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크모드
  • 목록
  • 아래로
  • 위로
  • 댓글 3
  • 쓰기
  • 검색

[노매드랜드] 관람평(스포x)

텐더로인 텐더로인
1899 15 3

movie_image.jpg

 

어제 관람한 <노매드랜드>는 아마도 제가 두고두고 순례할 영화가 될 듯합니다. 내 삶의 속도가 너무 빠를 때, 브레이크가 필요할 때, 이 영화는 부드럽게 저를 부를 것 같습니다.

 

아래는 스포일러 없는 평입니다.

 

------------------------------------------------------------------------------------------------------------

 

 

채굴지대 네바다 엠파이어의 정경을 보다 보면, 영문학에서 유명한 퍼시 비시 셸리의 소네트 <오지만디아스>가 떠오른다.

 

 

고대 지역 이집트에서 온 여행자에게 들은 얘기일세.

돌로 만들어 거대하지만 몸통은 없던 두 다리가

사막에 서 있었네. 그 옆의 모래밭에는

부서진 두상이 반쯤 묻혀 있었는데, 찌푸린

얼굴과 입술에 차디찬 조소를 띠고 있었네.

그 조각가에게 말하더군, 죽은 돌덩이임에도

그가 자신의 손과 마음을 바쳐 새긴 열정이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남아 드러난다고.

그리고 그 주춧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네.

내 이름은 오지만디아스, 왕 중의 왕이라.

이 몸의 위업을 보라, 강자들아. 그리고 절망하라!

그 곁엔 아무것도 없었네. 무너져 닳아버린

그 거상의 곁에는 외롭고 한결같은 모래밭이

그저 머나먼 곳까지 끝없이 펼쳐져 있을 뿐.

 

 

두 다리는 이 영화에서 다른 곳에 등장하는 (생뚱맞게 거대하게 서 있는)25m짜리 공룡 상 같기도 하다. 거기서 데이브(데이비드 스트라탄)는 펀(프랜시스 맥도먼드)의 사진을 찍어준다. ‘엠파이어는 몰락하고 황무지만 남았다.

 

 

<노매드랜드>의 인물들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동시에 영화 자체가 다큐와 극영화의 경계를 느슨하게 연결하고 있다. 이 세미 다큐멘터리 같은 <노매드랜드>는 무브먼트로 가득 차 있다. 유목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던 대지는 순환하고, 계절도, 직업도, 관계도, 집도 변화하고 움직인다. 모든 것이 동적인 여로의 기록. 노매드들은 순환을 통해 영속을 꿈꾼다.

 

 

한때 유목민(nomad)이란 말은 퍽 낭만적으로 들렸다. 20세기 말에 그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자크 아탈리의 <21세기 사전>같은 책(필자도 지난 세기부터 소장 중)에서는 디지털 노마드란 용어로 첨단 정보화 사회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신인류의 도래를 예고했다. 그러나 이 영화의 노매드는 그와 다르다. 가상의 세상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세상에서 모여든 문자 그대로의 유목민들. 첨단의 환상이 아니라 실존에 부딪히는 방랑자들의 세상. <노매드랜드>의 아메리카.

 

 

2008년 세계금융위기는 경제적 블랙홀이었다. 미국에서도 수많은 시민의 터전이 검은 저편으로 사라졌고, 마치 화이트홀처럼 떠도는 사람들을 뱉어냈다. 08년 이후로 그 사람들을 기록한 영화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노매드랜드>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그러나 감독인 클로이 자오는 현명했다. 동정하는 대신 귀 기울였고, 그들과 동행했다. 물론 미국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던 감독이 이 영화에서 정치적, 사회적 담론을 배제한 건 아니다. 그러나 <노매드랜드>는 논쟁하자는 영화가 아니다.

 

 

<노매드랜드>는 선택하는 영화. 거시적 경제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터전 밖으로 내몰렸지만, 노매드들은 포기를 선언하지 않는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나름대로 대안적 선택을 내린 것이다. 풀소유를 꿈꾸는 시대에서 무소유의 선택지를 환기한다.

 

 

동선을 그려보자면 <노매드랜드>횡단의 로드무비다. 네브라스카, 네바다, 그리고 북캘리포니아의 해안까지 가로지르는(물론 중간에 남쪽으로 한 번씩 튄다). 정주하지 못하는 삶을 기록한 또 다른 영화, <흔적 없는 삶>이 포틀랜드와 시애틀의 숲을 잇는 종단의 로드무비인 것과 대비된다.

 

 

테렌스 맬릭의 자연주의적 스타일에 영향을 받은 것(특히 <뉴 월드>)처럼 보이는 이 영화는, 연출의 리듬이 돋보인다. 롱쇼트와 미디엄 쇼트, 클로즈업의 변화가 리드미컬하다. 아마존은 하이테크 플랫폼 기반 산업인데도 그 거대한 창고 속에서 일하는 펀의 모습은, 마치 <모던 타임즈>의 찰리 채플린처럼 기계의 부속품 같다. 시간의 리듬은 홀연한 계절적 점프로 나타난다. 2년의 시간은 부드럽게 흘러간다. 연기가 아니라 삶 그 자체를 살아낸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한동안 회자될 것이다. 나에겐 언제나 <> 시리즈의 노아 보슨인 배우 데이비드 스트라탄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아마 영화에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많은 장면을 찍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나리오상 계획되지 않은 우발적 씬도 다수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클로이 자오 감독은 영화를 통해 삶을 판단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판단은 자연에 맡겼다. 노년과 노동의 문제에 관한 화두가 녹아있지만 치밀하게 밀어붙이진 않는다. 이 영화의 주된 관심은 마치 물처럼 흐르는 사람들(펀이 나신으로 물에 스며들었기 때문이 아니라)의 삶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 그리고 멀리 돌아와 우리에게 묻는다. 숨 막히게 살아가는 우리 영혼의 쉼터는 어디인지를.

 

 

"순환하는 대지를 따라. 당신의 영혼을 누일 집, 어디인가요?“

 

★★★★

텐더로인 텐더로인
33 Lv. 172347/190000P

"All those moments will be lost in time, like tears in rain."

신고공유스크랩

추천인 15

  • 내추럴
    내추럴
  • 피프
    피프
  • Nashira
    Nashira

  • moive21
  • 소설가
    소설가

  • 얼죽아

  • ns

  • wity
  • 쥬쥬짱
    쥬쥬짱
  • golgo
    golgo

댓글 3

댓글 쓰기
추천+댓글을 달면 포인트가 더 올라갑니다
정치,종교 관련 언급 절대 금지입니다
상대방의 의견에 반박, 비아냥, 조롱 금지입니다
영화는 개인의 취향이니, 상대방의 취향을 존중하세요
자세한 익무 규칙은 여길 클릭하세요
profile image 3등
잘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딱 맘에 안든거 하나.
.
.
.
.

별 반개 더 주시길.. ㅋㅋ
22:53
21.04.22.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에디터 모드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공유

퍼머링크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HOT [범죄도시 4] 호불호 후기 모음 3 익스트림무비 익스트림무비 4일 전08:38 19589
HOT 범죄도시4 관객수 비교 1 초우 21분 전00:06 197
HOT 2024년 4월 28일 국내 박스오피스 3 golgo golgo 26분 전00:01 410
HOT (약스포) 씬을 보고 1 스콜세지 스콜세지 34분 전23:53 126
HOT 범죄도시4 무대인사로 N차관람한 솔직평가 (사진있음) 3 한겻 1시간 전22:45 479
HOT [MCFF] 제 14회 마리끌레르 영화제 후기 3 안소의 안소의 2시간 전21:58 378
HOT 약스포) 범죄도시4 코엑스에서 무대인사로 보고 온 후기입니다. 7 갓두조 갓두조 2시간 전21:56 635
HOT 'The Teacher's Lounge'에 대한 단상 5 네버랜드 네버랜드 2시간 전21:37 284
HOT 재밌는 방식으로 공로상 받은 니콜 키드먼 1 golgo golgo 2시간 전21:37 586
HOT 데이비드 핀처 '세븐' IMAX 관람한 해외 매체 후기 7 golgo golgo 2시간 전21:28 944
HOT ‘범죄도시 4‘ 400만 돌파 9 crazylove 6시간 전17:35 1506
HOT 스즈키 료헤이 춤 4 GI GI 3시간 전21:08 678
HOT <범죄도시4> 무대인사 사진 공개 3 넷플마니아 넷플마니아 3시간 전20:50 503
HOT 범죄도시 4 단평... 6 다크맨 다크맨 4시간 전19:57 1917
HOT 싸인하는 기계, 존 시나 8 golgo golgo 6시간 전18:21 2303
HOT [범죄도시4] 손익분기점 가뿐히 돌파…5일만 400만 흥행 4 시작 시작 5시간 전18:39 923
HOT 라이언 고슬링이 밝힌 <나이스 가이즈> 속편이 없는 이유 3 카란 카란 6시간 전17:30 1470
HOT 역대 최고의 공포영화 엔딩 12 7 hera7067 hera7067 8시간 전15:37 1818
HOT 범죄와 도시 시리즈중 모가 제일 재미있으신가요? 13 SEOTAIJI SEOTAIJI 9시간 전14:56 1882
HOT 영화 <범죄도시4> 무대인사 영상과 사진 10 kairosfoto kairosfoto 13시간 전10:30 1089
1134417
image
NeoSun NeoSun 19분 전00:08 136
1134416
image
초우 21분 전00:06 197
1134415
image
golgo golgo 26분 전00:01 410
1134414
normal
방랑야인 방랑야인 33분 전23:54 245
1134413
image
스콜세지 스콜세지 34분 전23:53 126
1134412
image
카란 카란 47분 전23:40 126
1134411
image
NeoSun NeoSun 1시간 전23:19 167
1134410
normal
golgo golgo 1시간 전23:18 332
1134409
image
한겻 1시간 전22:45 479
1134408
normal
안소의 안소의 2시간 전21:58 378
1134407
image
갓두조 갓두조 2시간 전21:56 635
1134406
image
톰행크스 톰행크스 2시간 전21:52 163
1134405
normal
카스미팬S 2시간 전21:40 695
1134404
image
네버랜드 네버랜드 2시간 전21:37 284
1134403
image
golgo golgo 2시간 전21:37 586
1134402
image
golgo golgo 2시간 전21:28 944
1134401
image
GI GI 3시간 전21:08 678
1134400
image
NeoSun NeoSun 3시간 전21:05 362
1134399
normal
넷플마니아 넷플마니아 3시간 전21:04 402
1134398
image
넷플마니아 넷플마니아 3시간 전20:50 503
1134397
image
golgo golgo 3시간 전20:42 452
1134396
normal
이안커티스 이안커티스 3시간 전20:34 950
1134395
image
totalrecall 4시간 전20:20 443
1134394
image
golgo golgo 4시간 전20:14 725
1134393
normal
다크맨 다크맨 4시간 전19:57 1917
1134392
normal
이안커티스 이안커티스 4시간 전19:48 859
1134391
image
NeoSun NeoSun 5시간 전19:02 405
1134390
image
NeoSun NeoSun 5시간 전18:47 443
1134389
image
NeoSun NeoSun 5시간 전18:46 336
1134388
image
시작 시작 5시간 전18:39 923
1134387
image
넷플마니아 넷플마니아 6시간 전18:22 270
1134386
image
golgo golgo 6시간 전18:21 2303
1134385
image
넷플마니아 넷플마니아 6시간 전18:19 343
1134384
image
밀크초코 밀크초코 6시간 전17:50 1264
1134383
image
crazylove 6시간 전17:35 1506