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글, 스포) <용과 주근깨 공주> 스포가득 리뷰
“저 아이들은 현실의 모습이 드러났어. 가면을 쓴 벨은 저들을 도울 수 없어.
현실의 스즈가 도우러 가야만 해.”
<용과 주근깨 공주>는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3년만의 신작입니다.
제 기준으로 볼거리는 풍부했으나 개연성은 흔들리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이 글에서는 문제가 많은 개연성 얘기는 제쳐두고, 영화의 아름다운 부분만 보기로 하겠습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문제가 없어서 안 다루는 게 아니라, 문제가 꽤 있는데 이 글에서는 일단 안 다루기로 한 겁니다.
용과 주근... 그냥 용주공이라 하겠습니다
<용주공>은 가상세계 이야기를 좋아하는 호소다 감독이 썸머 워즈(2009) 이후 12년만에 내놓은 또다른 가상현실 영화입니다. 그리고 <미녀와 야수> 이야기를 약간 변주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변주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먼저 저희의 주인공부터 보고 가겠습니다.
소심하고 수수한 시골 소녀인 스즈. 저 짧은 소개에 ㅅ이 참 많군요
스즈는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랐고 외모 또한 특출나게 예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가상 세계 “U”에서 그녀는 세계 최고의 인기 스타, 벨이 됩니다.
가상 세계는 밝고 아름다운 곳입니다. 깨순이인 스즈도 아름다운 공주님이 되고
형형색색의 아바타들이 자신을 뽐내며 언제나 화려한 축제가 벌어집니다.
U에선 모두 가면을 쓰고 가면극을 펼칩니다.
자신의 단점을 떨쳐내고 장점만을 뽐내는 곳. U는 너무나도 좋은 곳 아닐까요?
브알챗 하는 이유를 알겠군요 방구석 오타쿠도 하와와 여고생이 된다는데
그러나 가상 세계 속에 진실은 얼마 없습니다. 귀여운 아기 아바타는 사실 불만 많은 뚱뚱한 아줌마였고
슈퍼스타 벨은 친구들 사이에서 한 소절도 못 부르는 소심한 시골의 여학생이었으며
모두를 주먹으로 때려눕힌 용은 아버지에게 얻어맞는 소년이었습니다.
같은 논리로 어쩌다 브알챗에서 만난 여고생은 방구석 오타쿠일 확률이 높겠습니다. 이런 세상에!
왜 영화 속 사람들은 U에 뛰어들었는가?
현실은 잊고 싶은 일들 뿐이니까. 현실은 흉하기만 하니까.
깨순이인 스즈는 루카만큼 아름답지 않고, 스즈의 강아지는 다리를 잃었으며, 스즈네 가족은 어머니를 잃은 편부 가정입니다.
다른 사람이라고 스즈랑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현실 세계에선 저마다 비밀과 치부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U에 뛰어들어 현실의 자신의 모습을 감춘 겁니다. 현실의 나는 흉하고 더러우니까.
눈이 어지러운 장식이 가득한 가면을 쓰고 코가 마비될 정도로 진한 향수를 뿌렸습니다.
이런 가상세계에, 진실은 없습니다. 진실은 곡해되고 숨겨집니다.
시각과 후각이 교란당하는 U의 세계는 거짓과 은폐, 혼선과 잡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는 영화에서 몇 번이고 보여지는데요,
'용의 성을 찾고 계신가요?' 용의 수하들이 보여주는 거짓 환각을 따라가다 보면 완전히 다른 곳에 도착하게 되고, 벨이 아무리 대화를 시도해도 용은 진실을 숨기고 입을 열지 않습니다.
최후반부에 벨은 용을 구하러 나서지만, 수많은 아바타들이 벨을 가로막고 방해하였습니다.
가상 세계에서는 서로의 목소리가 닿지 않습니다.
마치 스즈와 시노부의 대화를 방해하는 자동차들과 같이 말입니다.
U에서 사람들은 타인을 슬쩍 보고선, 함부로 섣부른 판단을 내립니다.
인기 가수였던 페기 수는 벨에게 한마디 했다가 한순간에 그녀를 비방하는 말풍선들에 짓눌려 묻혀 버렸습니다.
모두들 겉으로 보이는 용의 흉터만을 보고 등짝의 흉터가 용의 약점이라 믿었지만, 사실 용의 상처는 등이 아니라 마음 한켠에 있었습니다.
용과 춤을 추며 그를 껴안은 벨만이 그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거대한 가상세계 U뿐만 아니라, 라인 같은 메신저 또한 진실을 전하지 못합니다.
시노부와 잠깐 대화한 스즈의 모습은, 여자애들 톡방에서 사랑 고백으로 왜곡되었고, 바로 전쟁게임 시뮬레이션이 시작되었습니다.
또 스즈는 톡으로 상담을 부탁하는 루카가 시노부를 짝사랑한다 생각했는데, 사실 루카는 카미신을 짝사랑했죠.
저 오해가 생긴 이유는 스즈가 루카랑 톡으로만 얘기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저 오해가 풀린 순간은 둘이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를 나눈 때였습니다.
이렇듯 가상 세계에서 서로 가면을 쓰고 이야기하는 것은 진실을 전달하지 못합니다.
반면에 얼굴에 얼굴을 마주보고, 상대의 손을 잡고 전하는 진심은 절대로 빗나가지 않습니다.
가면 뒤의 사람, 그것이 현실이고 본질이고 진실이다.
이런 메시지를 가진 이야기가 또 있던 거 같은데,
그렇습니다. <미녀와 야수>입니다. 처음에 말했듯 이 영화는 <미녀와 야수>의 변주곡입니다.
미녀와 야수 내용 혹시 기억하시나요?
필요한 부분만 짧게 얘기하자면 '야수는 흉측한 외모로 인해 사람들에게 괴물로 몰렸는데, 사실 야수의 내면에는 착한 모습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미녀와 야수에서 '가면'은 남이 씌워준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야수의 외모를 보고 야수의 속 또한 흉측할 것이라고 단정지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용주공>에서는 좀 달랐던 거 같은데...
<용주공>에서 가면은 남이 씌워준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자신의 비밀과 치부를 숨기려고 앞다투어 직접 As를 뒤집어썼죠.
미녀와 야수에서 가면은 흉측하고 본질은 선하게 묘사된 것과 반대로, 용주공에서는 사람들의 본질이 흉하며 그것을 숨기기 위해 너도나도 화려한 가면을 뒤집어씁니다.
바로 이 변주가 인상깊습니다.
변주는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미녀와 야수에서, 가면 아래의 마음씨 여린 야수를 볼 수 있는 벨의 힘은, 야수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습니다.
반면에, 용주공에서 가면 아래의 오리진이 밝혀지는 것은 가상세계의 최악의 형벌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두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신기하게도 일치합니다.
가면이 추하고 본질이 아름답든, 가면이 아름답고 본질이 추하든,
가면은 가짜이고 그 아래의 내가 진짜이다.
바로 이것이 용주공의 메시지가 되겠습니다.
빡센 얘기는 잠시 내려놓고 재밌는 얘기를 조금 하겠습니다.
스즈와 친구들이 영화 속에서 보이는 모순적인 면모들도 흥미로운데요,
벨은 용을 도우려고 몇 번이고 그에게 다가가지만 용은 속마음을 절대로 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스즈는 아버지가 던지는 말에도, 소꿉친구가 걱정하는 말에도 묵묵부답으로 대꾸했습니다.
벨은 용의 마음을 열기 위해 그렇게도 노력했는데
오리진인 스즈는 마음의 문을 닫기만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벨이 유명인일 것으로 예상하고 정체를 캐려고 했습니다. 벨이 사실은 평범한 시골 소녀인 줄도 모르고.
히로는 그 모습이 바보같다며 비웃었습니다.
정작 히로가 용의 정체를 캘 때는 미술가, 야구선수 등 유명인을 먼저 의심했습니다. 용이 사실은 작은 꼬마인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저는 촉이 좋은 편은 아니라서, 영화를 보는 중에는 천사의 정체를 끝까지 몰랐습니다. 한참을 생각해봐야 천사가 토모, 즉 케이의 동생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정말로 재밌는 관계가 만들어지는데요,
"용은... 내 히어로야."
용은 토모의 하나뿐인 영웅이었습니다.
"네 노래는 아름다워."
천사는 첫 노래를 마친 벨을 유일하게 칭찬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용의 성으로 벨을 올바르게 안내한 것도 천사였습니다.
"케이, 구하러 왔어."
스즈는 케이를 구하러 온 유일한 존재였습니다.
케이는 토모를, 토모는 스즈를, 스즈는 다시 케이를 구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구원자인 것입니다.
다시 이 작품의 주제로 돌아가봅시다.
가상세계의 아바타 As는 거짓된 가면이었고 불신의 상징이었습니다.
재밌게도 이런 가상세계의 아바타가 믿음의 상징이었던 영화가 있습니다.
뭐라고? <용주공>의 호소다 감독의 생각과 완전히 반대되는 그런 영화를 만든 게 대체 누구지?
12년 전 <썸머 워즈>를 만든 마모루 감독 되시겠습니다.
영화를 안 본 사람을 위해 간략히 얘기하자면
썸머 워즈 역시 가상세계 OZ를 두고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최후반부에, 여주인공 나츠키 대 해킹 프로그램의, 세계의 운명을 건 캐삭빵 고스톱이 벌어지는데...
놀랍게도 사실입니다.
그러다가 나츠키가 걸 수 있는 계정, 즉 '아바타'가 다 바닥나 버렸습니다. 이대로 세계는 끝났다 싶을 때...
누군가를 시작으로, OZ의 사람들이 하나둘 그녀에게 '아바타'를 넘겨줍니다.
곧 전 세계의 사람들이, 그녀를 믿고 '아바타'를 넘겨 그녀를 응원합니다.
그렇게 나츠키는 세상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위에서 보듯 OZ에서 아바타는 믿음의 상징이었습니다. 세계의 파멸을 막기 위해 너도나도 나츠키에게 자신의 아바타를 믿고 넘겨주었습니다.
한편, 용주공에서 아바타는 철저한 가면입니다. 아바타를 뒤집어쓰고 대화하는 가상 세계는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같은 감독이 같은 '가상세계'란 키워드를 가지고 만든 두 영화가 이렇게 정반대의 시각을 보인다는 것이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한 영화는 희망차게, 다른 영화는 비관적으로 가상 세계를 바라봅니다.
마치 <썸머워즈>의 마모루 감독을 <용주공>의 호소다 감독이 반박하듯이 말이죠.
감독의 전작 얘기가 나오니 하는 말인데요, 용주공에서 감독의 전작들이 참 많이 보였습니다.
모두 얘기하기엔 너무 많으니 몇 가지만 보자면
시작하자마자 검은 화면에 한 줄의 가로선만이 보이는 건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오프닝을 생각나게 하고,
용주공 오프닝곡 "U"의 맨 마지막 소절 또한 시달소의 문구에서 왔을 겁니다.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또 가상세계를 헤엄치는 고래는 썸머워즈 때도 봤었죠.
이외에도 정말 많지만 여기까지만 보도록 합시다.
가상 세계에 정의는 없습니다.
U를 창조한 5인의 현자라는 작자들은 U에 정의를 수호하는 사람들을 세워두지 않았습니다.
저스틴의 말대로, 정의를 수호해야 할 경찰이 U에는 없습니다.
그나마 정의를 표방하는 단체, 저스티스는 날카로운 철퇴와 칼로 무장하고선 성 안의 아름다운 장미를 짓밟습니다.
또 리더인 저스틴은 정의의 집행보다 오리진을 밝히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U에 어서 오세요. U는 또 하나의 현실, As는 또 하나의 당신.
자, 세상을 바꿔보죠."
그러나 세상을 바꿨던 건, U나 As가 아니었습니다.
가정 폭력으로부터 용을 구한 건, 가면을 쓰고 출동한 수백 명의 용맹한 저스티스 요원들이 아니라,
스스로 가면을 벗고 작은 노래를 부른 한 주근깨 소녀였습니다.
<용과 주근깨 공주>.
가면과 가면 아래의 나 중 무엇이 중요하며 무엇이 진실인가?
재미있는 영화였습니다. 물론 처음에 언급했듯 개연성은 문제가 많지만요.
제가 감독의 전작들을 다 보지도 못했고, 본 작품들도 몇 년 전에 본 게 마지막인지라 틀린 부분이 많을지도 모릅니다. 댓글로 지적해주시면 확인해 보겠습니다.
용주공 리뷰는 여기까지입니다.
긴 글 읽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읽어줘서 감사합니다.
끝.
추천인 4
댓글 0
댓글 쓰기정치,종교 관련 언급 절대 금지입니다
상대방의 의견에 반박, 비아냥, 조롱 금지입니다
영화는 개인의 취향이니, 상대방의 취향을 존중하세요
자세한 익무 규칙은 여길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