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 표류일기 - Tatsumi (2011)
아름다운 오마주
에릭 쿠의 애니메이션 <타츠미>(개봉명 '동경 표류일기')를 보았다. 이 애니메이션 영화는 싱가포르 영화감독인 에릭 쿠가 일본의 만화작가인 타츠미 요시히로의 삶과 작품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한 작품이다. 그러니까 타츠미의 삶을 다룬 짧은 단편들과 그의 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 옮긴 단편들이 교차하며 영화가 진행된다. 사실, 나는 이 일본만화작가의 작품을 본 적이 없어서 그에 대해 무슨 말을 할 형편에 있지 않다. 그런데 어쨌든 에릭 쿠의 이 새로운 시도는 그 자체로 매우 흥미롭다.
당연히 이 애니메이션 영화는 타츠미의 만화의 형태를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놓고 있다. 또 나레이션과 대사도 일본어로 진행된다. 나에겐 이것이 매우 다행스러웠다. 만약 캐릭터나 배경은 일본인데 대사가 영어였다면, 나는 매우 실망했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실제 타츠미의 모습이 보이는데, 이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 그는 일흔 다섯 살이라고 했다. 이것은 그의 삶이 일본의 현대사의 굴곡과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애니메이션 영화도 일본 현대사의 많은 사건들을 등장시킨다. 1945년 전쟁이 끝나지만 그것은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어 이십 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한 사건의 결과였다. 미국과 맺은 안보조약과 경제성장의 역사가 이어지지만, 그 사이에 일본인 여성들은 미군들을 상대로 매춘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경제성장의 과실은 모든 일본인들에게 나눠지지 않았다. 그 어두운 시절을 통과한 이 만화를 그리는 작가는 그 암울함을 그대로 자신이 그리는 프레임 속에 사실적으로 재현했다.
오사카에서 자란 타츠미는 테즈카 오사무를 존경했다. 실제로 어린 시절 그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집안형편이 어려웠고 아버지는 집안을 돌보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이 좀 이상한 아버지는 아들이 그린 만화원고를 찢어놓기도 했다. 어린이를 위한 만화를 그리기 힘들어지자 그는 성인들을 위한 만화를 그린다. 또 그는 단순히 만화가 아니라 ‘게키가(극화)’라는 개념을 제안하기도 한다. 그의 삶을 재현한 에피소드 사이에 그가 그린 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 옮긴 에피소드들을 볼 수 있는데, 그것들은 일본 현대사의 어두운 측면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또한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억압된 리비도에 대한 통찰도 엿보인다.
예를 들면, 한 에피소드에 곧 퇴직을 하는 샐러리맨이 등장한다. 그가 집에 가면 아내와 딸은 그의 퇴직금만 계산하고 있다. 십 년 째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하고 있지 않은 그는 아내를 증오한다. 몰래 비상금을 챙겨둔 그는 처음으로 아내를 배신하기로 한다. 술집여자와 조건만남을 하는 여자를 만나보지만 별로 만족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 사무실을 여직원이 그에게 식사를 하자고 제안한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술집에서 함께 술을 마시는데, 그 여직원은 자기를 떠난 애인이 부자의 딸과 결혼했다고 말한다. 결국 호텔로 가서 섹스를 하려고 하는데, 곧 퇴직할 만년 과장인 주인공은 정작 발기가 되지 않는다. 낙담한 채로 호텔을 나온 그 과장은 야스쿠니 신사로 간다. 거기에서 그는 할복자살을 하려고 한다. 그러다 그는 생각한다. 아내는 자신이 죽기만을 바랄 것이다. 그러니 아내에 대한 복수는 자신이 계속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후 그는 하늘을 향해 불쑥 솟은 대포 위로 올라가 소변을 본다. 비록 발기가 안 되더라도 삶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전체적으로 이 애니메이션 영화는 어둡고 우울하다. 타츠미가 살아온 삶과 세상을 생각하면 그것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세상이 암담해도 그 세상을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형상화하려는 예술가의 노력은 그 자체로 빛난다. 한 에피소드에서 타츠미의 분신일 만화가는 화장실의 낙서를 보고 처음에는 역겹다고 생각하지만, 그 음란한 낙서들이 그려진 화장실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왜 사람들은 그 공공 화장실에 와서 낙서를 하는가. 그렇게까지 하는 사람들의 욕망은 무엇일까. 만화를 그리고 소설을 쓰고 영화를 찍는 것은 화장실 벽에 낙서를 그리는 것과 동떨어져 있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원시시대에 동굴 벽화를 그리던 석기시대 사람들도 그들의 욕망을 벽에 그리지 않았을까.
나는 싱가포르 영화감독이 일본의 만화작가를 향한 이 ‘오마주’를 보면서, 그것이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타츠미과 테즈카 오사무를 존경했듯이, 에릭 쿠도 타츠미를 존경하지 않았을까. 그 존경을 이 아름다운 애니메이션 영화로 만들 수 있다니 에릭 쿠의 재능이 한없이 부러웠다. 살다보면 가끔 이렇게 아름다운 ‘사건’을 만나게 된다. 그런 ‘사건들’ 중의 하나가 바로 <타츠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2015년 7월 2일 개봉)
류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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