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노스페라투(nosferatu, 2025) / 로버트 애거스
<노스페라투 없는 노스페라투>
<노스페라투>의 주인공은 분명히 노스페라투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원작 격에 해당하는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에서도 드라큘라 백작이 주인공이라기보다는 반 헬싱 박사가 주인공으로 비춰지나, 노스페라투에서는 주인공의 대척점, 즉 과학과 기술에 의한 선에 대앙하는 추상적인 악이라는 지위 자체도 박탈된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우선 올록 백작이 제약적 상태에 처해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는 대체로 예측 가능하다. (적어도 영화 내 디에게시스적 상황에 비추어보면) 그는 엘렌 후터의 부름에 의해 잉태된 악이다. 즉, 그는 탄생에서부터 주체성이 상실되어 있다. 또한 남편인 토마스 후터에게 아내를 탈취하기 위해 저급한 속임수를 써서 서명을 받아야 하며, 그 후 엘렌 후터에게 선택받기 위해 다시 한 번 승락을 받아야 한다. 이러한 수동성은 그의 행보에 대한 의문으로 연결된다. 앞서 말한 브람 스토커에서의 드라큘라 백작이 영국으로 오는 이유는 명백하게 악을 전파하고 종말을 선고하기 위해서였다. 그 동안 잠적해 있던 악이 깨어나 전면적으로 등장할 때의 두려움은 더 이상 숨길 것도, 숨길 이유도 없는 악의 무차별적인 행위에서 나온다. 은밀하게 행동했던 자들이 수면 위로 스스로를 노출시킨다는 것은 모든 준비가 갖춰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고, 그 모든 준비에는 목적이 없는 악의 행함, 이를테면 선과 악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힘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무차별적으로 행해지는 악은 권선징악의 규칙을 무시하고 언제든 나에게 닥칠 수 있는 위협으로 감지된다. 그것은 반종교적이고, 반윤리적인 악이다. 반면에 노스페라투에서 올록 백작이 독일로 오는 이유는 불분명하다. 그는 도시를 전염병으로 멸망시킬 수 있지만 그게 목적처럼 보이지 않는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목적이라면 엘렌 후터에게 다시 한번 더 선택을 받기 위해서인데, 그 이유 때문에 그가 처음 항구를 통해 마을로 진입했을 때 벌였던 쥐 떼들로 인한 전염병 등 소요사태는 일종의 어머니를 향한 아이의 떼쓰기처럼 보인다(이 과자를 사주지 않으면 마트 위에 드러눕고 다른 사람의 통행을 방해하겠어!). 게다가 그가 그녀에게 선택을 받는 것은 마을을 전염병으로 뒤덮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고, 또 그녀에게 선택을 받은 후에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역시 제시된 바 없다. 그러므로 올록 백작의 도착은 '엘렌의 부름' 때문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애거스의 노스페라투는 코폴라의 드라큘라와는 다른 의미로 낭만적이다.
<마녀, 가해자 혹은 희생양>
노스페라투, 즉 올록 백작이 주인공이 아니라면 그를 소환한 엘런 후터가 주인공임이 분명해 보인다. 애거스의 모든 영화에 마녀를 등장시킨다. 더 위치스는 애초에 마녀를 주인공을 내세운 영화이고 두 번째 영화 <라이트 하우스>에서도 윈슬로를 유혹하는 세이렌, 노스맨에서 미래를 예지하는 올가 등 마녀는 이야기에서 빠지지 않는 상징적 인물일 뿐 아니라 어쩌면 로버트 애거스의 모든 영화가 마녀라는 기의를 해체하고 재정의하는 영화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노스페라투에서도 역시 전면에 엘런 후터라는 초자연적 능력을 가진 여성을 내세우며 마녀신화를 해체한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예민한 감각으로 다른 사람들이 느끼지 못한 신비로운 일들을 경험하며 자랐다. 모든 마녀들이 그렇듯 그녀 역시 오해와 배척을 자양분으로 불안함과 자기의심을 키워나가며 남편인 토마스를 만나기 전까지 사회로부터 고립된다. 유년시절 외로움으로 인한 착각이라고 생각했던 올록 백작의 존재는 실제였고, 그녀가 그를 소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녀는 스스로가 악이라는 죄책감과 (남편 옆에 있을 때 환상을 겪지 않는다고 믿음으로써) 그 모든 것이 망상일 것이라는 희망 사이에서 살아간다.
이 이야기는 이를테면 16세기 흑사병으로 인한 마녀 사냥의 희생제의를 뒤집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 인류가 감당할 수 없는 대규모 참혹이 있고, 사람들은 그것을 감당하기 위해 희생양을 준비한다. 그 희생양을 제의로 바쳐 희생시킴으로써 죄를 사함받고 정화됐다고 믿는 과정을 통해 인류는 발전했다. 그러나 그 원죄는 여전히 누적적으로 쌓여있다는 것이 르네 제라르의 '희생양 매커니즘'이다. 인과적으로 전염병이 있고 마녀가 탄생한다. 아니, 발명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이 희생양의 선택 기준이 '폭력을 당하더라도 복수할 능력이 없는 자들'이었다는 점에 있다. 초자연적 권능을 가진 마녀라면 혹시 우리에게 복수하지 않을까, 라는 의문을 애초에 제기할 수 없을만큼 약한 자들을 선택한 것은 마녀의 규정 자체가 형용모순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예술에는 언제든 존재할 수 있기에 로버트 애거스는 여기에 '만약'을 넣는다. 만약 마녀가 실존했다면. 만약 마녀가 복수를 할 수 있었다면. 더 위치스에서 마녀는 실존했고, 라이트 하우스에서 세이렌은 한 남자를 파멸시킨다.
노스페라투에서는 인과관계가 뒤집어진다. 마녀가 있고 전염병이 발생한다. 애거스가 엘런을 통해 묻는 '악은 내부로부터 나오는 것인가요, 아니면 외부에서 오는 것인가요' 라는 질문은 엘렌 자신이 악인지 또는 올록 백작이 악인지 묻는 질문에서 '내가 만든 악이 나 스스로 만든 것인가요, 아니면 인류의 핍박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인가요' 라는 역사적 맥락을 갖게된다. 이 질문은 그녀의 선택과 연결된다. 그녀는 복수할 능력이 있는 자다. 올록을 받아들임으로써 (올록과는 다르게) 악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또 한번 희생양이라는 개념을 전복시키는 것을 선택한다. 그녀는 스스로 희생양이 되길 자처한다. 이로써 엘렌 후터라는 주체성은 두 번의 전환을 맞이한다. 부당한 박해의 주체에서 복수자로, 복수자에서 다시 구원자로. 그러나 그녀가 정말 스스로 희생양이 되도록 선택했는가, 아니면 선택되어졌는가.
앞서 말한 것처럼 그녀의 선택이 모두 적극적 주체로서의 선택이었는가. 이 희생이 치열한 고민 끝에 나온 선택, 악에 대항하는 선으로서의 선택, 또는 토마스를 향한 사랑의 결과물로서의 선택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그녀는 너무 빠르고 쉽게 자신을 희생으로 내몬다. 그러므로, 구원은 내부로부터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외부로부터 오는 것인지 우리는 다시 질문해봐야한다.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코폴라 드라큘라와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만든 게 재밌는 비교가 되더라고요.
그래도 어쨌든 드라큘라 영화인데 아무리 여주인공에게 몰아주기 했더라도, 드라큘라의 존재감, 카리스마가 후반에 확 죽어버린 게 아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