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넷플릭스 '러브, 데스+로봇 시즌3' 초간단 리뷰
1. 옴니버스 영화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넷플릭스의 '러브, 데스+로봇' 시리즈는 초딩 시절 동네 슈퍼마켓에 팔던 '종합선물세트'와 같았다. 크라운이나 해태, 롯데제과에서 내놓은 이 대형 박스에는 자사의 대표 과자들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특별한 날에만 부모님께서 사다주신 이 과자선물세트는 그 시절 어린이에게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행복이었다. 나는 가끔 'ABC 오브 데쓰'나 'V/H/S' 시리즈 같은 옴니버스 영화를 볼 떄 이런 즐거움과 포만감을 느낀다(오래전 일본 옴니버스 영화 '잼 필름즈' 시리즈도 좋아했다). 재능있는 젊은 감독들이 모여 기발한 아이디어를 담은 이야기를 펼쳐내는 걸 보는 일은 다른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2. 넷플릭스 '러브, 데스+로봇' 시즌2는 이전 시즌에 비하면 즐거움이 다소 떨어졌다. 이전 시즌에서 폭주하듯 발광하는 에너지는 시즌2에서 정돈된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나마 '풀숲'이나 '팝스쿼드', '거인의 죽음' 등은 매력이 있었지만, 불량식품이라기 보다는 고급 제과점의 디저트를 먹는 기분이었다. 이런 서운함을 넷플릭스가 들었을까? 시즌3은 폭주하듯 에너지가 넘치는 에피소드들로 꾸려졌다. 총 9개로 구성된 시즌3에서는 '킬 팀 킬'이나 '메이슨의 쥐'를 제외하면 모두 만족스러운 에피소드였다. 여기서 말하는 만족스러움은 아주 해롭고 불량하며 자극적이라는 의미다. '러브, 데스+로봇'은 사실 그런 맛에 보는 게 아니겠는가.
3. 시즌1에서 인기 캐릭터였던 세 대의 로봇이 다시 등장하는 '세 대의 로봇: 출구전략'은 전작에 이어 인류의 종말에 대해 유쾌하게 풀어내고 있다. 중요한 점은 이번 에피소드에 이르러서야 이 세계관의 복병이 고양이였음을 알게 된다. 요약하자면 '인류는 곧 멸망한다. 그리고 세상은 고양이가 지배하게 될 것이다'라는 메시지다. 썩 달가운 결론은 아니지만, 어쩐지 인류 중 상당수는 "차라리 고양이에게 복종하며 박스를 접겠습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이 에피소드는 나름 세 대의 로봇이 나누는 대화와 종말 이후 지구의 모습을 통해 인류종말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에피소드가 끝났을 때 기억에 남는 건 고양이가 세상의 주인이 된 모습뿐이다.
4. '어긋난 항해'는 이 프로젝트의 제작자인 데이빗 핀처가 직접 연출하고 '세븐'의 각본가인 앤드류 케빈 워커가 각본을 쓴 작품이다. 거창하게 시작해서 기발한 작화로 담아낸 크리처물은 데이빗 핀처의 데뷔작 '에이리언3'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배의 공간을 활용하는 것은 데이빗 핀처의 오랜 특기가 잘 살아난 대목이다. 크리처는 아래 선실에 있고 인간은 위에 선실에 있다. 그리고 선상에 뚫린 구멍으로 크리처의 먹이가 공급된다. 이렇게 나눠진 공간을 집요하게 활용하는 연출은 시청자가 배 안에 있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한다. 다만 카메라 워킹으로 공간의 입체감을 살리는 그의 장기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야기에서도 인물들의 선과 악 경계가 흐려져서 시청자에게 긴장감을 주고 있다. 크리처에게 지성을 부여하면서 이런 연출은 더 잘 살아났다.
5. '강렬한 기계의 진동을'은 대단히 시각적이다. 평범한 조난 에피소드가 될 수 있었던 게 몰핀으로 인한 환각을 시각화하면서 애니메이션만의 매력이 살아나기 시작한다. 마사 키블슨(맥켄지 데이비스)이 죽었는지 어땠는지 중요하지도 않을 정도로 다분히 시각적이고 관념적이다. 특히 세밀한 작화에 더해진 화려한 색감과 기괴한 연출은 가끔 오토모 가츠히로의 '아키라'도 떠올리게 한다. '강렬한 기계의 진동을'은 시즌3의 에피소드를 통틀어 가장 애니메이션다웠다.
6. '나이트 오브 미니 데드'는 일종의 힐링영화다. 별 다른 내용없이 초저심도 촬영으로 좀비 아포칼립스를 촬영한 이 에피소드는 잠이 안 올 때 반복재생 해놓고 멍 때리며 보고 싶을 정도다. 틀어놓고 멍하게 쳐다보면 스르륵 잠들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이번 에피소드는 '러브, 데스+로봇'보다 '헤드스페이스: 명상이 필요할 때'에 더 어울린다.
7. '킬 팀 킬'은 박력으로 밀어붙이는 에피소드다. 다만 캐릭터들이 너무 전형적이고 벌꿀오소리 친구의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벌꿀오소리와 대원들이 벌이는 최후의 전투에서 박진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차라리 이번 에피소드는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나오는 게 더 나았다. 벌꿀오소리의 강력함을 보여주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고 전투의 긴장감도 살릴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하나씩 죽어가는 대원들의 캐릭터성도 부여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대원들이 죽을 때 더 아쉽기 때문이다. 이번 에피소드는 단편이라 아쉽다. 장편이 궁금하다.
8. '스웜'은 의외로 청각적 구현이 돋보이는 에피소드다. 3D 애니메이션으로 벌레와 공간에 대한 묘사가 돋보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벌레의 소리(다리가 푸드덕거리는 소리)를 훌륭하게 구현해낸다. 이 때문에 벌레를 싫어하는 사람은 감히 도전하기도 어려운 에피소드다. 벌레 소리 못지 않게 대사도 효과적으로 구현했다. 마지막에 박사와 여왕 스웜이 나누는 대화는 하나하나 뜯어놓고 봐야 할 정도로 인상적이다. 이 대화에서 중요한 내용이 등장하는데 정작 에피소드를 볼 때는 인지하지 못했다가 나중에 알았다. 여왕 스웜의 마지막 대사인 "너와의 대화가 그리울 것이다"는 박사를 스웜에게 데려다 준 외계종족의 마지막 대사와 일치한다고 한다. 박사를 스웜에게 데려다 준 외계종족은 처음에는 다른 형태였다가 여왕 스웜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진화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박사를 데려다 준 그 순간에도 여왕 스웜의 조종을 받고 있었을 수 있다. 이는 스웜과 대결을 선언한 박사(인류 대표)가 패배할 것임을 암시한다.
9. '메이슨의 쥐'도 '킬 팀 킬'과 마찬가지로 장편이 됐어야 할 에피소드다. 헛간의 쥐가 진화해버렸고 이들을 잡기 위해 헛간 주인인 방제회사의 최신 쥐잡이 무기를 들여온다. 그러나 우연히 쥐들과 쥐잡이 무기의 처절한 전쟁을 목격한 주인은 스스로 쥐잡이 무기를 없애고 쥐들과 공생하기로 한다. 이 에피소드에서 자연 친화적 메시지를 찾을 필요는 없다. 다만 쥐들에게 충분히 부여됐어도 재밌을 캐릭터성이 부재한 건 아쉽다. 만약 조금 시간이 더 있었더라면 쥐들을 '라따뚜이'처럼 귀엽게 디자인하고 캐릭터성을 부여해서 더 처절한 전투를 그려내는 게 좋았을 것이다. 캐릭터성이 부여된 쥐가 끔살당해야 시청자들이 더 마음 아파할 것이다. 그래야 이 에피소드도 시청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10. '아치형 홀에 파묻힌 무언가'는 한글제목이 참 구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어제목도 저거라니 할 말이 없다. 제목이 구린 것과 상관없이 에피소드는 꽤 매력적이다. 무엇보다 크리처물의 종합선물세트라도 되는 듯 작은 크리처떼에서 중간 크리처를 거쳐 초대형 크리처까지 나오는 건 이런 거 좋아하는 팬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기 충분하다. 게다가 과감한 고어묘사와 충격적인 결말은 시즌3이 얼마나 작정하고 매콤하게 가는지 잘 보여준다. '아치형 홀에 파묻힌 무언가'는 시즌3 중 손에 꼽히는 매운맛 에피소드다.
11. 시즌3 중 최애 에피소드는 '히바로'다. '히바로'를 연출한 알베르토 미엘고가 시즌1에서 연출한 '목격자'도 대단히 독특한 디자인과 연출이 돋보이는 에피소드였다. 이번에는 거기에 매운맛과 공포가 더해지면서 에피소드가 더 강렬해졌다. 기술도 더 늘어서 돌아온 듯 하다. '히바로'는 소리로 사람을 홀리게 해 호수로 뛰어들게 하는 세이렌과 청각장애인 기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별 다른 대사가 한마디도 등장하지 않는다. '목격자'에서도 알베르토 미엘고는 대사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편집과 영상을 통해 인물의 감정을 설명하고 이야기를 전달한다. 애니메이션 작가의 가장 참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시각 연출에 대한 자신감이 드러난 결과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의 애니메이터로 참가한 이력답게 기존 애니메이션과 다른 혁신을 보여준다. 애니메이션도 더 진화할 게 남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언젠가 알베르토 미엘고의 장편이 보고 싶다.
12. 결론: 확실히 매운맛으로 그득한 시즌3이 취향에 맞다. 아쉬웠던 에피소드는 장편으로 봐야 더 재밌을 것 같다. 그런데 단편으로 온전히 정리된 에피소드도 장편으로 보면 매력이 있을 것 같다. '스웜'이나 '아치형 홀에 파묻힌 무언가'도 마음만 먹으면 장편 분량으로 뺄 수 있는 에피소드다. '히바로'나 '어긋난 항해'는 장편으로 늘이려면 굉장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지만 도전할 가치는 있다. 이번 시즌을 통틀어 단편 그 자체로 두는 게 나은 건 '세 대의 로봇: 출구전략'과 '나이트 오브 미니 데드' 정도다.
추천인 8
댓글 4
댓글 쓰기정치,종교 관련 언급 절대 금지입니다
상대방의 의견에 반박, 비아냥, 조롱 금지입니다
영화는 개인의 취향이니, 상대방의 취향을 존중하세요
자세한 익무 규칙은 여길 클릭하세요
진짜 뜯어볼수록 재밌는 에피소드인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