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와이어 수석 평론가의 [미키17] 평론 (번역기)

로버트 패틴슨과 로버트 패틴슨이 주연을 맡은 봉준호 최고의 영어 영화
"<설국열차>와 <옥자>의 최고의 요소를 결합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낸 이 따뜻하고 멋진 영화는, 봉준호가 자본주의를 싫어하는 것보다 사람을 더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봉준호(“플란다스의 개” 그리고 그 이후 몇 편의 영화들)가 자본주의에 대해 몇 가지 불만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그렇다! 물론, 전직 캡틴 아메리카가 “아기 고기가 제일 맛있다”고 탄식하는 장면에서 숨겨진 의미를 읽어내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설국열차를 한 번 더 보면, 경제적으로 계급이 나뉜 기차 안에서 하층민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동안 앞칸에 있는 부유한 지배층은 영원히 지속되는 기관차의 혜택을 누리는 이야기가 사회 질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품고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옥자도 마찬가지다. 한 소녀와 그녀의 슈퍼돼지에 대한 사랑스러운 우화 뒤에는 기업 탐욕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숨겨져 있다. 괴물에서는 괴물이 산업화된 세계가 가장 취약한 공동체를 외면한 대가로 태어난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부패한 권력층의 무능이 사회 밑바닥까지 퍼져나가면서, 결국 연쇄살인범이 그 속에서 힘을 얻는다.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기생충만이 유일한 예외라고 할 수 있는데(농담이다).
어쨌든, 봉준호가 관심을 가지는 주제들은 명확하고, 그중에서 ‘미묘함’은 포함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영화가 섬세한 뉘앙스를 담아내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직설적인 방식은 단점이 아니라 오히려 장점이다. 사실, 봉준호 영화의 독특한 매력은 바로 자본주의의 명백한 부조리를 활용해 온갖 장르적 요소를 뒤섞고, 다양한 감정선을 휘몰아치게 만드는 데 있다. 그는 자본주의의 도덕적 불평등을 중심축으로 삼아 영화가 여러 방향으로 회전할 수 있도록 하면서도, 결코 중심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영어 영화 중 가장 완성도 높은 미키 17은 바로 이러한 봉준호의 천재성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이전의 두 영어 영화보다 더 유기적이며, 그의 한국 영화보다 더 유머러스하고 엉뚱한 면을 강조한다.
이런 흐름은 그의 가장 거대한 도전에서도 계속된다. 미키 17은 위트 있고, 즐겁고, 놀랍도록 따뜻한 블록버스터 우주 모험 영화다. 그리고 이 작품은 대형 미국 스튜디오가 제작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미키 17은 설국열차와 옥자와 너무나 유사해서, 워너 브라더스가 이 영화에 투자할 때 그게 어떤 영화인지 몰랐다고는 도저히 변명할 수 없을 것이다.
봉준호의 신작은 에드워드 애슈턴의 소설 Mickey 7을 ‘추가적인 요소’를 더해 각색한 작품으로, 그의 대표적인 스타일을 총집합한 듯한 영화다. 설국열차처럼 황폐해진 지구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일부 생존자들은 곧 부서질 듯한 거대한 이동 수단에 갇혀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차가 아니라 정부의 우주선이며, 전 인류가 아닌 소수만이 탑승해 있다. 이들은 인류의 이주 가능성을 조사하기 위해 얼음 행성 니플하임으로 향한다. 그러나 우주선 내부의 사회경제적 구조는 설국열차에서 본 것과 너무나도 비슷하다. 아니, 오히려 더 극단적으로 계층이 나뉘어 있다.
최상위에는 실패한 정치인 케네스 마샬(마크 러팔로)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이 탐사를 자신의 작은 왕국을 건설할 기회로 여기며, “순수한 백색 행성에서 완벽한 인간들로 가득 찬 식민지”를 꿈꾼다. 반면, 최하층에는 미키 반스(로버트 패틴슨)가 있다. 그는 순종적이고 자아 존중감이 바닥을 치는 고아로, 어린 시절 자신을 괴롭혔던 티모(스티븐 연)를 여전히 강아지처럼 따라다닌다. 그리고 티모가 “마카롱 장사가 대박 날 거야! 마카롱이 새로운 햄버거라니까!”라며 지구에서 가장 무서운 갱단에게서 돈을 빌리자고 했을 때, 미키는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동참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결국 탈출구를 찾던 두 사람은 케네스의 우주선을 타게 된다. 티모는 보일러실에서 일하지만, 미키는 스스로를 하찮게 여긴 나머지 ‘소모품(Expendable)’ 역할을 맡는다. 그의 기억과 생체 정보는 하드 드라이브에 저장되며, 죽을 때마다 새로운 몸으로 다시 프린트된다. 위험한 우주 유영이 필요할 때? 미키를 보내라. 니플하임의 공기에 에볼라 같은 바이러스가 있는지 확인해야 할 때? 미키를 보내라. 봉준호가 패틴슨을 여러 번 죽이는 데서 느끼는 즐거움(?)을 과장하는 것 같지만, 마치 더 서브스턴스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이걸 영화의 첫 장면으로 하면 어떨까?”라고 생각한 듯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봉준호가 주인공의 고통을 조롱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캐릭터들에게 깊은 연민을 보인다. 미키 17이 얼핏 그의 가장 ‘엉뚱한’ 영화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안에는 가슴 아픈 순간들이 가득하다. 봉준호는 미키의 고통을 단순히 그의 역할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를 가치 없는 존재로 여긴다는 점에서 더욱 깊이 있게 다룬다.
이것은 미묘한 차이지만 영화 전체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미키 17에서는 인간 복제가 ‘신과 같은 불멸성을 부여하는 기술’이자 동시에 ‘사회에서 가장 쓸모없는 존재에게 주어지는 형벌’로 묘사된다. 탐사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미키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하찮은 존재로 취급받는다. “너희 중 거의 모든 사람이 역사에 남을 것이다.” 케네스가 승무원들에게 이렇게 선언할 때, 누가 제외되는지는 너무나도 명백하다.
자본주의의 이상한 점 중 하나는, 명확한 역할이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덜 중요하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미키의 일은 ‘죽는 것’이고, 일이니까 누구도 그것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가장 신랄한 장면 중 하나는 미키가 3D 프린팅 되면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다. 처음에는 승무원들이 그를 부드럽게 안아주고 위로한다. 하지만 몇 번 반복되자, 미키 10이나 11쯤 되었을 때는 그저 바닥에 던져지고, 유일한 기술자는 태블릿으로 게임을 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미키 17은 봉준호의 기존 영화들과 닮았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 영화는 단순히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또 하나의 봉준호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사람을 사랑하는’ 첫 번째 봉준호 영화다.
그는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고 엉뚱한 존재인지 사랑한다. 사람들이 늘 완벽한 로봇처럼 명령에 따를 수 없다는 사실을 사랑한다.
그리고 인간이 서로를 점점 더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모습을 보고 슬퍼하면서도 웃음을 터뜨린다.
미키 17의 승무원들은 미키에게 계속 “죽는 기분이 어때?”라고 묻지만, 정작 그들은 자신이 이미 ‘죽은 채로’ 살아가고 있다는 걸 모른다. 하지만 영화가 끝날 때쯤이면, 그들은 ‘사는 기분이 어떤지’ 궁금해할지도 모른다.
평점 :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