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라스트 오브 어스' 게임과 드라마 차이를 소개한 칼럼

일본 사이트 '리얼 사운드'에 올라온 글을 우리말로 옮겨봤습니다.
원문은 아래입니다.
https://realsound.jp/tech/2023/02/post-1255857_3.html
드라마판 <더 라스트 오브 어스>가 그린
또 하나의 ‘우리의 마지막’
글쓴이: ジニ(Jini)
※이 글에선 최대한 핵심적인 설명은 피했지만, 게임 및 드라마판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설명이 포함돼 있습니다.
현재 (일본) U-NEXT에서 서비스 중인 드라마판 <더 라스트 오브 어스>가 매우 흥미롭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원래 2013년 플레이스테이션3 용으로 출시된 게임으로, 전 세계에서 200개 이상의 상을 받은 명작이다. 드라마판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이를 원작으로 영상화한 작품인데, 해외 영화 평론 사이트 로튼토마토에서 96%, 관객 지수 93%로 원작 게임 팬 외의 사람들한테서도 높은 평가를 받아 일찌감치 시즌 2 제작이 확정되는 등, 벌써부터 2023년 드라마들 중에서도 파격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도대체 왜 드라마 판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이토록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일까? 게임과 드라마, 전혀 다른 매체를 어떻게 각색한 것일까? 원작 게임을 발매일부터 플레이했고, 드라마와 영화도 좋아하는 필자가 원작과 달라진 변화를 중심으로, 이 작품이 “지금의 무엇을 논하고자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애당초 원작 게임판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어떤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을까.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설정과 세계관은 드라마판이나 원작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 우선 원작 게임의 세계관부터 설명해보겠다.
배경은 2013년 미국이다. 주인공 조엘은 딸 사라와 단둘이서 평온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인간에게 기생해 사람을 흉포화시키는 균이 퍼지면서 미국 사회는 공황 상태에 빠지고, 그 와중에 사라는 사망, 조엘은 슬픔에 빠진다. 그리고 딸이 죽은 지 20년 후, 붕괴된 미국에서 살아가는 조엘은 동업자 테스와 함께 어떤 일을 맡게 된다. 그것은 균에 대한 항체를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소녀 엘리를 호위하는 일이었다. 조엘은 엘리와 함께 5,000km가 넘는 미국 횡단 여행에 나선다.
이처럼 작품의 기반이 되는 세계관은 '좀비 아포칼립스'인데, 이는 게임 중에서도 <바이오하자드> 시리즈 등에 자주 그려진 평범한 테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왜 전 세계적으로 이렇게나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일까. 그것은 “좀비물”이라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주제를,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게, 신중하게 다루면서 게임만이 가능한 표현 방법으로 살려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작품의 초반부만 보더라도 그 비범함을 엿볼 수 있다. 초반에 플레이어는 사라를 조종하여 침실을 벗어나 아버지를 찾으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이 부분의 연출이 훌륭하다. 세면대에 가보면 원인 모를 전염병이 퍼지고 있다는 내용의 신문이 놓여있고, 집 밖에선 여러 대의 경찰차가 달리는 소리가 들린다, 또 창문을 통해 보이는 의문의 폭발이 불안을 가중시킨다. 이처럼 게임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간접적인 이야기(환경 스토리텔링이라고도 부른다.)를 통해 플레이어는 조작을 하면서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다.
또 게임에서는 ‘전투’ 장면도 마련돼 있는데, 여기에 주목해야 할 점은 등장하는 ‘적의 AI’다. 이 작품에서 싸워야 할 상대는 주로 이성이 없는 ‘감염자’와 이성이 있는 ‘인간’이다. 그중에서도 ‘감염자’의 AI는 대단히 기계적이며 행동이 획일적이고, 시각과 청각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아서 회피하기 쉽다. 반면 ‘인간’의 AI는 지금 기준에도 놀라울 정도로 영리하고, 서로 협력하면서 사각지대를 커버하거나, 동료가 쓰러졌을 때 걱정하며 달려오는 등 “인간적인 면‘이 강조돼 있다. 이를 통해 ’감염자‘와 ’인간‘이 제대로 구분됨과 동시에, 한정된 자원을 놓고 인간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이야기 속 비극을 잘 강조하고 있다.
동시에 컷신(캐릭터를 조작할 수 없는 상태로 스토리를 진행하는 시퀀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싶다. 이 작품은 게임 플레이 사이에 삽입되는 컷신도 아주 세련되게 만들었는데, 연기, 연출, 각본 등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가 없다. 예를 들어, 이야기 초반에 조엘은 감염된 이웃 사람을 총으로 쏴서 죽인다. 그것을 보고 동요하는 사라에게 조엘은 자신도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딸을 진정시키려고 눈빛으로 호소한다. 이 장면은 부모라면 누구나 “나도 이런 태도를 취하겠구나.”라고 납득할 정도로 실감나는 연기이고, 영상 전체가 게임의 CG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퀄리티를 자랑한다.
이처럼 2013년의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표면적으로는 평범한 '좀비 아포칼립스'를 주제로 하면서도,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게임 특유의 방식, 그리고 AI를 활용해 감염자와 인간을 대비시킨 전투 장면, 또 컷신도 풀 CG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연기와 연출을 통해, 말 그대로 '영화 같은 게임(Cinematic Games)'으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조엘이 아닌 ‘시점’을 훌륭히 살린 드라마
지금까지 원작인 게임판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매력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눈치 빠른 분들은 알아차리셨겠지만, 사실 이러한 원작의 매력은, 필자 입장에선 드라마판의 큰 불안 요소였다. 솔직히 말하면 필자는 드라마판 <더 라스트 오브 어스>를 거의 기대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기반이 되는 '좀비 아포칼립스'라는 주제는 영화, 드라마 중에서 무수히 많은 고전 명작들이 존재하고, 이미 수없이 다뤄진 바 있다. 게다가 이 작품은 플레이어의 조작과 연동된 스토리, 최신 AI를 활용한 전투 등 게임만의 강점을 통해, 평범한 주제를 새롭게 재구성한 드라마틱한 존재였다. 이를 새삼 영화, 드라마라는 매체로 ‘역수입’한다는 건 다소 무모한 짓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있었다.
그렇다면 드라마판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도대체 어떻게 성공을 거둔 것일까.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건 ‘시점’이다.
우선 게임판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철두철미하게 주인공 조엘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따라가게끔 했다. 때때로 사라나 엘리의 시점으로 바뀌긴 하지만, 전체 플레이 시간 중 90%는 조엘의 시선과 입장에서 게임을 플레이한다. 이 게임은 TPS(3인칭 시점의 슈팅 게임)이며, 가상의 세계를 비추는 ‘카메라’는 항상 조엘의 등 뒤에 고정돼 있다. 이것은 게임인 이상 필연적이지만, 이 작품에선 오히려 그 특성을 살려서 조엘의 지극히 개인적이며 독선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이야기가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구체적으로는 오프닝을 제외하고, 작품 속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등장인물은 조엘의 입장에서 아군이냐 적이냐(이익을 주느냐, 피해를 주느냐)로 양분돼 있거나, 무대 대부분이 감염자와 폭도들로 가득한 위험천만한 장소라는 점이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조엘과 전혀 접점이 없는 타자나 전혀 위험하지 않은 장소도 있을 터인데, 작품 속에선 그런 요소들이 대부분 생략, 내지 컷신으로 요약돼 있다.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조엘이 품고 있는 ‘세상에 대한 실망감’과 ‘엘리에 대한 애정(보호욕이라고도 할 수 있다.)’을 그의 등 뒤에 고정된 카메라를 통해 강하게 공감하게 된다. 그리고 그 클라이맥스로서 게임 역사상 보기 드문, 독선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는 엔딩을 맞이하게 된다.
한편 드라마판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드라마 특유의 기법을 활용해, 게임의 카메라 활용과 그에 따른 독선적 카타르시스를 대단히 효과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예를 들어, 1화의 오프닝은 원작과 마찬가지로 조엘 가족의 시선으로, 팬데믹으로 사회가 붕괴되는 모습을 간접 체험시킨다. 하지만 “20년 후”라는 자막이 뜨고서는 조엘이 아닌 지저분한 몰골을 한 소녀의 시선으로 바뀐다. 이 아이는 20년 뒤 폐허가 된 미국 동부 지역을 떠돌다가 FEDRA(연방재난대응국, 팬데믹 이후의 미군)라는 조직의 보호를 받게 된다. 그곳에서 소녀는 “잘 참으면 밥도 장난감도 실컷 주겠다.”라는 말을 듣지만, 결국 치사량의 독극물 주사를 맞는다. 이후 그 아이의 시체가 운반된 시체 소각 시설에서 일하는 조엘의 시점으로 돌아온다.
이 10분도 채 안 되는 장면을 통해, 거의 폐허가 되어버린 미국의 미래, 그리고 아마도 부모를 잃었을 소녀의 슬픈 모습, 그런 소녀를 불쌍히 여기면서도 죽일 수밖에 없는 FEDRA의 무력함,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비극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처럼 존재하는 현실. 즉 조엘과 사라에게 닥친 비극이 결코 드문 일이 아니라는 것이, 이 장면에서 명확하게 그려지고, 또한 그 소녀의 시체를 묵묵히 나르는 조엘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원작 게임에서는 오프닝에서 극적으로 딸을 잃은 조엘의 비극을 강조함으로써, 타인을 거부하는 사고방식과 전투에서의 과격함 같은, 그의 독선적인 성격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삼았다. 또한 FEDRA 병사들도 기본적으로 무정한 적으로 묘사되어, 그들을 쓰러트리는 것에 대한 망설임도 별로 없었다.
한편 드라마판에서는 객관적인 시점으로 ‘소녀의 죽음’을 보편적인 것으로 그렸다. 그리고 조엘이 현실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고, FEDRA 역시 조엘과 같은 인간처럼 그려짐으로써 원작에서 받은 인상도 크게 달라졌다.
또 드라마판에서는 팬데믹이 발생하기 전에 과학자들이 팬데믹을 막으려 하는(그리고 실패하는), 시간적으로 봤을 때 ‘과거의 시점’을 도입한 점도 흥미롭다.
1화 시작 부분에선 1968년의 TV 프로그램에서 역학자가 바이러스와 균의 차이를 말하면서 “균을 막는 백신 개발은 불가능에 가깝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고, 또 2화 시작 부분에선 2003년 인도네시아에서 균류학자가 인류에게 기생하는 동충하초를 발견한 뒤, 더는 인류가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는 장면이 삽입돼 있다.
이것은 단순히 세계관 설명에 그치지 않고, <더 라스트 오브 어스>라는 이야기가 일반적인 ‘좀비 아포칼립스’와 달리, 대재앙의 뚜렷한 가해자나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 누군가를 쓰러트리거나 백신을 찾아냄으로써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말 그대로 ‘우리의 마지막’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갈 것인지를 그리는 이야기라는 점을, 게임에선 가져올 수 없었던 시점을 통해 잘 설명하고 있다.
또 하나의 ‘마지막’을 그린 에피소드 ‘Long Long Time’
지금까지 살펴본 드라마판 특유의 ‘시점’ 변화는 게임판의 이야기를 훌륭히 보완하고 있다. 하지만 3화 ‘Long Long Time’에 이르러서는 각색이나 보완이 아닌,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그것도 최고의 형태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원작 팬으로서 말로 표현 못 할 감동을 받았다.
‘Long Long Time’은 조엘이 자동차를 구하기 위해 오랜 친구 ‘빌’을 만나러 가는 이야기다. 하지만 3화 시작 후 5분 정도 지나면 조엘에서 팬데믹 직후의 빌로 시점이 바뀌고, 그 상태로 끝까지 이어진다. 즉 ‘Long Long Time’의 주인공은 조엘이 아니라 빌이다.
빌은 전형적인 ‘프레퍼(prepper, 세상의 멸망에 대비해 대피소에 무기와 식량을 비축하는 사람들)’다. 군의 대피 명령을 따르지 않고 홀로 폐허가 된 거리를, 함정 등으로 요새화하고 확보한 장비와 도구를 이용해 문명 붕괴 후에도 우아하게 살아간다. 그러던 중 우연히 찾아온 생존자 프랭크를 구하면서 두 사람의 공동생활이 시작된다. 둘은 가끔 충돌하기도 하지만 서로를 사랑하면서 소소한 일상을 즐긴다. 하지만 프랭크가 원인 모를 병에 걸리고, 제대로 된 치료도 못하고 의약품도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빌은 어떤 결정을 내린다.
이 ‘Long Long Time’ 에피소드는 실질적으로 한 편으로 완결되는 정말로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초반에는 빌이 ‘레드넥스러운 인물’이고, 그런 사고방식과 전략 덕분에 살아남는 모습이 그려진다. 하지만 나중에 그것은 빌이라는 인간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는 것, 그리고 빌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하고 사랑한 프랭크가 예술과 우정에 관해 이야기하고, 그것을 통해 빌도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얻을 수 없었던 사랑’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이 그리는 ‘우리들의 마지막’의 보편성을 조엘, 엘리와는 다른, 두 사람의 관계성을 통해 창조해낼 수 있었다. 에피소드의 제목이 된 린다 론스태드의 (노래) ‘Long Long Time’의 연출도 정말 훌륭했다.
원작 게임에서 빌은 욕지거리를 해대면서 조엘 일행을 도와주는 캐릭터에 불과했고, (그것도 충분히 인상적이었지만) 조엘 일행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맥거핀적인 입장, 게임을 진행시키기 위한 유도자 역할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의 성적 취향도 어디까지나 그의 측은함을 강조할 뿐, 그 자체로 특별히 인상적이지 않았다. 그런 그를 주인공으로 삼고, 결말까지 바꾸어가면서 그의 인간다움과 ‘우리들의 마지막’의 또 다른 해답으로 삼은 에피소드는, 그야말로 원작 게임의 영상화가 아니면 할 수 없는 표현이었다고 생각한다.
드라마판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어떤 ‘마지막’을 맞이할까.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드라마판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드라마 특유의 다의적인 ‘시점’을 통해, 원작의 핵심 주제인 ‘우리의 마지막’의 완전히 새로운 전개와 보편적인 질문을 동시에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중에서도 3화 ‘Long Long Time’은 그 절정으로서 원작(≒조엘)과는 전혀 다른 ‘마지막’의 삶과 사랑을 그렸다.
물론 지금까지의 논지는 드라마판이 게임판보다 뛰어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게임판은 어디까지나 게임만의 특성을 살려서, 게임만이 가능한 독선적이면서 감동적인 이야기를 그려냈고, 드라마판 역시 실사 영상만이 가능한 표현으로 완전히 새롭고도 아름다운 <더 라스트 오브 어스>를 만들었다. 둘 다 훌륭한 작품임이 틀림없다.
한편으로 단 3화만에 이렇게나 화제와 충격을 안겨준 드라마판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향후 전개가 무척 궁금하다. 원작에선 그 이후로도 인상적인 에피소드가 계속 이어지는데, 그중에서도 개인적인 희망을 말하자면 역시나 데이비드와 그의 집단이 어떻게 그려질지가 가장 기대된다. 그들이 정의를 내린 그들만의 ‘올바름’을, 지금의 조엘 일행이 어떻게 해석할지 도저히 예측이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을 드라마판 시점에서 어떻게 그릴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gol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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