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헤어질 결심: 안개 낀 바다의 풍경
영화 <헤어질 결심(2022)>의 주인공 송서래의 시점에서 재해석해서 쓴 이야기입니다.
극본을 세세히 참고하여 쓰지 못한 탓에 본편과 다소 상이한 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바다를 좋아했지 바다를 표류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서래는 생지옥이 펼쳐진 갑판 아래 구석에 양 무릎을 세워 끌어안고 눈을 꾹 눌러 감았다. 몸이 기우뚱할 만치 흔들리면 큰 파도가 오는구나, 했다. 배를 흔드는 파도마저 없었다면 바다에 떠 있다는 감각조차 잊었을 테다. 이 파도가 만 번쯤 치면 그때쯤엔 땅을 밟을 수 있겠지. 파도를 세다가 잊으면 다시 하나부터 셌다. 만 개의 파도를 세기 전에 갑판 위로 끌어올려졌다.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그렇게 송서래는 자신이 살아온 세월보다 더 길었던 열흘을 버텼다. 독한 것.
그 남자를 보자마자 서래는 판단이 섰다. 이 사람이면 되겠다. 그는 반복되는 일상에 신물이 난 듯 냉랭한 표정을 고수했지만 서래는 분명히 느꼈다. 자신에게 와닿는 흔한 남자들의 시선. 똥오줌으로 범벅이 되어도 타고난 태깔을 꿰뚫는 이성에 대한 본능적인 촉. 기도수는 사무적인 태도로 고개를 오른쪽으로 치켜들고 서래의 얼굴을 단 1초 흘낏 보았지만, 찰나에 둘은 각자의 목적이 달성되리란 것을 직감했다. 쾅, 입국심사 서류에 찍히는 날인.
남자는 서래 이름의 한자를 멋대로 바꾸었다. 쓰기 어렵다는 이유로. 서쪽에서 왔으니 西來란다. 서래로서는 그저 동쪽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을 뿐인데. 참으로 자기 생각만 하는 남자구나. 그때 알았어야 했는데. 아니, 알았어도 다른 방법은 없었을 거다. 이 남자가 아니었다면 이 나라에 발을 붙이자마자 도로 본국으로 송환되었을 테니까. 그랬다면 아마 지금쯤… 엄마와 함께겠지. 서래는 빨간 보자기에 싼 유골함을 일별한다.
어느 정도 각오한 일이었지만 남자는 도가 지나쳤다. 결벽과 소유욕은 비단 물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배꼽 아래 자신만 볼 수 있는 은밀한 곳에 자신의 다른 소유물과 똑같은 이니셜을 새길 때 서래는 참았다. 퇴근이 조금만 늦으면, 평소보다 조금 더 예쁘게 차려입으면… 당초에는 이유가 있었으나 이후로 남자는 습관처럼 손을 올렸다. 처음에는 살갗이 터졌고 나중에는 뼈가 부러졌다. 그래도 서래는 참았다. 남자의 손이, 발이, 물건이 몸으로 날아들 때마다 유골함 뚜껑에 숨긴 펜타닐 네 알을 떠올렸다. 이 폭력을 언제고 멈출 힘이 제 손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참을 수 있었다. 웃음이 났다. 서래는 소리 없이 우는 척하며 웃었다.
충동적으로 계획한 일은 아니었다. 살인, 그러니까 기도수를 죽이는 일 말이다. 애초에 ‘충동적’으로 ‘계획’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서래는 참고, 참고 또 참았지만, 언제부턴가 참고 싶지 않아졌다. 녹색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펜타닐을 쓰는 건 아까웠다. 한국에선 구하기 쉽지 않은 물건이기도 하고, 그렇게 편하게 보내주기는 싫었다. 무엇보다 그는 아름다운 죽음에 어울리지 않았다.
월요일 할머니를 약으로 재우고 매주 산에 올랐다. 산에 오를수록 서래는 더더욱 기도수라는 남자와의 거리감을 실감했다. 그는 산에 오르면 답답했던 가슴이 뚫린다고 했다. 서래는 산에 오르면 제가 밟고 지나가는 돌이 하나하나 가슴 위에 쌓여 종내에는 질식할 듯 답답해졌다. 산을 좋아하는 남자와 바다를 좋아하는 여자는 하나가 될 수 없는 법이다. 남자가 산에 오르는 속도와 비슷하게 산에 오를 수 있게 되었을 때 서래는 결심했고 실행했으며 남자는 좋아하는 산에서 영원히 떠날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
*
드라마로 한국을 배운 탓에 해준을 본 서래는 조금 놀랐다. 사실 아주 많이. 드라마에서 본 형사들은 험악한 얼굴에 편한 운동복 따위를 추레하게 걸쳤다. 회사원처럼 단정하게 기른 머리 모양, 위아래 잘 맞춘 정장, 얼핏 구두처럼 생긴 운동화, 손목의 스마트 워치. 서래는 해준이 눈치채지 않도록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사람을 돌보는 일을 하니까 상대가 알아채지 못하는 은밀한 시선으로도 많은 걸 알 수 있었다. 품위 있다. 서래는 해준의 첫인상을 이렇게 정리했다. 윽박지르지 않는 차분한 어조가 귓가에 맴돌았다. 어려운 단어를 애써 풀어 설명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나도 그 정도는 압니다, 하고 말하지 않은 이유는 한국 남자에게서 처음 느껴보는 해준의 상냥한 배려가 퍽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왔구나, 오늘도. 소파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이미 여러 차례 돌려본 드라마를 보며 이미 외운 대사를 중얼거리던 서래는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창 반대쪽으로 돌려 미소지었다. 그런데 당신, 밥은 먹었어요? 그는 저녁 내내 서래의 집 앞에 잠복하고 있었고(순전히 서래의 짐작이지만 확실했다) 그동안 드라마를 세 편이나 보았다. 빵이나 김밥 같은 걸 사다 두고 먹었을지도 모르지만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가 햄버거 따위를 우적우적 씹어먹는 건 상상이 안 됐다. 그는 수저를 들고 먹는 정갈하게 차려진 식사가 어울렸다. 이를테면 고급 초밥 정식 같은.
해준과 함께 다니는 젊은 형사가 집에 찾아왔다. 문을 열자마자 짙은 알코올 냄새가 훅 끼쳤다. 젊은 형사는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분에 겨워 중얼거렸고, 서래는 그걸 전부 알아듣진 못했지만 그가 여전히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았다. 술을 마셨으니 목이 마르겠다며 물을 한 잔 권했다. 젊은 형사는 벌컥벌컥 마시고는 소파에 옆으로 고꾸라졌다. 죽은 남자가 즐겨 마시던 위스키를 한잔 가득 따랐으니 그럴 만도. 힘을 쓰고 난 후의 가쁜 숨을 고르고 전화를 걸었다. 엉망이 된 거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자꾸만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와 멜로디가 우습게 망가졌다.
“또 아이스크림. 저녁 안 먹었죠?”
해준이 만들어준, 그가 할 줄 안다는 단일한 중국요리는 결단코 서래가 아는 맛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해준이 만든 음식답게 정돈된 맛이 났다. 서래는 남자가 해준 밥을 처음 먹어보았는데 무척 기뻤다. 해준의 왼손 네 번째에 있는 것과 같은 반지를 나눠 낀 여자는 이런 걸 수도 없이 먹었겠지. 질투. 저 형사의 심장을 가지고 싶어. 무척이나 부드럽고 따뜻할 거야. 그걸 내게 가져다 주겠니?
서래가 돌보는 할머니들이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하면 수면제를 주거나 주사를 놓았겠지만, 해준에게 그럴 순 없었다. 그를 침대에 눕히고 옆에 앉아 서래는 숨소리를 가다듬었다. 뭐든 똑바로 보려고 노력한다는 해준은, 자기가 잠든 사이에 무언가를 놓쳐 똑바로 보지 못하게 될까봐 제대로 잠들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서래는 속삭였다. 당신은 해파리예요. 눈도 없고 코도 없고 생각도 없어요. 그저 바다에 휩쓸려 흘러가듯 아무 생각 없이 맹목적으로 나에게 흘러와요. 해준은 잠에 가라앉았고 서래의 말은 방 안에 맴돌다 가라앉았다.
한국 사람들은 보통 사찰에서 데이트를 합니까? 서래가 물었다. 해준은 커다란 눈을 껌뻑이다가 여기 경치가 좋잖아요, 하며 경내의 목조 건물들을 가리켰다. 서래는 그 손끝이 가리키는 것 말고 그 손끝을 바라보았다. 해준 씨는 결혼한 사람이라 나를 만나는 걸 다른 사람이 보는 게 두렵습니까? 묻고 싶은 말은 가슴에 묻었다. 대신 그의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냈고 그가 서래를 미행하며 녹음한 파일을 꺼내어 함께 들었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자신의 일상이 읊어지는 것을 듣는 일이란 생소하면서도 묘하게 가슴을 일렁이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모든 파일을 다 듣고 나서 보관함에서 삭제하는 순간의 기분이란. 기도수가 산에 오르면 답답하던 가슴이 뚫린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마 지금 서래가 느낀 기분과 닮은 그것이었으리라.
“내가 서래 씨를 왜 좋아하는지 알아요? 서래 씨는 꼿꼿해요.”
서래는 해준이 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품위 있던 모습은 간데없고 들뜬 어린아이 같은 태도로 설익은 감정을 말하는 그가 처음으로, 싫었다.
고양이가 밥을 먹으러 오지 않았다. 아침에 채워둔 밥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물그릇에 날벌레가 죽은 채 둥둥 떠 있었다. 서래는 자리에 선 채 주변을 휘휘 둘러보고는 새 밥과 물을 채웠다.
현관 앞에 선 서래는 도로 내려가 고양이가 밥을 먹으러 올 때까지 기다릴까 잠시 고민했다. 뱃속이 차갑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스크림을 삼킬 때와는 다른, 안에서부터 퍼지는 한기에 몸을 가볍게 떨었다. 현관문을 열면 낯선 신발 한 켤레가 눈에 들어왔고 이내 소파에 앉은 해준의 말끔한 뒤통수가 보였다. 해준이 찾아오려고 고양이가 오지 않았나 보다. 서래는 자꾸만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끌어내리며 그의 옆에 앉았다. 해준은 곧장 1인용 소파로 자리를 옮겨갔다. 그는 예의를 차리는 게 아니라 거리를 두려 하고 있었다. 다시금 뱃속이 차갑게 식었다. 그 순간 해준이 녹음하던 습관이 떠오른 건 왜였을까.
“나는요… 완전히 붕괴되었어요.”
“……”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모르게 해요.”
“……”
붕괴. 무너지고 깨어짐. 저 사람은 나 때문에 무너지고 깨어졌구나. 무너진 것은 다시 쌓고 깨어진 것은 다시 붙이면 되는 것이 아니던가. 서래는 무너지고 깨어진 조각을 그러모아 짜 맞추었다. 설익은 감정이 어느덧 숙성하여 사랑이 되었다가 홀로 사그라졌던가. 붕괴된 사랑과 붕괴에서 피어난 사랑. 두 사랑이 엇갈렸다.
*
이포. 안개가 특산물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도는 동네.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를 좇아 나는 여기까지 왔나. 서래는 짙게 깔린 안개를 볼 때마다 해준을 생각했다.
해준은 우연이라 여겼겠지만, 시장에서 마주친 건 결코 우연 따위가 아니었다. 두 번째 남편 임호신은 한가하게 서래와 수산시장이나 걸어다닐 부류가 아니었다. 투자자들과의 모임 장소를 일부러 시장 근방에 잡았고, 모임이 끝난 후 저녁거리를 산다는 핑계로 시장에 들렀다. 남자는 구두 밑창에 비린내가 밴다며 투덜거렸지만 서래는 못 들은 척했다. 저만치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서래는 얼른 남자의 팔을 당겨 팔짱을 꼈다. 남자는 눈치가 빠른 족속이어서 왜 이러냐는 짜증 대신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한 쌍을 향해 짐짓 거드름을 피워 보였다.
남자가 해준의 부인과 명함을 주고받는 동안 서래는 해준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붕괴 이후의 해준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잠은 잘 자느냐고, 내 생각을 하지는 않았느냐고, 나와 듣던 노래를 지금은 듣지 않느냐고. 수많은 의문은 발화되지 못하고 휘발되었다. 동시의 해준의 눈도 많은 것을 묻고 있었다. 서래는 밀려드는 질문에 열심히 답했지만 해준에게 전해졌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죽어야 할 사람이 죽은 것을 가지고 왜 이리들 야단일까. 서래는 온 집안을 헤집고 다니는 경찰들을 보며 내심 비웃었다. 동시에 해준이 오기를 기다리면서도 초조했다. 이번에는 또 어떻게 죽였느냐고 추궁할 텐데, 이러려고 이포에 왔냐고 다그칠 텐데. 내가 죽이지 않았습니다. 이포에 오지 않으면 당신을 만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내 말을 이제는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번 붕괴되지 않기 위해서.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해준의 눈빛을 읽은 서래는 공허히 물었다. 적어도 해준에게만큼은 자신이 나빴음을 인정했다. 겨우 쌓아놓은 모래성 같은 해준을 다시 흩뜨리지 않으려고 서래는 결심을 했다.
호미산에 가서 해준을 소개하고 고운 가루가 된 외조부와 어머니의 유해를 뿌렸다. 서래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하는 해준의 등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저 등을 끌어안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면 마침내 우리는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기도수의 마지막을 담은 사진을 떠올린 서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름답지 못한 결말이다. 아름답지 못할뿐더러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는 결말이다. 서래는 무언가 사무칠 만한 여운을 남기고 싶었다.
“…언제요?”
“내가 언제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했어요?”
당신의 모든 말이 내게 사랑한다고 속삭였잖아요. 서래는 해준이 하는 많은 질문에 자신이 답을 하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해준이 알면서도 짐짓 되묻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보니 해준은 정말로 몰라서 물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서래는 그에게 완벽한 의문이 되기로 결심했다. 영원한 미결 사건이 되어 그의 집 벽에 서늘한 사진으로 박제될 것이며, 그가 경찰을 그만두고 그가 죽는 날까지도 그 벽에 유일하게 남을 단일한 사건이 되리라고. 그 벽에 갇혀 사는 해준이 1분에 47번 깨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녹음된 서래의 목소리를 하염없이 듣게 하리라고.
바다에서 온 서래는 바다로 돌아갔다.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남은 것은 해준의 끝없는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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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설 되게 많이 읽으신 것 같아요!! 흡인력이 대단해서 순식간에 읽어버렸네요 ㅎㅎㅎ
흡인력이 대단하다니 과찬이십니다😁
나 무슨 원본 시나리오인줄.. ㄷㄷㄷ
글 진짜 잘 쓰세요!👍
가슴에 확 와닿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