영역인 듯도 합니다.
아마도 40여년 전부터 이미 이렇게 대단한 사례가 나왔기에,
후배 감독들이 그것을 넘어설 자신이 없어서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익무 덕에 좋은 영화 잘 보았습니다.
추천인 8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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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에서도 이 영화를 틀어줬었군요... 신기하네요 ㅎㅎ

영상 자료원 유튜브로 보는데 후반 문제 장면은 꽤 세더라고요. 예전엔 삭제판으로 봐서 그렇게까지 묘사할 줄은 몰랐습니다. 스크린으로 봤음 더 충격이었겠네요.^^
너무 상식 밖의 장면이라 깜짝 놀라지도 못하고 그냥 내가 본게 설마 그런 건가 하고 멍하니 봤네요 ㅎㅎ

후반부의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구분못하는 장면은 마치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 인물 시점의 서술이 교대로 등장한다는 것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한 평론가의 <곡성> 리뷰에서 읽었던, 한국영화가 본격적으로 산업화되기 이전의 '불온한' 마력이 어떤 것인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지금의 한국영화가 할 수 있는 건 더 많아졌는데 해보려 하는 의지는 줄어든 것도 같네요 ㅎㅎ

리뷰를 읽고 기회가되면 보고싶어요. 박정자씨 출연, 분위기가 연상됩니다.

포스터 속 이화시 배우 눈빛 후덜덜 ^^;; 몇년 전 이어도, 김기영 감독 영화 중 최고의 충격이었습니다!

어제 극장에서 봤어요. 예전에 봤는지 안봤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봤는데 영화가 새롭게 보이는 거 보면 안봤었나봐요. 다소 난해한 전개랑 오컬트같은 분위기가 괴상했는데 후반부 장면에서 엄청 놀랐네요. 허걱....@_@ 일본 영화를 보는 줄 알았습니다. 저런 장면을 저 시대에 찍는게 가능한 가 싶었어요...그래도 김기영 영화를 좋아해서 그런 지 전 좋게 봤네요.ㅎㅎ
이 영화는 비디오로도 출시되지 않아서 2004년경에 케이블채널 cgv에서새벽에 틀어주길래 힘들게 예약녹화로 본 기억이 있네요 물론 그 이후에는 영화제를 통해서 보았지만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