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크모드
  • 목록
  • 아래로
  • 위로
  • 댓글 3
  • 쓰기
  • 검색

동경 표류일기 - Tatsumi (2011)

류상욱 류상욱
8654 0 3

2.jpg


아름다운 오마주

에릭 쿠의 애니메이션 <타츠미>(개봉명 '동경 표류일기')를 보았다. 이 애니메이션 영화는 싱가포르 영화감독인 에릭 쿠가 일본의 만화작가인 타츠미 요시히로의 삶과 작품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한 작품이다. 그러니까 타츠미의 삶을 다룬 짧은 단편들과 그의 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 옮긴 단편들이 교차하며 영화가 진행된다. 사실, 나는 이 일본만화작가의 작품을 본 적이 없어서 그에 대해 무슨 말을 할 형편에 있지 않다. 그런데 어쨌든 에릭 쿠의 이 새로운 시도는 그 자체로 매우 흥미롭다.

당연히 이 애니메이션 영화는 타츠미의 만화의 형태를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놓고 있다. 또 나레이션과 대사도 일본어로 진행된다. 나에겐 이것이 매우 다행스러웠다. 만약 캐릭터나 배경은 일본인데 대사가 영어였다면, 나는 매우 실망했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실제 타츠미의 모습이 보이는데, 이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 그는 일흔 다섯 살이라고 했다. 이것은 그의 삶이 일본의 현대사의 굴곡과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애니메이션 영화도 일본 현대사의 많은 사건들을 등장시킨다. 1945년 전쟁이 끝나지만 그것은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어 이십 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한 사건의 결과였다. 미국과 맺은 안보조약과 경제성장의 역사가 이어지지만, 그 사이에 일본인 여성들은 미군들을 상대로 매춘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경제성장의 과실은 모든 일본인들에게 나눠지지 않았다. 그 어두운 시절을 통과한 이 만화를 그리는 작가는 그 암울함을 그대로 자신이 그리는 프레임 속에 사실적으로 재현했다.

오사카에서 자란 타츠미는 테즈카 오사무를 존경했다. 실제로 어린 시절 그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집안형편이 어려웠고 아버지는 집안을 돌보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이 좀 이상한 아버지는 아들이 그린 만화원고를 찢어놓기도 했다. 어린이를 위한 만화를 그리기 힘들어지자 그는 성인들을 위한 만화를 그린다. 또 그는 단순히 만화가 아니라 ‘게키가(극화)’라는 개념을 제안하기도 한다. 그의 삶을 재현한 에피소드 사이에 그가 그린 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 옮긴 에피소드들을 볼 수 있는데, 그것들은 일본 현대사의 어두운 측면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또한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억압된 리비도에 대한 통찰도 엿보인다.

예를 들면, 한 에피소드에 곧 퇴직을 하는 샐러리맨이 등장한다. 그가 집에 가면 아내와 딸은 그의 퇴직금만 계산하고 있다. 십 년 째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하고 있지 않은 그는 아내를 증오한다. 몰래 비상금을 챙겨둔 그는 처음으로 아내를 배신하기로 한다. 술집여자와 조건만남을 하는 여자를 만나보지만 별로 만족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 사무실을 여직원이 그에게 식사를 하자고 제안한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술집에서 함께 술을 마시는데, 그 여직원은 자기를 떠난 애인이 부자의 딸과 결혼했다고 말한다. 결국 호텔로 가서 섹스를 하려고 하는데, 곧 퇴직할 만년 과장인 주인공은 정작 발기가 되지 않는다. 낙담한 채로 호텔을 나온 그 과장은 야스쿠니 신사로 간다. 거기에서 그는 할복자살을 하려고 한다. 그러다 그는 생각한다. 아내는 자신이 죽기만을 바랄 것이다. 그러니 아내에 대한 복수는 자신이 계속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후 그는 하늘을 향해 불쑥 솟은 대포 위로 올라가 소변을 본다. 비록 발기가 안 되더라도 삶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3.jpg


‘굿 바이’라는 제목을 가진 또 다른 에피소드는 양공주를 등장시킨다. 미군을 상대로 매춘을 하는 일본여성. 그녀에게 자꾸 아버지가 찾아온다. 술만 마시며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아버지. 그가 딸을 찾아오는 이유는 간단하다. 딸이 돈 몇 푼을 집어주길 바라는 것이다. 비가 오는 날, 아버지는 다시 딸을 찾아간다. 그녀를 찾던 미군은 본국으로 떠나버렸다. 술에 취한 딸은 갑자기 자기의 옷을 찢고 아버지를 자기 품으로 끌어들인다. 이 근친상간의 장면은 전쟁 후 무너져버린 일본의 전통적인 가족에 대한 가치관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 같았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후 하늘에서 내린 ‘검은 비’가 세상을 뒤엎은 후, 더 이상 세상은 과거의 그것이 아니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이 애니메이션 영화는 어둡고 우울하다. 타츠미가 살아온 삶과 세상을 생각하면 그것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세상이 암담해도 그 세상을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형상화하려는 예술가의 노력은 그 자체로 빛난다. 한 에피소드에서 타츠미의 분신일 만화가는 화장실의 낙서를 보고 처음에는 역겹다고 생각하지만, 그 음란한 낙서들이 그려진 화장실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왜 사람들은 그 공공 화장실에 와서 낙서를 하는가. 그렇게까지 하는 사람들의 욕망은 무엇일까. 만화를 그리고 소설을 쓰고 영화를 찍는 것은 화장실 벽에 낙서를 그리는 것과 동떨어져 있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원시시대에 동굴 벽화를 그리던 석기시대 사람들도 그들의 욕망을 벽에 그리지 않았을까.

나는 싱가포르 영화감독이 일본의 만화작가를 향한 이 ‘오마주’를 보면서, 그것이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타츠미과 테즈카 오사무를 존경했듯이, 에릭 쿠도 타츠미를 존경하지 않았을까. 그 존경을 이 아름다운 애니메이션 영화로 만들 수 있다니 에릭 쿠의 재능이 한없이 부러웠다. 살다보면 가끔 이렇게 아름다운 ‘사건’을 만나게 된다. 그런 ‘사건들’ 중의 하나가 바로 <타츠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2015년 7월 2일 개봉)

류상욱 류상욱
16 Lv. 25501/26010P

익스트림무비 편집위원

 

신고공유스크랩

댓글 3

댓글 쓰기
추천+댓글을 달면 포인트가 더 올라갑니다
정치,종교 관련 언급 절대 금지입니다
상대방의 의견에 반박, 비아냥, 조롱 금지입니다
영화는 개인의 취향이니, 상대방의 취향을 존중하세요
자세한 익무 규칙은 여길 클릭하세요
profile image 2등

본 리뷰는 익무 스탭이셨던 故 류상욱 님이 2011년 9월에 작성한 글입니다.

영화가 오는 7월2일 개봉을 앞두고 있으며 익무 시사회도 예정돼 있어서

다시금 메인에 노출시킵니다.


17:55
15.06.12.
3등
생각보다 좀 된 영화였네요.저도 왜 에릭 쿠가 일본 만화가에 대한 영활 만들었을까 의아했는데,
글보니 더 보고 싶어지네요.
00:22
15.06.13.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에디터 모드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공유

퍼머링크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도뷔시] 시사회에 초대합니다. 2 익무노예 익무노예 12시간 전22:17 393
공지 [디피컬트] 시사회에 초대합니다. 8 익무노예 익무노예 3일 전20:46 1323
HOT ‘데드풀 & 울버린’ 뉴 푸티지 1 NeoSun NeoSun 1시간 전09:37 270
HOT 아카데미상을 놓친 에단 호크에게 덴젤 워싱턴이 한 조언 1 카란 카란 39분 전10:01 287
HOT <고질라 마이너스 원> 새 포스터 2 카란 카란 2시간 전08:24 598
HOT <추락의 해부>를 뒤늦게 보고 (스포O) 2 폴아트레이드 9시간 전00:48 522
HOT 나의 청춘 마리안느 (1955) 아름다운 환상의 서정시. 스포일... 6 BillEvans 10시간 전00:36 375
HOT 근조/세오덴 왕께서 승하하셨습니다 6 라인하르트012 10시간 전00:19 1368
HOT ‘범죄도시 4‘ 800만 돌파 4 crazylove 2시간 전08:24 743
HOT 전주영화제)배두나배우님의 관객팬들 대하는 모습들은 참 감... 5 이안커티스 이안커티스 2시간 전08:02 693
HOT 두아 리파 SNL 2 e260 e260 2시간 전07:53 795
HOT 휴 잭맨 Global Citizen 1 e260 e260 2시간 전07:52 303
HOT 김유정 얼루어 화보 비하인드 2 e260 e260 2시간 전07:50 329
HOT 2024년 5월 5일 국내 박스오피스 5 golgo golgo 10시간 전00:01 1966
HOT 레베카 퍼거슨 플런트 매거진 NeoSun NeoSun 10시간 전23:41 584
HOT <듄>, <오펜하이머> VFX 업체 대규모 인력 감축 1 카란 카란 11시간 전23:40 1529
HOT 미아 고스 ‘맥신’ 뉴 스틸 NeoSun NeoSun 11시간 전23:01 1042
HOT [반지의 제왕] 배우들 재회 사진 3 시작 시작 12시간 전22:40 2190
HOT 마돈나, 브라질 리우에서 콘서트 관중 동원 신기록 수립 3 시작 시작 12시간 전22:34 985
HOT [오 캐나다] 제이콥 엘로디 스틸 사진 공개 1 시작 시작 12시간 전22:28 589
HOT [오징어게임2] 대전서 막바지 촬영중 6월 끝난다 4 시작 시작 12시간 전22:08 2574
HOT 아무리 그래도 살아야지 <고질라 마이너스원> 후기 5 스누P 14시간 전20:33 1731
1135366
normal
BillEvans 14분 전10:26 51
1135365
image
NeoSun NeoSun 35분 전10:05 203
1135364
image
넷플마니아 넷플마니아 36분 전10:04 178
1135363
image
카란 카란 39분 전10:01 287
1135362
image
넷플마니아 넷플마니아 40분 전10:00 121
1135361
image
NeoSun NeoSun 44분 전09:56 101
1135360
image
NeoSun NeoSun 1시간 전09:37 270
1135359
image
NeoSun NeoSun 1시간 전09:27 188
1135358
image
카란 카란 2시간 전08:24 598
1135357
normal
crazylove 2시간 전08:24 743
1135356
image
golgo golgo 2시간 전08:21 326
1135355
image
이안커티스 이안커티스 2시간 전08:02 693
1135354
image
e260 e260 2시간 전07:53 795
1135353
image
e260 e260 2시간 전07:52 303
1135352
image
e260 e260 2시간 전07:51 185
1135351
image
e260 e260 2시간 전07:50 329
1135350
image
e260 e260 2시간 전07:50 248
1135349
normal
폴아트레이드 9시간 전00:48 522
1135348
image
BillEvans 10시간 전00:36 375
1135347
normal
라인하르트012 10시간 전00:19 1368
1135346
image
전단메니아 전단메니아 10시간 전00:17 687
1135345
image
golgo golgo 10시간 전00:01 1966
1135344
image
NeoSun NeoSun 10시간 전23:41 584
1135343
image
카란 카란 11시간 전23:40 1529
1135342
normal
으으12 11시간 전23:33 721
1135341
normal
dkfjdjdjsjw 11시간 전23:31 411
1135340
image
NeoSun NeoSun 11시간 전23:01 1042
1135339
image
시작 시작 12시간 전22:40 2190
1135338
image
시작 시작 12시간 전22:34 985
1135337
file
lincoln200th 12시간 전22:33 2068
1135336
image
시작 시작 12시간 전22:28 589
1135335
image
익무노예 익무노예 12시간 전22:17 393
1135334
image
시작 시작 12시간 전22:08 2574
1135333
image
넷플마니아 넷플마니아 12시간 전22:02 553
1135332
image
넷플마니아 넷플마니아 12시간 전22:01 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